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란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되도록 설계하는 일
BASF, Honeywell, IKEA, Croda 등 글로벌 기업의 인사조직에서 15년 동안 일했다. 평가, 보상, GHR, 조직문화, 노무, 교육까지 두루 거쳤고, 실무자부터 리더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일은 언제나 사람과 구조 사이 어딘가에서 벌어졌다. 효율과 성과를 말하면서도 늘 마음에 남는 건 사람의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철학을 읽게 되었다. 정체성을 의심하고, 중심을 해체하며, 경계를 다시 묻는 서양철학의 사유들은 기업에서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다뤄지는 문제와 닮아 있었다.
성비만 맞추는 포용, 그 말이 불편한 이유
많은 기업이 다양성과 포용(Diversity & Inclusion)을 중요한 가치로 채택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몸담았던 모든 글로벌 기업 역시 D&I를 핵심 가치로 설정하거나, 관련 목표를 중장기 전략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운영의 실제는 종종 성비 조정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여성 관리자의 비율을 높이거나, 특정 수치를 맞추는 일이 곧 D&I의 전부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 방식은 ‘포용’이라는 말이 지닌 깊은 의미를 축소하고, 타자를 하나의 항목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낳는다. 다양성과 포용은 조직 문화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 질문이어야 한다.
대다수 조직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기존의 구조와 문화를 유지한다. 차이는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라, 안전하게 관리해야 할 요소로 간주된다. 포용은 익숙한 틀 안에서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기술로 작동하며, 정작 그 낯섦이 조직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일에는 주저한다. 예를 들어 여성 리더십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의 규범을 따르는 경우가 많고, 다양한 인재를 채용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성향만을 선호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결국 다양성은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을 선별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여성 리더나 여성 엔지니어를 늘리는 일도 마찬가지로, 조직이 이미 설정한 기준에 잘 맞는 사람을 찾는 일에 그치게 된다.
그렇다면 다양성과 포용이란 무엇인가. 조직에 D&I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단순한 제도적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포용이 어떤 관계와 태도를 요구하는지 묻지 않으면, 형식적인 실천은 결국 하나의 의례에 그치게 된다. 조직이 공정과 효율성을 말할 때조차, 그 기준이 정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지를 되묻지 않는다면, 다양성과 포용은 또 다른 배제를 낳는 언어가 될 수 있다. D&I는 단지 수치를 맞추는 일이 아니다.
이 글은 조직에서 논의되는 다양성과 포용을 철학의 언어로 다시 묻기 위한 시도다. 자크 데리다는 ‘해체’라는 개념을 통해,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미뤄진다는 점을 사유한 철학자다. 질 들뢰즈는 정해진 정체성보다 생성과 흐름에 주목하며, 기존의 분류를 넘어서는 ‘차이’를 이야기했다. 이 글은 두 철학자의 개념을 바탕으로, 다양성과 포용을 새롭게 감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데리다의 ‘차연’과 D&I
데리다의 사유는 어떤 것을 ‘정의한다’는 행위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가 중심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심은 언제나 흔들리고, 의미는 고정되지 않으며, 말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늘 다른 말과의 차이 속에서 구성된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차연(différance)’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차연’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 의미는 다른 단어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된다. 예를 들어 ‘여성’이라는 말은 ‘남성’이라는 말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차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대와 맥락, 대화나 담론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둘째, 의미는 항상 지연된다. 하나의 단어를 정의하려면 또 다른 단어가 필요하고, 그 단어 또한 또 다른 단어를 요구한다. 이처럼 의미는 끝없이 미뤄지며,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의미는 차이를 통해 생기지만, 동시에 그 의미는 항상 지연되기 때문에 결코 고정되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말한 ‘차연’이다.
조직에서 '다양성'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흔히 정해진 범주를 당연하게 여긴다. 여성, 장애인, MZ세대, 외국인, 계약직 직원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이런 분류는 자주 쓰이다 보니 익숙하고 자명하게 느껴지지만,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말 자체가 이미 차별적인 힘을 작동시킬 수 있다. 이런 구분은 언제나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중심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정상'으로 여겨지고, 다양성은 그 주변으로 밀려난다. 예를 들어 '여성'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아무 말 없이도 '남성'이 기준이 되며, '장애인'이 언급될 때는 '비장애인'이 설명 없이 배경처럼 전제된다. 결국 다양성은 항상 '보통'이 아닌 사람으로 나뉘는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데리다는 이런 언어의 ‘중심-주변’ 구도를 바꿔 생각한다. 그는 지금까지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고, 중심이 아니었던 것을 오히려 중심에 놓는다. 조직에서 D&I를 실천한다는 것은 단지 다양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떤 언어가 중심이 되어왔고, 어떤 말과 관점이 늘 빠져 있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예를 들어,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말이 조직 안에서 자주 쓰인다면, 그 단어가 실제로는 어떤 방식의 소통이나 행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만 팀워크가 좋다고 평가된다면, 조용히 듣고 정리하는 사람은 팀워크가 부족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단어는 모두를 위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배제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성은 그저 받아들이는 개념이 아니라, 기존의 기준과 언어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다양성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의 ‘해체’처럼 기준 자체를 되묻는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차연이라는 개념은 한 가지를 말해준다. 조직 안에서 쓰이는 많은 가치들이 사실은 완성된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의미는 계속 미뤄지고 움직인다. ‘적합한 인재’, ‘포용적인 리더십’, ‘공정한 평가’ 같은 말들이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정된 뜻을 가진 말이 아니다. 이런 표현들은 반복해서 쓰일수록 점점 당연한 말처럼 여겨진다. 결국 하나의 기준처럼 굳어진다. 그래서 조직은 그런 말을 그냥 사용하는 것이 맞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그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포용’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그룹을 끌어안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말의 틀을 다시 살펴보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안에 담긴 위계와 기준을 새롭게 생각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포용이 시작된다.
