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과 조셉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읽고
안녕하세요, 선생님.
명절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지요? 이번 연휴는 유난히 깁니다. 휴일이 시작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도 아직 주말 이틀이 더 남아 있어 마음이 여유롭습니다. 아마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오늘 저녁쯤부터는 출근에 대한 부담이 밀려왔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긴 연휴가 더 길게 느껴집니다.
저희 부부는 연휴를 하루 앞당겨 시작해 7일간 일본의 나라와 오사카를 다녀왔습니다. 나라시는 오사카에서 약 40km 떨어진 소도시로, 나라 현의 현청 소재지입니다. 일본은 710년에 나라를 영구 수도로 삼기 전까지 왕이 바뀌거나 정치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수도를 자주 옮겼다고 하지요. 794년에 다시 교토로 옮기기 전까지 나라가 일본 최초의 영구 수도였다고 하니, 그에 걸맞은 오래된 건축물과 문화적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희는 일본 특유의 질서 정연한 소도시 풍경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지는 한적하면서도 자연과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나라시로 정했습니다. 여행 기간 내내 한국처럼 비가 이어져, 대부분의 시간을 나라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슴으로 유명한 나라 공원에서 산책을 했고요. 일상에서 벗어나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은 언제나 좋은 기억을 남겨줍니다. 이번 여행도 그랬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연휴 중에 읽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읽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엔도 슈사쿠(1923–1996)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생 “신앙과 인간의 고통”, “구원의 가능성”, “동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의 충돌”을 주제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흔히 ‘신앙 소설’로 분류되지만, 단순한 종교적 서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고뇌와 신의 침묵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깊이 탐구한 문학입니다. 그 정점은 대표작 『침묵』에서 잘 드러나 있지요.
제가 읽은 『깊은 강』은 각기 다른 상처를 지닌 다섯 명의 일본인이 인도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신’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이야기입니다. 여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겉으로는 평범한 관광객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도 치유받지 못한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신앙을 조롱하고 사랑을 배신한 기억을 잊지 못한 미쓰코, 전쟁의 참혹한 기억에 시달리는 전직 군인 기사베, 병으로 잃은 아이의 기억을 품고 사는 아동문학 작가 누마다, 삶의 의욕을 잃은 냉담한 회사원 기사카, 죽음을 앞둔 남편을 간호하다가 인생의 의미를 잃은 사나에. 이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인도행을 택하지만, 그 목적은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삶의 끝자락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여행 그룹은 델리와 아그라를 거쳐 힌두교의 성지 베나레스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미쓰코는 오래전 자신이 깊이 상처 입힌 오쓰 신부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젊은 시절 신앙심이 깊었던 오쓰는 “신은 인간의 고통 속에 있다"라고 설교하다가 가톨릭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당했습니다. 이후 그는 인도로 건너와 갠지스 강가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강물에 띄워 보내며 살아갑니다. 교단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더 이상 제도적 사제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 속에서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떠도는 구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미쓰코는 마침내 오쓰를 다시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오쓰에게 신은 하늘 위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자연의 순환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실재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삶은 가톨릭 교리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지만, 미쓰코의 눈에는 오히려 그가 참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비쳤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신이 하늘 위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사랑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조셉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를 떠올렸습니다. 그 작품의 주인공 치셈 신부 역시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 참된 신앙을 찾아 험난한 길을 걸어갑니다. 오쓰 신부와 치셈 신부는 시대와 문화는 다르지만, 교리나 권위보다 ‘사랑과 연민’을 신앙의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도적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인간 속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한 인물들이지요.
제가 이번에 『깊은 강』을 읽으며 오래전에 읽었던 『천국의 열쇠』의 치셈 신부를 떠올린 이유는,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휴머니즘을 실천하며 보여준 점이 인상 깊었기 때문입니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몇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신앙의 본질을 ‘교리’가 아닌 ‘사랑’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치셈 신부는 신앙이 설교가 아니라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으며, 교회의 명령보다 인간의 선함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는 전도를 목적으로 한 신앙이 아니라 봉사를 통한 신앙을 실천했습니다. 오쓰 신부 역시 “신은 인간의 고통 속에 있다"라고 말하며 교회를 떠나 인도에서 죽은 자를 수습하고, 사랑과 연민의 행위를 통해 신의 현존을 증명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신을 믿는 것보다 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둘째, 제도 종교로부터 이탈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신앙인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이단’이라는 낙인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신의 진정한 의미를 좇았습니다. 치셈 신부는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교회의 태도에 순응하지 않았고, “신은 교회의 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오쓰 신부 역시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 속에 내재한다"라고 주장해 결국 가톨릭 교단에서 추방됩니다. 두 사람 모두 제도의 신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신, 인간 안에 내재한 신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공식 교회는 그들의 신앙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타인 속에서 신을 발견하려는 보편적 인간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타인의 얼굴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관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치셈 신부는 중국인들을 개종시키기보다 그들의 삶 속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하며 “그들 안에도 하느님이 계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쓰 신부 역시 힌두교와 불교의 문화 속에서 인간의 고통과 생명의 순환을 통해 신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는 “신은 모든 생명 속에 깃든다"라고 믿는 범신론적 태도를 보입니다.
이 밖에도 두 신부에게는 공통적으로 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 겸허한 태도, 그리고 신은 세계 밖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라는 신학적 사유가 드러납니다.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내재적 신’을 향한 이들의 믿음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서 있지만 같은 진실을 향해 걷는 두 신앙인의 길로 느껴졌습니다.
