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흐뭇하면서도 이상한 꿈을 꿨다. 가수 아이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우리 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넓었고, 어머니와 이모도 함께 있었다. 아마 어린 시절을 보낸 외할머니 댁을 마음속 ‘우리 집’으로 착각한 듯하다. 아이유는 가족들과 즐겁게 놀다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웃으며 돌아갔다. 꿈속에서 하루 종일 설레던 기분이 현실에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요즘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다. 현실보다 상상이 더 생생하게 움직이다 보니 이런 비현실적인 꿈을 자주 꾼다. 얼마 전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롯데월드를 함께 다니는 꿈도 꾸었다.
눈을 뜨니 오전 7시 15분. 내 기준으로는 늦잠이다. 반년 전 회사에 다닐 때는 아무리 더 자려해도 6시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늦게 자도 늘 같은 시각에 깨어나던 몸이었는데, 지금은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는 정직한 생체리듬이 찾아왔다. 평생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오전 7시는 어쩐지 게으른 시간처럼 느껴진다.
평일이면 일어나자마자 아내의 아침을 준비한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어제저녁을 늦게 먹어 과채주스만 만들기로 했다. 아내는 모계 쪽으로 눈이 약하다. 장모님을 비롯해 처가 식구들이 모두 녹내장이나 백내장으로 고생하셨다. 몸 하나만이 전부인 나는 신혼 초부터 아내에게 눈에 좋은 주스를 매일 갈아주었다. 사과 100g, 당근 100g, 블루베리 50g, 마 50g을 넣고 갈면 좋다고 들었다. 따뜻한 재료와 차가운 재료가 함께 들어 있어 몸이 찬 아내에게도 맞는다고 했다. 그렇게 ‘명안주스’라 이름 붙인 이 음료를 벌써 10년째 함께 마시고 있다.
아내를 출근길로 보내고 나면 보통은 글을 쓴다. 하지만 오늘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요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유난히 빛난다. 어제 동네 산책길에서 본 나무와 윤슬이 그렇게 경이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햇볕이 따뜻한 오늘은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편한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집 앞 산책길을 따라 인덕원 IT밸리와 청계산 입구까지 왕복하면 약 5km. 한 시간 남짓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기에 이만한 코스도 없다.
퇴사를 결심하다
지난 4월 중순, 4년간 다니던 바이오화학 회사를 퇴사했다. 회사는 원래 국내 대기업의 계열사였으나, 경영난으로 사모펀드에 매각된 뒤 다시 영국계 화학회사가 인수했다. 앉은자리에서 두 번의 주인이 바뀐 셈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차장에서 팀장을 거쳐 인사관리 임원이 되었다. 외국계 기업에서 쌓은 경력이 새 주인의 계획과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국내 기업에서는 보기 드문 40대 초반의 임원이었고, 그만큼 조직의 기대도 컸다. 첫해는 그 기대와 직원들의 바람 사이를 조율하며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가 시작될 무렵,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자리에 만족하며 살아도 되는 걸까.
직장 생활 내내 나는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에 완전히 나를 맞추지 못했다.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다른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막연히 기다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신혼 초, 불광동 수영장에서 만난 한 남자가 생각난다.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를 읽고 있던 나에게 “이 책, 재밌죠?” 하고 말을 건넸다. 그는 오지를 여행하는 방송국 PD였다. 시력도 좋지 않은 그가 안경 너머로 늘 책을 들여다보기에 물었다. “책은 왜 그렇게 읽으세요?”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언젠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몰라서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책을 읽고 있었다. 언젠가 닥쳐올 ‘무언가’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20년 넘게 책을 읽었다. 문학, 역사, 철학, 양자역학 같은 어려운 책들에도 자연스레 손이 갔다. 세상을 조금 더 진지하게 보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와 개념이 내 안에서 빛처럼 반짝였다. 읽다 보니 말이 쌓이고, 쌓인 말이 결국 글이 되고 싶었다.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과 중형 세단, 안정된 지위가 있었다. 글쓰기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다가와도 그 모든 걸 포기할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우리 둘 다 회사 그만두고 1년 동안 여행 다녀올까?”
