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6일 금요일
피가 섞이지 않은 친척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주에 벌어진 일이다. 사건 수습을 위해 지방에 있는 경찰서와 장례식장을 오갔다. 핏줄로 이어진 다른 친척들보다 애정이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더 무겁게 다가왔다. 자신을 무연고자라고 남긴 유서와 사고 전 스마트폰에 남아 있던 검색 기록을 따라가며, 죽음을 선택한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평소의 다정한 얼굴과 대비되는 그 흔적들 앞에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선택에 나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는 사실상 무연고자였다. 내 친척과 사실혼 관계였으나 법적으로는 어떤 관계도 인정받지 못했다. 자신의 가족과도 오래전 절연한 상태였다. 비슷한 사연의 나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흘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으로 내가 남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의 십 년 남짓한 인연을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마무리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에게 가족이 되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이 가족이었다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배웅한 마지막 사람 역시 가족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그의 가족으로 역할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의 죽음 이전부터 나는 가족의 의미를 자주 되묻고 있었다. 가정을 내팽개친 채 자신의 욕망을 우선했던 아버지, 이해관계에 따라 타인의 안위를 가볍게 여기는 사촌들을 보며, 나는 핏줄로 이어진 가족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다. 태어나는 순간 주어지는 질서와 구조를 나는 일찍이 거부했다. 부계 중심의 권위주의가 초래한 가정의 파탄, 헌신을 넘어 희생을 당연시하는 가정 내 여성들의 모습은 그 거부의 배경이 됐다. 참고 버티는 것을 미덕으로 강요하는 질서는 내 눈에 깨야 할 구시대의 잔재로 보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내게 가족이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미국 시트콤 「모던 패밀리」는 재혼, 동성 부부, 입양, 다문화, 비혼 동거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전통적 가족이 아닌 현대적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 가족들은 자주 다투지만, 그 다툼은 위계가 아니라 협상의 형태를 띤다. “왜 그래야 하죠?”라는 질문이 허용된다. 떠날 자유가 전제되기에, 함께 남아 있는 선택의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여기서 가족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계속 수정되는 관계다. 차이를 인정하고, 합의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그래도 관계를 이어가는 이유는 의무가 아니라 동의다.
이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인 작품이 있다. 오래전 방영된 한국 시트콤 「LA 아리랑」이다. 한국식 가족 질서를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는 세대와 문화의 충돌을 반복하지만, 결론은 대체로 같다. 과거의 가족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구조였다. 혈연이 중심이고, 아버지는 권위의 중심, 어머니는 헌신의 중심에 놓인다. 갈등은 존재하지만 깨기보다는 참고 버티는 방식으로 봉합된다. 개인의 욕망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미뤄진다. 여러 면에서 모던 패밀리와는 대조적인 구도다.
나는 더 이상 LA 아리랑식의 전통적 가족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인을 품는 대신 개인에게 요구해 온 과거의 가족은,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관계를 묻는 현재의 가족을 따라잡기 어렵다. 가족의 무게가 숙명이 아니라 선택의 책임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무책임하고 다른 구성원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을 가족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 역시, 내가 선택한 판단이자 결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 세상을 떠난 그는 나에게 핏줄보다 더 가족이었다. 그가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상관이 없었다. 나에게 그는 늘 친절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내가 찾아간다고 하면 가장 자신 있어하던 코다리찜이나 멸치회무침을 상에 올려놓고 술 한 잔을 나누던 장면은 다른 어떤 친척과의 어떤 기억보다 따뜻하게 남아 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음에도 늘 나를 챙기려 했던 그의 태도는, 금전적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연락하거나 부모의 재산을 독점하고도 고마움 한마디 없는 혈연보다 훨씬 더 가족다웠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수 있었던 일을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보다 가족처럼 느껴졌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더 좋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