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 없는 아이였다. 8살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후로, 고모 댁에 얹혀살았지만 그 집도 무척이나 이사를 자주 다녔던 집이었던 탓이다.
잦은 이사로 초등학교만 4군데를 다녔다. 초등학교 과정이 6년이라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거의 1,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면서 계속 전학을 다녔던 셈이다.
그렇게 한 번씩 이사를 갈 때마다 집은 점점 열악해졌다. 동네도 그렇고, 주거 환경도 그랬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아마도 집 보증금을 줄여서 어딘가에 쓰거나 투자를 했었어야 했나 보다’라고 막연히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어찌 됐든 나에겐 친엄마, 친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가정’으로서의 집도,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는 물리적인 개념의 ‘집’도 없었던 셈이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으로 갖게 된 ‘내 공간’이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3만 원. 기껏해야 10평밖에 안되고, 통풍도 잘 되지 않는, 으슥한 골목에는 성범죄자 수배 전단지가 붙어 있는 그런 무서운 집이었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 조건에 그 이상의 공간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적어도 저 가격에, 그 집에서는 화장실과 세탁기는 따로 쓸 수 있었으니까.
그 후로도, 이사는 계속되었다. 오피스텔에 있다가, 집안 사정으로 급히 돈이 필요해 보증금을 빼 주기 위해 방을 빼서 남은 돈으로 또 급하게 집을 구하고.. 중간에 해외에 다녀오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20살이 넘어 서울에 올라온 다음에도 나는 1년에 한 번씩 줄곧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하도 이동을 하면서 살다 보니 나중엔 별로 그게 불안정한 것이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이렇게 자꾸 떠도는 게 바로 ‘역마살’이라는 걸까? 과연 앞으로 내 인생에 '안정'이라는 것이 찾아오기는 할까?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렇게 이사를 하지 않고 ‘내 집’을 갖고 산다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나마 20대 중반쯤 되어서 좀 나아진 것이라고는, 취업을 하면서 월세집을 벗어나 처음으로 전셋집을 얻게 된 것이었달까.
그렇지만 본격 전세 라이프를 시작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안정적인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전셋집도 결국 '내 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세 계약이 2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비교적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첫 1년뿐이었다. 이후에는 계속해서 전세 기간 만료 때까지 집주인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그 시나리오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집주인이 전셋값을 올려달라고 할 것인가?
올려달라고 한다면 얼마나 올려달라고 할 것인가?
'네고'의 여지는 있을까?
최악의 경우는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고 나올 경우였다. 이 경우, 매수자에게 계속해서 집을 보여줘야 할 뿐 아니라 매수자가 이 집을 투자 목적으로 전세를 끼고 매매하는 것인지, 혹은 실거주 목적으로 직접 거주하려 들어오고자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나의 대응 시나리오 알고리즘도 다시 짜야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세로 살았던 8년의 시간 동안에도 나는 4,5번의 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기간 동안 전세 세입자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어느 정도는 겪어봤다. (전셋값 올려주기, 집 팔려서 이사하기 등)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전셋집을 구하면서도, 구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지쳐가는 스스로를 느꼈다. 월세에서 전세로 전환할 때는 어느 정도 '내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집이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나이브한 생각이었는지를 경험을 통해 몸소 체득하게 된 것이다.
2년 전, 마지막으로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잔금을 치른 내 집이 되었다-을 계약할 때는 심지어 별로 설레지조차 않았다. 이전에 살던 집이 실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신혼부부에게 팔려서 쫓겨나듯 이사를 나오는 상황이었다. 전세 또한 월세만 안 내는 것일 뿐, 결과적으로는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사에 대해서도, 새로 들어가는 전셋집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2년 전에 살던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었기에 당시 집주인이 매도를 고려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새로 집을 구해서 이사가지 말고, 그 집을 빚을 내서 매입할까도 고민을 해봤다. 따박따박 돈 나오고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이 있으니,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자란 입장에서 25년 내지 35년 동안 갚아야 할 정도의 큰 규모의 빚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결정적으로 당시 살던 전셋집의 매입을 포기한 이유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바로 '앞으로 2년 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어설픈 기대 때문이었다.
