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의 기원: 흔들림으로 존재하다.

흔들리는 혁준이에게 (별이 삼촌이)

by 세템브리니

우주는 갑작스럽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작고 뜨거웠던 한 점이 어느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과학자들은 이 급격한 팽창을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상조차 어려운 규모로 우주가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이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우주 전체에 가득했던 에너지에서 비롯되었다.


과학자들은 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장을 ‘인플라톤장’이라고 부른다. 어려운 용어지만 냄비를 올려놓고 불을 켰을 때 일어나는 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처음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냄비 바닥에서는 서서히 열기가 올라온다. 물은 조금씩 데워지고 내부에서는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물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바닥의 열기는 점점 더 커지고 뜨거워진다. 어느 순간 바닥에서부터 작은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점점 더 빠르게 더 크게 기포가 생겨나고 결국 물은 끓기 시작한다. 인플라톤장은 이때 냄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같다. 냄비 속 물은 우주의 공간이고 바닥의 열기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장이다. 이 에너지가 급격히 우주를 팽창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플라톤장이라고 하는 이 에너지 상태도 완벽한 평형 상태가 아니었다. 어떤 지점은 아주 미세하게 더 뜨거웠고 다른 지점은 상대적으로 덜 뜨거웠다.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는 것은 작은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이 미세한 차이를 ‘양자요동’이라 부른다. 어떤 에너지도 완벽히 고요하거나 정지하지 않는다는 원리 때문이다. 냄비 속 물이 조용해 보이지만 사실 바닥에서부터 작은 움직임이 계속 있듯이 우주 초기의 에너지도 아주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작은 흔들림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급격한 팽창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우주 전체로 확대되었다. 작은 요동이 우주 전체에 커다란 얼룩을 만들었다. 이 얼룩은 밀도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우주 곳곳에 조밀한 부분과 희박한 부분이 생겼다. 밀도가 더 높은 지역은 주변의 물질을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중력이 작용한 것이다. 중력은 물질을 점점 더 모았다. 수소가 가장 많이 모였고, 결국 수소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수소가 많이 모이면 중심이 뜨거워진다. 중심의 온도와 압력이 높아지자 결국 핵융합이 일어났다. 별이 점화되었다. 별은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이자 존재다.


별은 수소를 태우면서 헬륨으로 바꾸었다. 무거운 별은 탄소, 산소, 철과 같은 더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었다. 이 원소들은 별이 죽을 때 폭발과 함께 우주로 퍼졌다. 별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퍼져나간 원소들은 먼지가 되었고 먼지는 다시 뭉쳐 행성과 새로운 별을 형성했다. 인간의 몸 역시 그 먼지들로 만들어졌다. 내 몸을 이루는 탄소, 철, 칼슘도 수십억 년 전 어느 별의 죽음에서 나왔다. 결국 인간도 우주의 흔적이자 별의 후예이다.


나는 여러 권의 과학책을 읽으며 이 이야기를 이해했다. 책 속에서 만난 문장 “인간은 별의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문학처럼 들리면서도 과학의 언어였다. 그 문장은 오래도록 내 생각을 붙잡았다. 내 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인간이란 존재가 거대한 요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근사하게 다가왔다. 나는 유난히 요동이 심했던 유년기를 떠올렸다. 장남이라는 무게, 가난의 불편함, 불안정한 집안의 분위기가 나를 자주 흔들었다. 나는 그 요동을 감추지 못했다. 요동치는 나를 받아줄 공간은 많지 않았다. 제도권 교육은 나를 빠르게 문제아로 분류했다. 나는 규칙에서 이탈했고, 질문이 많은 아이는 통제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흔들림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시선 속에서 나는 그렇게 유년기를 졸업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내 요동은 멈추지 않았다. 삼수 끝에 편입으로 겨우 진학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나를 뒤흔들고 있었다. 주변을 보면 모두가 확신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만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듣는 중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순간에도 나는 자주 겉돌고 있었다. 익숙한 자리에서조차 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밝은 얼굴 뒤에서 나는 여전히 흔들렸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은 흐릿했고, 나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 삶을 살아가는 대신 지켜보는 사람이 된 듯했다.


군대에서는 그 감정이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스물여섯의 늦은 나이에 카투사로 입대하며 한국과 미국, 두 문화의 경계에 놓였다. 미군과 함께 근무했지만 그들과 완전히 어울릴 수는 없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매 순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렇다고 숨기지는 않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카투사들과 요동하는 감정을 나누었다. 미군 중에도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요동치는 동료가 있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카투사로서의 군 생활은 내 요동이 타인으로부터 건강하게 받아들여진 첫 경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회생활은 나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요동을 일으켰다. 직장은 끊임없이 효율을 요구했다. 성과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어떤 결과를 내는지가 중요했다. 감정이나 생각은 회의실 밖에 두고 들어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름 대신 직책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했다. 사람은 숫자로 평가되었고 관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성과를 낼수록 인정받았지만, 그 인정은 내 본질과 무관해 보였다. 출근할 때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떨 때는 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하는지 생각하게 됐다. 일에만 매달리면 삶의 방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동을 드러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내 안에 쌓여온 흔들림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는 태도, 원칙을 지키려는 자세, 갈등을 피하지 않되 흡수해 내는 내면의 힘이 요동의 과정에서 생겨났다. 나를 흔들렸지만 동시에 나를 지탱하는 힘이 동시에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무채색의 조직 안에서도 조금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 되어갔다. 완전히 적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나만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 동료들은 나를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결국 요동은 내 안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모두에게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요동은 조금씩 주변으로 전달되었고, 나는 마침내 흔들림의 아름다움을 가진 동료이자 친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긴 과정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요동은 삶의 일부이며, 그 흔들림이 있어야 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안정적인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흔들리며 만들어진다. 우주의 별들이 요동 속에서 탄생했듯이, 나 역시 삶의 수많은 흔들림을 거쳐 만들어졌다. 흔들림은 이제 더 이상 불안이 아니라 내 삶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나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흔들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흔들린다. 누군가는 가정에서, 누군가는 학교에서, 또 누군가는 회사에서 자신을 잃고 흔들리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중요한 것은 흔들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이다. 흔들림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길이 맞는지,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요동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 삶에는 또 다른 요동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요동 앞에서 계속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계속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방식이다. 나는 요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동이 가져다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한다. 그것은 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러니 혹시 당신도 지금 흔들리고 있다면, 그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정해진 자리에 딱 맞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삶은 아니다. 요동은 때로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간이 숨어 있다. 한때 나처럼 요동 속에서 길을 잃었던 누군가가 이 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요동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요동 또한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은 지금, 흔들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잘 가고 있는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유목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