두 인물의 공통점이 인간적 사랑과 내재적 신앙의 실천에 있었다면, 그들이 신을 대하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도 존재합니다.
첫째, 신앙의 출발점이 다릅니다. 치셈 신부의 신앙은 철저히 신을 향한 순종과 봉사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하며, 인간의 고통을 신의 섭리 안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반면 오쓰 신부의 신앙은 신의 침묵에 대한 저항과 탐구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논리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고통 속에서 신을 느끼려 합니다. 치셈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신앙인이라면, 오쓰는 신의 부재 속에서 신을 찾아 헤매는 탐구자에 가깝습니다.
둘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드러납니다. 치셈 신부에게 신은 초월적 존재입니다. 인간이 닿을 수 없지만 그 뜻을 따라야 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신이지요. 그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 신의 의지를 체험하고, 인간의 선함이 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고 믿습니다. 반면 오쓰 신부는 신을 내재적 존재로 봅니다. 신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자연의 순환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는 신을 멀리서 숭배하기보다, 인간의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치셈의 신이 ‘위에서 내려오는 신’이라면, 오쓰의 신은 ‘인간 속에서 피어나는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들의 신앙이 향하는 구원의 방식에도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치셈 신부에게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행위를 통해 하느님께 다가가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과정을 신앙의 완성으로 봅니다. 반면 오쓰 신부에게 구원은 인간과 세계의 고통을 함께 끌어안는 행위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구원하려 하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 곁에 머물며 신의 현존을 증언합니다. 구원이 목표라기보다, 고통 속에서 신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 이미 구원인 셈입니다.
이렇듯 치셈 신부의 신앙이 위로부터의 신, 즉 초월적 신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전통적 기독교적 신앙이라면, 오쓰 신부의 신앙은 아래로부터의 신, 인간의 고통과 생명 속에 깃든 내재적 신앙에 가깝습니다. 같은 ‘신앙’이라는 단어로 묶이지만, 한쪽은 하늘을 향하고 다른 한쪽은 땅을 향합니다. 그러나 두 길 모두 결국은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들의 신앙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치셈 신부와 오쓰 신부의 신앙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들의 삶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보입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지만, 그 차이 속에서 저는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순종으로 신의 뜻에 다가가고, 다른 한쪽은 고통 속에서 신의 현존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그 두 시선의 사이 어딘가에서, 믿음이란 결국 말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신부의 신앙을 나란히 떠올리다 보면, 결국 ‘신을 찾는 일’이란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닿습니다. 누군가는 하늘 위의 절대자를 향해 나아가고, 또 누군가는 인간의 고통 속에서 그 존재를 느끼려 합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다를 뿐, 두 길 모두 인간이 ‘선’을 믿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느껴집니다.
오쓰 신부의 태도는 특히 제게 남았습니다. 그는 신의 부재와 침묵 속에서도 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이 부재한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의 고통을 끌어안으려 했지요. 그 모습은 종교를 넘어 인간의 실존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삶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엔도 슈사쿠가 말한 ‘깊은 강’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강물은 흐르며 모든 것을 품습니다. 인간의 죄와 상처, 그리고 끝내 용서할 수 없는 기억까지도. 오쓰 신부는 그 강의 흐름 속에서 신의 얼굴을 본 사람 같습니다.
반면 치셈 신부의 신앙은 신을 향한 순명과 헌신으로 삶의 방향을 세웠습니다. 그는 고통을 신의 시험으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봉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오쓰 신부와 다르지 않게 인간의 선함을 믿었고,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의 완성임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신앙은 서로 다른 형태의 ‘구원’을 향하지만, 그 본질은 사랑과 연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신부를 통해 신앙의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가라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을 향한 믿음은 종종 교리와 제도의 언어로 포장되지만, 결국 그것이 진실해지는 순간은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멈춰 설 때입니다. 신은 하늘에 있지 않고, 내가 외면하지 않은 그 얼굴 속에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가 그려낸 오쓰 신부의 모습은 그래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남습니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랑하려 애썼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너무도 인간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신앙이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요즘의 종교는 종종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구속합니다. 교리와 권위가 신앙의 본질을 대신하고, 믿음은 제도의 언어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옳음의 잣대를 들이대며 타인을 심판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오히려 억압의 수단이 되어버린 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치셈 신부와 오쓰 신부는 종교의 본래 정신을 되살린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은 신을 말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신을 증명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렀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가르침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내며, 신을 인간 안에서 살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태도야말로 종교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리는 인간의 언어로 쓴 약속이지만, 행동은 신이 인간 안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초월의 신보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신, 곧 모든 생명과 고통, 사랑과 관계 속에 깃든 신에게 더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신은 하늘 위의 심판자가 아니라, 인간의 눈물과 용서, 연민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은 엔도 슈사쿠의 오쓰 신부가 보여준 범신론적 세계관이자, 동시에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어쩌면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 때면 삶이 영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언제나 같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마 그 물음 속에서 제가 느끼는 불안과 탐구가,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앙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치셈 신부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삶과 행동이, 얼마 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을 찾아 읽기도 했지요. 종교는 없지만 삶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대하려는 제 성향이, 엔도 슈사쿠의 세계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은 언제나 사유의 폭을 한층 확장시켜 줍니다. 이번 연휴에도 그런 책을 만나, 그리고 그 감상을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로 쓸 수 있어서 참 만족스러웠습니다.
가족과 함께 따뜻하고 평안한 명절 연휴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2025년 10월 10일
제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