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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을 좌표로 삼다

by 세템브리니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혁명가였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람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질서를 뒤집고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발견은 단순한 과학적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세계 속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바꾼 인식의 전환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내 삶의 궤도를 바꾸어놓은 작은 ‘전환’이었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사춘기가 끝나가던 학창 시절이었다. 그즈음 나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른들도 흠결을 지녔고, 그들의 삶 역시 모순으로 가득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아니, 세상 그 자체가 불완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나를 구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않아도 됐다.


그 깨달음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꼭 반을 남겨 두었다가 퇴근한 아버지께 드릴 정도로.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는 아버지의 결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결핍이 어머니를 향한 왜곡된 감정으로 드러나면서, 나는 혼란과 분노 속에서 자랐다.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아버지의 불완전함은 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숙명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벌하며 살았다. 모범생의 궤도에서 이탈하면 ‘문제아’라는 이름이 따라왔고, 사회가 세워놓은 완전함의 기준에서 멀어질수록 자책은 깊어졌다. 세상이 요구하는 인간의 형태에 비해 나는 늘 어딘가 모자랐다. 불완전함은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 인식의 문을 열어준 건, 어느 날 우연히 읽은 한 소설가의 고백이었다. 그는 명성과 성취의 정점에 서 있었지만, 자신의 불완전한 삶을 숨기지 않았다. 유한한 인간에게 완전함은 불가능하며, 흔들림 속에서 견디는 일이야말로 예술의 근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멈춰 섰다. 그 순간, 내 안의 세계가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했다.


인간은 원래 완전하지 않다. 완전함은 멈춤이고, 불완전함은 움직임이다. 그렇게 인간이 만든 세상도 완벽할 수 없다. 결핍은 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닿을 수 있게 하는 열린 통로였다. 그 단순한 깨달음이 내 사고의 중심을 바꾸어 놓았다. 세상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구원이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불완전성이란 무엇인가


불완전성이라는 단어는 흔히 결함이나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불완전성의 정의는 아니다. 철학은 정답을 내리는 학문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온 말의 뜻을 다시 묻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이 말하는 불완전성은 결함이 아니라 ‘열림’에 가깝다. 그것은 고치거나 메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를 가리킨다. 완전함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닫힌 구조라면, 불완전함은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열린 구조다. 완전함은 끝이지만, 불완전함은 시작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살아 있고, 완벽하지 않기에 성장한다.


이 생각은 사실 오랜 철학의 흐름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결핍된 존재’라고 불렀다. 인간은 스스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언어와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를 보완하며 살아간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뜻이다. 하이데거 또한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라 했다.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세계의 조건을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존재의 가능성을 보았다.


수학자 괴델은 이를 논리의 언어로 증명했다. 어떤 완전한 체계 안에서도, 그 체계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불완전성 정리’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환상을 무너뜨렸다. 수학처럼 정밀한 세계조차 틈을 품고 있다면, 인간의 사유와 삶이 완전할 수 없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괴델의 증명은 오류가 아니라 세계의 구조를 드러낸 선언이었다. 불완전함은 체계의 실패가 아니라, 그 체계가 계속 확장될 수 있다는 증거다.


실존철학자들은 이 불완전성을 ‘되어감(becoming)’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인간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 ‘되어감’의 과정이 바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이다. 완벽함이 멈춤을 의미한다면, 불완전함은 움직임의 상태다. 우리는 매 순간 흔들리고, 흔들리기 때문에 다시 선택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살아간다.


따라서 불완전성은 결코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불완전성은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결함이 아니라,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이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유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변할 수 있다. 완전함이 닫힌 문이라면, 불완전함은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다.


우리가 완전해질 수 없는 이유


우리가 완전해질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구조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게 만들어진 존재다. 먹어도 다시 배가 고프고, 사랑해도 끝내 외롭고, 이해하려 해도 늘 오해가 남는다.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채우지만, 그 채움은 곧 또 다른 결핍을 만든다. 그 반복이 바로 인간의 리듬이다.

결핍은 인간을 괴롭히지만,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 불완전하지 않았다면 배움도, 예술도, 관계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배우는 이유는 스스로를 메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틈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완전함이 목표였다면 인간은 이미 멈췄을 것이다. 불완전성은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동력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질은 이 ‘되려는 욕망’ 그 자체일지 모른다.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갱신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의 존재. 언어는 그 증거다. 우리는 완전한 표현을 찾으려 하지만, 어떤 말도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말하고, 다시 쓰고, 더 나은 언어를 찾는다. 불완전함이 언어를 낳고, 언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타인은 나의 불완전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완전한 자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인간은 서로의 부족함을 통해 자신을 이해한다. 사랑은 결핍에서 피어나고, 공감은 상처에서 자란다. 인간이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여는 이유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완전성은 결함이 아니라 조건이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에 사유하고, 완벽하지 않기에 관계 맺으며, 완벽하지 않기에 끝없이 살아간다. 불완전성은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다. 완전함은 신의 속성이지만, 불완전함은 인간의 본질이다.