연예인 김숙 씨는 20대 때부터 전셋집에 살며 그토록 많은 이사를 했는데, 굳이 전셋집을 1년씩만 계약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언제 결혼하게 될지 몰라서'였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24년 간의 자취 생활 중 이사를 20번 넘게 다녔다고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집이 있으면 나중에 누군가와 결혼할 때 골치 아프지 않을까? 전셋집이면 그냥 전세금만 빼서 신혼집에 보태면 되는데, 내가 집이 있으면 집을 마련할 때 불편할 테니까.'
'내가 빚이 있으면 나중에 만나게 될 미래의 배우자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어느 정도의 경제 수준을 가진 남자를 만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이런 이유로,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두고두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경제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을 뒤로 미뤄왔다.
그동안 나의 삶은 일종의 '모라토리엄'이었다.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겠는(태어나긴 했니...?) 나의 다른 '반쪽'을 찾아 헤매며, 그 사람과 만나 맺어져야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일종의 '집행 유예'의 상태였던 것이다. 내 삶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완성되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나 혼자서 삶을 완성할 수 있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각도 그랬다. '언제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집은 사서 뭐해?'라는.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생각했던 게 너무 어처구니없고 답답하지만, 당시의 나는 진짜 저렇게 믿었다. 그래서 나는 집이 마음에 들지만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서도 항상 전세를 선택했다. 남자 친구가 있을 땐 이 남자 친구랑 언젠가 결혼할 거니까 다시 전세로 들어갔고, 남자 친구가 없을 땐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또 전세로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최종 전세 선택 이후로 2년이 지났고,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집-회사-운동-집-회사-운동-집의 단조로운 생활 패턴을 반복하는 30대의 여성인 내게 무슨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여지나 있느냔 말이다. 심지어 내겐 중매쟁이나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선자리를 물어 오는 어머니조차 없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겐 앞으로 다른 반쪽이 나타나 기적적으로 인생이 바뀔 일은 희박할 것이라고. 그리고 결심했다. 누군가와 함께 그려나가야 할 미래의 그림을 위해 내가 총 사용할 수 있는 캔버스의 절반을 비워두지 말자고. 누가 그림을 그릴지 안 그릴지 알 수도 없는 캔버스의 다른 반쪽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돌이킬 수 없는 붓터치는 못하고, 언제든 지우개로 지울 수 있도록 4B 연필로 라인만 끄적거리는 것은 그만두자고.
곽정은 칼럼니스트의 <혼자의 발견>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종종 여자의 불행한 결혼은, 전에 타던 차보다는 제법 좋은 차를 타게 되었지만 그 차의 조수석에서 남자의 불안한 운전을 지켜보는 일에 비유할 만한다. 모든 면에서 안락해지기를기대했고, 모든 불안정함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염원했지만 오히려 더 큰 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일.
'너의 큰 울타리가 되어줄게'라는 로맨틱한 말에 미혹되어 나의 작은 차의 운전대를 놓고 다른 차의 조수석에 성급히 올라탔던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가끔은 내비게이션조차 잘못 이해해 목적지로부터 멀어지는 길에 들어서고, 가끔은 주차를 못해 이 칸 저 칸에 차의 머리를 들이밀다 시간을 낭비할지라도, 누가 뭐라든 내 스스로의 울타리를 먼저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곽정은, <혼자의 발견> 중에서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쥔다는 것.
내가 나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직접 쥐기로 결심했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생애 최초로 내 집 마련을 하게 되었다.