그 말이 내 안의 스위치를 눌렀다. 1년간 아내와 여행을 하며 여행기를 써서 책을 낸다면, 나도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결혼 10주년 때 바빠서 챙기지 못한 기념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모아둔 돈과 퇴직금을 합치면 1년쯤은 버틸 수 있겠다는 계산도 섰다. 나는 아내의 제안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저 없이 동의했다. 내 빠른 수긍에 아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퇴직일을 3월로, 출국일을 4월 초로 정했다. 첫 도시로 포르투를 골랐다. 한 달 살이를 계획했고, 마침 그 시기에 열리는 포르투갈 아베이루 마라톤 대회에도 나는 신청했다. 하필이면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열리는 대회였다. 포르투를 시작으로 스페인, 독일, 크로아티아, 그리스까지 여정이 이어졌다. 우리는 퇴근 후와 주말마다 여행 계획을 짰고, 마일리지로 항공권도 예매했다. 여행 구상이 거의 완성될 즈음, 퇴근한 아내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여행, 그냥 미룰까? 나는 회사를 그만둘 용기가 없어.”
그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이미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힌 뒤였고, 모든 카운터오퍼를 정중히 거절한 직후였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우린 무모하지만 성실하잖아. 다녀와도 먹고사는 건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아내의 걱정은 달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다 버릴 수 있겠어.”
나는 인사팀에서 일하며 여성의 경력 단절이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인지 알고 있었다. 아내는 스무 살부터 판매 현장에서 일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나 역시 임원이 되었지만, 다시 시작할 자신이 있었고, 자리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언젠가 작가로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바닥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생각을 이해했고, 결국 나만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황당함보다는 웃음이 났다. 아내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 결국 나 혼자 회사를 떠나는 결말이라니. 그렇게 나는 퇴직을 결심했다.
여행 계획
드디어 퇴직을 했다. 날씨 좋은 4월이었다. 그동안 점심시간에 잠깐씩 쬐던 햇볕이나, 퇴근길에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던 산책로가 이제는 마음껏 펼쳐져 있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나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직장인’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계획이 있는 백수였다. 스스로 선택한 백수였기에, 그 정체성에는 묘한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회사에서 그랬듯, 세상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퇴사’라는 사실을 완전히 실감하기에는 아직 이르렀다.
계획은 단순했다. 처음 두 달은 아무 계획 없이 쉬는 것. 15년 동안 한 번도 계획 없이 쉰 적이 없었으니, 이번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와 함께 세웠던 세계 여행 계획은 취소했다.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는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보름 정도였다.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더 불안해했던 탓이다. 그래서 긴 여행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언젠가 둘 다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함께 떠나기로.
그 대신 나 혼자 떠나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TV 프로그램과 책에서 수없이 보아온 그 길은, ‘자아를 찾는 여정’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걸으면 직장인으로 살았던 내 삶과 완전히 결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포르투를 시작으로 해안길을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일정을 세웠다. 스무날 남짓 걸릴 계획이었다. 마일리지로 왕복 항공권을 예약했고, 귀국 편은 바르셀로나에서 인천까지 비즈니스석이었다. 떠나기까지 한 달 반의 여유가 있었다.
그 한 달 반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아내가 제안을 했다. “5월 초에 내가 뉴욕 출장을 가는데, 같이 갈래?” 큰 도시는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 가보는 미국이라는 점에 마음이 움직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상상했던 센트럴파크와 모마 미술관이 떠올랐다. 출장 기간의 숙박비가 절약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비행기 좌석은 고민이었다. 아내는 회사 지원으로 비즈니스석이었지만, 나는 다섯 배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백수의 신분으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비행시간 열몇 시간에 쓰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코노미석을 예매했다.
뉴욕은 산티아고 출발 2주 전 일정이었다. 동쪽 끝 뉴욕과 서쪽 끝 포르투를 두 주 간격으로 여행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 정도야 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게 얼마나 무리한 일정이었는지는 나중에 포르투에 도착해서야 실감했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도 한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마침 봄이 완연하게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집에만 있기엔 아까운 계절을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매일 조금씩 다른 풍경과 온도를 체감하기에는 도보 여행이 제격이었다. 지리산 화대종주나 설악산 공룡능선을 고민하다가, 결국 관리가 잘 되고 안내 어플까지 있는 남해 바래길을 선택했다. 수도권보다 따뜻한 남해에는 이미 봄이 완전히 와 있었다. 그 계절의 공기와 빛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