완전함이라는 환상


그럼에도 인간은 언제나 그 본질을 잊는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완전함의 환상에 매달린다. 완전해지면 불안이 사라질 것 같고, 흠이 없으면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완벽함은 결핍을 숨기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


완벽함은 언제나 매혹적인 얼굴로 다가온다. 더 잘해야 한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말은 발전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인간에게 결함을 허락하지 않는 명령으로 바뀐다. 완벽함은 표면상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비교와 두려움, 그리고 자기혐오가 숨어 있다. 완벽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자신을 벌주는 습관이 된다.


가장 먼저 폭력의 방향은 자신을 향한다. 사람들은 흠이 없고 단정한 삶을 ‘좋은 삶’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실수하면 스스로를 책망하고, 조금만 흔들려도 무너진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문장을 믿지 못하고, 끝없는 자기 검열 속에서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은 자존감을 높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결함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브레네 브라운이 말했듯, 완벽주의는 진정성을 가로막는 가장 교묘한 방어기제다.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의 연결을 잃는다.


그 폭력은 곧 타인을 향한다. 자신에게 가혹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가혹해진다. 나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실수나 모자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타인의 다름은 불편으로 읽히고, 관계는 판단으로 변한다. 우리는 타인을 평가하며 스스로의 결핍을 가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관계의 따뜻함이 사라진다. 완벽함의 기준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누구도 편히 숨 쉬지 못한다.


완벽함의 폭력은 침묵 속에서 작동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결함을 드러내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이 사회를 감싼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표정 속에 피로를 숨기고, ‘괜찮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한다.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의 일상은 조용한 경쟁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경쟁이 끝나는 지점에는 승리도 성취도 없다. 남는 것은 공허와 자기부정뿐이다.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완벽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흠이 있기 때문에 진실해질 수 있고, 모자라기 때문에 타인과 손을 잡을 수 있다. 완벽함이 만든 긴장과 비교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충분히 괜찮다.” 이 단순한 수락이야말로 완벽함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 그건 체념이 아니라 회복의 언어다.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 내부의 평화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인식은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는 세상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된 불완전성은 사실 세계의 구조와 닮아 있다. 자연의 움직임, 언어의 불완전한 전달, 사회와 역사의 모순까지—완전함의 신화는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실현된 적이 없다. 이제 불완전성이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임을 살펴볼 차례다.


과학적 통찰 ― 양자역학이 보여준 세계의 불완전성


고전물리학은 세상을 예측 가능한 질서로 이해했다. 뉴턴 역학이 대표적이다.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그 미래의 움직임도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완전한 체계로 여겨졌고, 인간의 세계 인식 역시 그 질서 위에 세워졌다.


20세기 초, 원자보다 작은 미시세계에서 이러한 질서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물리학자들은 전자와 같은 입자들이 고전적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양자역학’으로 불린다. 양자역학은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불연속적이며, 일정한 위치나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27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불확정성 원리’로 정리했다. 이 원리는 한 입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할수록 그 속도(운동량)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반대로 속도를 측정하면 위치가 불확실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관찰자는 물리적 세계의 상태를 완전히 규정할 수 없으며, 측정 행위 자체가 그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이 원리는 단순한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자연의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미시세계에서는 사물의 성질이 관찰 이전부터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상태로 드러난다. 이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양자역학은 따라서 고전물리학의 ‘완전한 예측 가능성’을 부정한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 속에서 움직이지만, 그 법칙은 확률적이며, 개별 사건의 결과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 물리학은 더 이상 절대적 확실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자연은 정지된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발견은 과학이 완전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자연은 예측 가능한 질서와 더불어 불확실성과 변동성을 동시에 지닌다. 세계는 확정된 실체라기보다,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결과다.


양자역학이 보여준 이 사실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로 해석될 수 있다. 불확정성은 오류나 혼란이 아니라, 세계의 근본 구조이며, 완벽한 통제나 절대적 기준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학은 더 이상 완전함의 상징이 아니라, 불완전함이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례가 되었다.


문학적 은유 ―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의 균열


자연의 세계가 불확정하게 움직이듯, 인간이 만든 언어와 서사 또한 완전하지 않다. 언어는 언제나 세계를 다 담지 못하며, 문장은 완결되지 않은 의미의 조각으로 남는다. 말은 사라지고, 기록은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문학은 바로 그 불완전함의 틈에서 탄생한다. 완전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장은 다음 문장을 부르며, 그 연속 속에서만 살아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균열 위에 서 있다.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 사랑과 상실 사이에서 흔들리며 자신이 누구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흔들림 덕분에 인물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어느 시인은 “언어는 틈으로 피어나는 꽃”이라고 했다. 틈이 없다면 꽃은 자라지 못한다. 문학은 흠 없는 진술보다 균열 속에서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낸다.


완벽한 시스템은 닫힌 세계다. 문학은 그 닫힘을 거부한다. 한 문장은 다른 문장을 예고하고, 한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의 문을 연다. 문학은 완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함을 통해 의미를 확장한다. 완전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독자가 그것을 읽는 순간마다 이야기는 새롭게 구성된다.


