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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l 10. 2020

애도할 수 없는 어떤 죽음에 관하여

나는 그의 명복을 빌고 싶지 않다.



 간밤에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누군가의 실종이 보도되고, 각종 확인되지 않은 찌라시가 유포되고, 수색이 지속되고, 끝내 포털 사이트의 인물 검색 정보에 사망일이 기재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나는 착잡한 기분에 잠겼다.



  그의 최후를 보며 느낄 수 있었던 여러 복합적인 감정 중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바로 당혹감이었다. 서울시민도 아니었던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과거에 이뤄왔던 일들과 아직까지 그를 존경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꽤 오랜 시간 서울 시장으로 시민의 신뢰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인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불명예스러운 자살로 생을 거칠게 마감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실종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집어놓고는, 조용히 배낭 하나를 매고 사라져 죽어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그 혼란한 와중에서도 어쨌든 사실로 확인된 것은 그의 수행원이었던 비서가 2017년부터 지속되어 왔다는 그의 성추행 행각에 대해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과거 이 브런치에 스스로의 성추행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며 ‘미투’ 운동에 동참한 적이 있다. 나 또한 한 명의 피해자이자 생존자로서, 이 일에 왠지 모를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미투’ 의혹이 연루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와 관련해 어떤 것도 소명할 기회조차, 시조차 없이 그렇게 다급하게 삶을 저버렸다는 것. 용기내어 신고를 접수하자마자 가해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버린 피해자의 심경은 어떨까?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글귀가 떠올랐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한없이 막막하고, 답답한 죽음이었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스스로 목격한 참혹한 죽음에 대해 연민과 애도를 보내야 한다는 마음 한 편으로는 아직 무엇 하나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 죽음을 애도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죄가 있든, 없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방식은 너무도 비겁하지 않은가.



 그가 정말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의 자살은 정세랑 작가가 표현한 대로 피해자에게 그 무엇보다 잔인하고 정신적으로 타격을 주는 2차 가해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비겁하고도 초라한 죽음 이냔 말이다.


 만약 그가 결백하다면, 그가 짊어지고 있던 수많은 책임과 기대로부터 도망침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주변인들과 지지자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는 주변인으로 하여금 그를 도울 기회도 주지 않았고, 결백을 증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의문 속에 남겨둔 채 죽은 그로 인해 현재 정작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경찰서에 피해 사실을 신고한 피해자 뿐이다. ‘자살’이라는 행위부터,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민폐를 끼쳐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SNS를 통해 나의 지인들과 각종 유명인들이 그의 죽음을 각자 얼마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었고, 누군가는 원망을 늘어놓았고, 누군가는 조문을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누군가는 피해자의 신상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기 시작했으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들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이유는 오직 그의 성급한 죽음 때문이다. 장본인인 그가 아무것도 밝히지도, 책임지지 않고 도망치듯 죽었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들은 본인의 입장대로 각자의 추측을 기반으로 타인의 의견을 비난한다. 이 상황 속에서, 그의 죽음을 인지한 이후로 계속 고민해 보았지만, 나는 도저히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빌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나는 그의 명복을 빌고 싶지 않다.



 그의 죽음은 정말 애도할 만한 죽음인가. 그의 죽음은 정말 가슴 아파야 할 죽음일까? 죽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명복을 빌어줘야 하는 것일까? 무책임한 망자를 위한 명복보다는 그 시간에 그냥 살아있는 사람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나는 누군가가 죽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그가 살아 있을 때 저질렀던 모든 잘못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 없어진 듯이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그의 성추행 혐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나는 이런 방식의 요란한 자살에는 마음으로부터 애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저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되었겠구나’ 하고 짐작하고, 남겨진 자들의 혼란이 어서 수습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그리고 나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듯 죽어버린 사람보다는, 피해자를 포함하여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사람들의 삶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낀다.  비겁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일 또한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고.



 동정심과 연민은 누군가의 입장과 감정에 공감하고, 이입하기 위한 노력을 거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노력을 위해 기울이는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는 무척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감정과 연민을 함부로 바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이를 위해서까지 아파하지는 않았으면.




+


‘공소권 없음’이라는 말은 얼마나 허무한가. 성범죄의 가해자들이 죽었을 때 남아 있는 피해자가 억울하게 몰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일부 채널들을 통해 논의되고 있는 ‘성폭력 가해 의혹 혐의자 사망 시에도 수사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실제로 발의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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