들뢰즈의 ‘차이’와 D&I
들뢰즈에게 ‘차이’는 단순히 A와 B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 ‘젊음과 노년’, ‘한국인과 외국인’처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 나누는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그런 분류를 넘어서, 반복 속에서 매번 새롭게 생겨나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즉, 똑같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다르게 발생하는 생명의 흐름이나 새로운 가능성을 말한다. 그는 사람을 어떤 고정된 정체성으로 보지 않았다. 대신, 사람이 계속해서 새로운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 다시 말해 ‘~이 되어가는’ 흐름에 더 주목했다. 이것이 그가 말한 ‘되기(becoming)’다. 예를 들어 ‘여성이 되어가는 남성’, ‘아이로 되돌아가는 어른’처럼, 고정된 범주를 벗어나며 스스로를 바꾸는 힘에 집중한 것이다.
내가 일했던 기업에서는 종종 ‘여성 리더십 강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기존의 남성 중심 리더십 모델을 전제로 삼는다면, 결국 ‘남성처럼 일하는 여성’을 만드는 데 그칠 수 있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기존의 기준 안에 끌어들이는 일이다. 진정한 여성 리더십 프로그램은 방향이 달라야 한다. ‘여성도 남성처럼’이 아니라, ‘여성 리더를 통해 조직이 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들뢰즈에게 ‘되기’는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다. 여성이 여성으로, 장애인이 장애인으로, 외국인이 외국인으로 존재할 수 있으면서도 조직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되기’의 의미다. 조직이 기존의 기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다양한 사람을 포용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조직이 다양성을 ‘되기’의 관점에서 받아들인다면, 조직은 스스로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의식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평가 기준은 동일성을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는가? 인터뷰 질문은 특정한 대답을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회의에서 발언의 형식과 시간은 누구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단지 운영 방식을 개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직이 자신을 어떻게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들뢰즈의 ‘차이’는 조직에서 ‘무엇을 더할까’보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를 묻는 개념이다. 이 말은 단순히 인사 제도를 손보거나 교육 프로그램을 바꾸는 식의 기술적인 해결이 아니다. 조직 전체의 문화를 처음부터 새롭게 상상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면서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일,
정해진 규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조정할 수 있는 열린 인식을 갖추는 일이 그에 해당한다. 이러한 실천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사유를 조직 안에서 구현하는 방식이다.
들뢰즈가 말한 ‘차이’는 정해진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차이는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며, 기존의 질서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 방식이다. 조직에서 포용은 단순히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그 만남을 통해 조직이 스스로 달라지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차이’가 조직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D&I, 조직을 다시 쓰는 질문
지금까지 나는 조직에서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되고 있는 D&I 개념을 데리다의 ‘차연’과 들뢰즈의 ‘차이’를 통해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지만, 본질이나 중심을 해체하고, 고정된 의미나 범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려는 공통된 태도를 보여준다.
결국 조직은 D&I를 통해 조직은 무엇을 바라는가? 단지 다양한 사람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일인가, 아니면 그 만남을 통해 조직이 달라지는 것을 감수하려는가? D&I가 형식적으로 반영된 지금까지처럼 단순히 수치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면, 이제는 그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데리다의 ‘차연’과 들뢰즈의 ‘차이’라는 개념을 사유해 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이는 제도보다 먼저 필요한 태도이며, 사고의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조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새롭게 그려야 한다. 다양성과 포용은 그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조직은 사람을 채용하고, 육성하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동일한 규범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을 반복해서 만들어내게 된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조직이 스스로를 되묻는 질문을 남긴다. 누가 중심이었는가? 우리는 어떻게 말해왔는가? 어떤 다름을 허용해 왔는가?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다르게 구성할 것인가?
D&I는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작업이 아니라, 그 만남을 통해 조직이 다시 쓰이도록 허용하는 일이다. 더 다양한 사람을 조직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조직이 ‘다르게 되도록’ 설계하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유해야 할 진정한 다양성과 포용의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