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긍정한다는 것

낯 뜨거운 나의 당근 모임 자기소개

by 세템브리니

얼마 전, ‘당근마켓’의 동네 책 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 자기소개를 쓴 적이 있다. 기존에 참여했던 독서 모임에서는 선택하는 책의 난이도가 일정 수준을 넘기 어려웠다. 이런 점을 의식해 나는 무심코 이렇게 적었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분과 책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며칠 뒤, 한 분이 정성스러운 답글을 남겼다. “반갑습니다. 책 읽고 나누다 보면 다양한 향기가 함께 어우러져서 멋진 향기가 남습니다.”


처음에는 내 말에 따뜻하게 화답해 준 것 같아 반가웠다. 그런데 곧, 내가 쓴 자기소개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자리에 ‘비슷한 사람’을 찾는다는 건 과연 적절한 태도일까. 사실 나는 낯설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새로운 사유를 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왜 그런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저런 문장을 썼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가 쓴 문장이 낯 뜨거운 위선처럼 보였다. ‘비슷한 취향‘이라는 말은 친근함과 안정감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낯섦과 충돌을 피하려는 방어적 언어이기도 했다. 민망한 마음에 얼른 답글을 다시 달았다. “네, 책이 품은 다양성과 책 읽는 사람이 가진 향기를 공감합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내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말은 그렇게 썼지만, 정작 내가 책 모임에 참여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름에 있었다. 내게는 타인의 감상과 사유가 내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일이 더 중요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는 장면. 그 다름의 이유를 따라가며 내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시야를 발견하는 일. 바로 그것이 내가 모임을 찾은 이유였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비슷함’은 언뜻 편안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실은 다름을 회피한 표현이었다. 내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다양한 책을 함께 읽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연히 읽게 된 들뢰즈의 철학에서 뚜렷한 언어를 찾게 해 주었다. 그는 동일성의 논리로 차이를 사유하는 모든 사유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들뢰즈는 차이를 단지 수용하거나 포용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보는 태도 자체가 여전히 동일성의 사유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차이를 인정한다’, ‘다름을 존중한다’는 말조차 실은 나와 다른 것을 견디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나를 변화시키지 않는 차이이며, 내가 여전히 중심에 있고, 그 차이는 주변에 머무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태도를 비판한다. 진정한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부에 작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이 하는 것이다. 타인을 통해 나의 동일성이 더 공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이 내 안의 또 다른 가능성을 깨워야 한다. “차이를 만드는 나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차이의 주체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은 단순한 관용이나 존중을 넘어선다. 그는 다름을 수용하는 윤리보다, 다름에 의해 변형되는 존재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 말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책 모임에서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의 안락한 대화가 아니라, 나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줄 어떤 ‘다름’이었음을 이제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차이’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단어로 남아 있다. 겉으로는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유사한 것들끼리의 결합이 더 편하다. 내가 몸담았던 조직에서도 새로운 팀원이 들어오면 ‘잘 어울릴 만한 사람’인지부터 살폈다. 특이하거나 다른 생각은 융화의 대상이기보다는 경계하거나 조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조직의 효율을 위하거나, 개인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우리는 자주 ‘비슷한 사람’을 선호했고, 다름은 종종 불편한 것이 되었다. 나를 흔들고, 내가 세운 기준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름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통제하려 든다. 그 결과 차이는 중심에 편입되지 못한 채 늘 경계에 머문다. 그리고 중심에는 여전히 동일성이 자리 잡는다. 나는 다양한 조직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들뢰즈는 이런 경계선을 허문다. 그의 철학은 차이를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생성의 가능성으로 본다.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는 내게 또 다른 나를 생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만남은 나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일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긍정’은 나를 확장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반복은 언제나 차이를 동반한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늘 다른 방식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이 반복은 시지프의 신화를 들뢰즈 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 준다.


시지프는 매번 같은 바위를 같은 산으로 밀어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반복은 단조롭지 않다. 바위는 언제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구르고, 시지프의 몸은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을 감당한다. 그 반복 안에서 시지프는 스스로를 동일하게 유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늘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밀어 올리며 다른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 속에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된다. 이것은 억압적인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 반복이다. 들뢰즈가 말한 생성으로서의 반복이다. 나는 이 해석에서 위안을 얻는다. 우리 삶의 일상은 본질적으로 반복이지만, 그 반복은 동일성의 덫이 아니라 생성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책모임에서 남긴 민망한 내 인사말은 의도가 어쨌든 동일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문장 안에서 나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어떤 분의 ‘다양한 향기’라는 표현 덕분에 나는 나의 한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한계에서 의미를 찾기로 했다. 나와 다른 사람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나의 생각이 흔들리고, 내가 내가 아닌 누군가로 변이 되는 일이다. 그것은 두려우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나를 벗어난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자, 반복의 윤리이다.


앞으로 나는 그 철학을 일상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로 실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넘어서게 하는 계기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차이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나를 내맡기는 일. 그곳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어가지 않을까.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나라는 동일성을 흩뜨릴 것이다. 그리고 그 흩어짐 속에서 더 많은 나, 더 깊은 나, 더 넓은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선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매번 낯선 존재인 아내에게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아주 다르고, 자주 서운하고, 가끔 친절한… 그 다름을 인정하는 일부터. 쉽지는 않겠지만, 철학이라는 게 꼭 책상 앞에서만 작동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을 가장 많이 변이 시킬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식탁 맞은편에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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