이 불완전성은 언어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반영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그 미끄러짐 덕분에 인간은 같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언어가 완벽했다면, 사유는 멈췄을 것이다. 문학은 이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의 감정과 기억, 관계의 복잡성을 복원한다.


문학은 완벽함의 대척점에 서 있다. 완벽한 문장은 감동을 주지 않는다. 감동은 언제나 빈틈에서 태어난다. 문학은 완전함의 환상을 허물고, 존재의 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 틈이 바로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다. 불완전성은 문학의 한계가 아니라, 문학이 인간의 언어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다.


역사적·철학적 사례 ― 완전함이 낳은 폭력


문학이 언어의 틈에서 인간의 진실을 보여준다면, 역사는 그 틈을 없애려 했을 때의 결과를 기록해 왔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완전한 질서를 꿈꿔왔다. 그 꿈이 체제와 이념의 이름으로 구체화될 때, 세계는 언제나 폭력의 방향으로 기울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전체주의 국가들은 ‘완전한 사회’를 목표로 내세웠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을 체제에 맞추기 위해 정화와 통제를 선택했다. 다양성과 모순은 질서의 결함으로 간주되었고, ‘완전한 국민’만이 살아남았다. 완벽한 공동체의 이상은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을 제거하려는 시도로 변했다. 그 결과는 숙청, 검열, 학살이었다. 완전함을 향한 꿈이 인간을 배제하는 논리로 변질된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체제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그녀가 본 악은 잔혹함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는 습관에서 비롯된 무사유의 결과였다. 완전한 질서 안에서는 의심이 불필요해지고, 사유는 체제의 불편한 요소로 여겨진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회일수록 개인의 판단과 책임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정상’이라는 이름의 집단적 확신이 대신한다.


미셸 푸코 또한 완벽한 사회의 환상을 ‘규율사회’라는 개념으로 비판했다. 근대국가는 효율과 질서라는 명목 아래 인간을 표준화하고 감시한다. 학교, 병원, 교도소는 모두 같은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규율의 언어는 완전함의 언어다. 불완전한 존재를 제도에 맞게 교정하고, 벗어난 이들을 다시 틀 안으로 넣는다. 완전한 사회의 이상은 결국 인간의 개별성과 자유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완전함은 안정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배제의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다름을 허용하지 않으며, 균열을 허락하지 않는다.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불완전성은 달랐다. 그것은 모순을 품고, 차이를 견디며,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불완전성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살아 있게 한다.


완전함이 낳은 폭력은 결국 인간의 조건을 거스른 결과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완전함을 강요하는 사회는 그 사실을 부정하며 인간의 본질을 제거한다.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질서는 언젠가 스스로 붕괴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균열을 받아들인 세계다. 그곳에서만 인간은 다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불완전을 좌표로 삼는 삶


우리는 오랫동안 완전함을 목표로 살아왔다. 더 나은 결과,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며, 그 여정의 끝에 완벽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현실과 맞닿는 순간 균열을 드러낸다.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세계 또한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 불완전함을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는 존재이며, 결핍을 통해 관계하고 사유하며 성장한다. 과학은 그 사실을 자연의 차원에서 증명했다. 자연의 질서는 완벽하게 닫혀 있지 않으며, 불확정성과 변동성이 세계의 근본 구조를 이룬다. 문학은 그 진실을 인간의 언어로 증언했다. 언어는 언제나 어긋나고, 서사는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는 완전함의 환상이 어떻게 폭력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완전함은 언제나 배제와 통제를 낳았다.


이제 불완전함은 결함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좌표로 남는다. 완전함이 목적지를 제시했다면, 불완전함은 방향을 알려준다. 완전함은 닫힌 도착지이지만, 불완전함은 열려 있는 여정이다. 우리는 흔들리며 나아가고,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을 갱신한다. 불완전함은 나를 무너뜨리는 힘이 아니라, 살아 있게 하는 움직임이다.

삶을 완성의 과정이 아니라 조율의 과정으로 본다면, 실패는 더 이상 중단이 아니라 조정의 순간이 된다. 모순은 파괴가 아니라 균형의 전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그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든다. 완전함을 추구하던 시선이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시선으로 바뀌는 순간, 삶의 형태도 함께 달라진다.


불완전을 좌표로 삼는 삶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는 삶이다. 오히려 그 결핍을 기준으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삶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고, 흔들리며, 계속되어 가는 존재로서의 삶이다. 완전함은 도달의 언어지만, 불완전함은 관계와 생성의 언어다. 인간은 그 언어 속에서 살아가며, 그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간다.


나에게 불완전성은 나와 타인을 용서하는 방식이자, 세상을 향해 서는 태도다. 완전함을 좇던 시선이 나를 끊임없이 소모시켰다면,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나를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았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결핍을 안고 있지만, 바로 그 결핍 덕분에 세상 속에서 계속 머물고,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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