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티를 위한 십계명

by 세템브리니

한 친구 어머니와 가끔 카톡을 주고받는다. 그분도 우리 엄마만큼이나 삶의 굴곡을 많이 건너오셔서 지나온 인생을 가끔 들려주시곤 한다. 그 친구는 학창 시절 특기생이었던 야구를 그만둔 뒤 생계를 위해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어제는 그런 아들과 다음 주에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화가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문자를 보내주셨다.

“내가 살아보니 인생 40대, 50대가 가장 황금기더라. 인생의 허리인 이 시기에 탄탄하고 중심 잡으며 멋진 인생 펼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요즘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이 꼭 저 말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운 말이었다. 오래 붙들어두고 싶어졌다.


나는 2022년에 마흔이 됐다. 그때는 마흔이라는 숫자가 꽤 생경했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이질감이 있었다. 이제는 그 낯섦도 많이 옅어졌다. 어느새 사십 대 중반에 가까워졌고, 나이보다 먼저 마음이 이 시기를 받아들였다. 요즘 스스로를 젊다고 여기는 사십 대를 두고 ‘영포티’라고 부른다는데, 나도 그 말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듯하다. 오래 이어온 달리기와 독서 덕분인지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고 느낀다. 물론 예전처럼 무모하게 젊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는 젊음이 서두름이나 불안과 같은 뜻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사십을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삶이 조금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이든 더 빨리 이루어야 할 것 같던 조급함은 줄어들었고,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도 예전 같지 않다. 한때는 앞서가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더 젊었고, 누군가는 더 빨랐고, 누군가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늘 조금 늦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늦었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꼭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 같았던 시간들이 오히려 나를 덜 흔들리게 만들었다.


실제로도 중년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내리막의 시작만은 아닌 듯하다. 사람의 정신은 이 시기에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도 한다. 젊을 때의 머리가 날카로운 칼에 가깝다면, 지금의 머리는 여러 번 손에 쥐어본 연장에 가깝다.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다. 예전보다 말을 고르는 속도는 느려졌을지 몰라도 한 문장에 담기는 무게는 오히려 커졌다. 판단은 덜 성급해졌고 생각은 한쪽으로 쉽게 쏠리지 않는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일들이 많았고, 한 번 흔들린 마음은 오래 출렁였다. 지금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린 뒤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짧아졌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다. 이십 대와 삼십 대의 나는 늘 어딘가에 도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남들보다 늦지 않아야 했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이어야 했다. 비교는 습관처럼 따라붙었고 불안은 그 습관의 그림자였다. 그런데 사십 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비교보다 방향이 중요해졌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됐다. 타인의 속도보다 내 삶의 결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남들보다 잘 사는 삶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천천히 생각하게 됐다.


이 시기가 좋은 이유는 어쩌면 가능성과 현실이 가장 나란히 서는 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가능성이 많았지만 손에 쥔 것이 적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무한한 가능성을 말할 수는 없지만, 대신 몸에 밴 경험이 있고 오래 다져온 관계가 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연히 꿈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해볼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긴다. 오래 일하며 쌓은 시간은 어느새 직관이 되고,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는 의지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생각만 하던 것을 이제는 조금씩 실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분명 젊은 날과 다른 빛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제 젊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작년에 회사를 다닐 때 부서에 스무 살을 갓 지난 직원이 있었다. 그의 젊음은 눈부셨고 생기와 가능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럽지는 않았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를 떠올리면 젊음은 찬란함보다 불안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앞날은 열려 있었지만 그래서 더 막막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과 닮아 있었다. 젊음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잔인했다. 아직 오지 않은 상실을 미리 두려워하게 했고, 언젠가 사라질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게 만들었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빛나고 그래서 더 덧없다. 나는 한때 그 덧없음이 너무 두려워서 사라질 것들에 더 마음을 쏟기도 했다.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기도 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언젠가 사라질 것에만 매달리기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것들에 더 마음을 주고 싶었다. 쉽게 닳지 않는 가치들. 시간이 지나도 내 안에 남아 나를 지탱해 주는 것들. 지금의 나는 그런 것들을 더 믿게 됐다.


요즘 나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자신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묘하다. 하찮고 평범한 기억들이 어느 날은 특별해 보이고,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장면이 뜻밖의 의미를 얻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꽤 특별한 삶을 살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안쪽에서 살아가고, 자기 고통과 자기 기쁨의 크기를 가장 절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을 오래 바라볼수록 자신에게 취할 위험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최근 정여울 작가의 산문을 읽다가 오래 마음에 남을 문장을 만났다. 1993년에 출간된 악셀 산데모세의 소설 『도망자, 자신의 자취를 가로지르다』에 나오는 십계명이라고 했다. 북유럽 사람들의 집단적 심성을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읽으며 다른 생각을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더 쉽게 스스로에게 속을 수 있겠구나. 젊을 때는 부족함 때문에 흔들리지만, 나이가 들면 익숙함과 성취 때문에 흐려질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그 흐려짐은 때로 실패보다 더 위험하겠구나.


그래서 이 문장을 주문처럼 붙들고 싶어졌다. 내가 나를 과장하지 않기 위해. 내 삶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되 그것에 도취되지는 않기 위해. 사십 대와 오십 대가 황금기일 수 있다면, 그 황금은 번쩍이는 자만이 아니라 단단한 절제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서다. 친구 어머니의 문자를 떠올리며 나는 이 시기를 빛나는 계절이라기보다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계절이라고 부르고 싶다. 많이 겪었기에 쉽게 들뜨지 않고, 많이 흔들려봤기에 함부로 무너지지 않는 시간. 젊음이 한순간의 광채라면 지금의 시간은 오래 닳지 않는 금속의 결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다. 더 높이 오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 덜 흔들리기 때문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남은 날들 동안 내가 자주 되새기고 싶은 말도 결국 그와 다르지 않다. 특별해지려 애쓰기보다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앞서 보이려 애쓰기보다 삶을 오래 견디는 것. 어쩌면 황금기란 빛나는 시기가 아니라 자신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삶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이 문장을 오래 곁에 두고 싶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확신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든 당신한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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