거창하게 써놨지만 사실 나는 이번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그에 따른 여파에 등 떠밀려 '총 맞은 것처럼' 허겁지겁 집을 산 케이스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 정부 여당 측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해 마지않는 '패닉 바잉'을 한 30대 싱글 여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6월 17일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로 일주일에 천만 원씩 쭉쭉 오르는 호갱노노의 매매 호가창을 보며, 매일같이 신문을 어지럽히는 '전세 대란' 뉴스들 속에서, 관련 정책이 23번 동안 계속해서 바뀌는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서. 나는 하필이면 올 가을로 돌아오고 있던 나의 전세 만기일과 나의 집주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주택자'인 나의 집주인 부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전셋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시작한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8년 간 전세 생활을 하는 동안, '아 이젠 이 집에서 쫓겨나면 전셋집을 못 구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근본적인 생존의 위기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에서 집을 구하고 있는 지인들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집값이 한 달새 엄청 올라서 예전에 써둔 계약서의 배액 배상을 당하고 계약 파기당했다, 계약서 다시 쓰고 집값을 더 올려달라더라, 심지어 서울 지역의 어느 전셋집에 들어가기 위해 그동안 전셋집들을 정성껏 인테리어했던 자료들을 모아 PPT를 만들어 제출했다는 지인의 전세듀스101 급 실화를 들으니 이건 도저히 들으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피부로 와 닿는 두려움은 처음이었다. 이게 '패닉'이라면, 그래, 패닉이 맞다. 그들이 부동산 시장에 초래한 이 거대한 불안과 혼란을 '패닉'이라는 말 말고는 또 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현재의 집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었고, 이 불안한 코로나 시국에 어디로 이사를 가고 싶지 않았다. 자비로우신 나의 집주인 느님들이 제발 나의 전세 기한을 연장해 준다면 좋았겠지만... 전세 세입자가 요구 시 거주 기간 2년을 추가로 보장해주는 임대차 3 법을 보자 내가 집주인이라도 그 부담을 떠안고 전셋집을 계속 유지할 것 같진 않았다. 월세로 전환하거나 집을 팔아버릴 것 같더라.
혹시나 월세, 반전세로 전환한다면 어떻게 할지보다는 집주인이 매도를 한다는 시나리오에 집중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나의 직장과도 가깝고, 비록 서울 접근성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평소에 서울에 거의 나가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 당장은 직장을 옮길 생각도 없고, 이 동네에서 벌써 5년째 살고 있는데 실거주로 편안하게 만족하고 살고 있다. 나는 무주택자이니, 전세를 한 번 더 가느니 지금 시점에 집을 매입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도 30대 중반이 아닌가.
그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기다리며 현재의 삶을 유예하지 말자.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직접 잡아보는 거야.
나는 그런 마음으로 집을 매입하기로 결심했다. 예상대로 집주인에게서는 '집을 매도하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고, 나는 집주인과 부동산에 말해 내가 직접 그 집을 사겠다고 매수 의사를 전달했다. 전세로 살던 사람이 사는 것이라 그런지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매수 가격 협상이 이루어졌고, 집 보러 다니기나 이사 비용 등이 절약되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집값의 50%를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일단 나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그 정도는 지불할 수 있다고 마음을 굳혔다. 막상 빚을 내고자 결심하니, 그토록 빚을 두려워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정년퇴임 전인 25년 만기로 할지, 월 납입 부담이 적은 35년 만기로 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해서 대출 상담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제가 빚 갚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럼 집이 은행에 경매로 넘어가는 거죠, 뭐."
아, 어차피 내가 죽은 후구나. 그럼 뭐 오케이!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결혼도, 자식도 내려놓으니 이렇게 대범해졌다. 어차피 내 인생에 어떤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이렇게 혼자 살 텐데, 이렇게 살다 죽으면 은행이 다시 집 가져가는 거지 뭐. 그런 생각으로 "오케이!" 를 외치며 대출 서류에 사인을 했다.
배액 배상으로도 무를 수 없는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고 온 날, 새님들에게 "너희도 이제 이사 안 가도 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최대한 깨끗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난 8년간 집에서 새를 자유롭게 풀어 키우는 나는 어차피 세입자 블랙리스트 넘버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집구석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서울역>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2016년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영화 <부산행>의 프리퀄인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역 부근에서 창궐하기 시작하여 서울 전역으로 퍼져가는 좀비들을 다룬 호러 애니메이션이다. 이 애니메이션 중간에는 서울역의 노숙자가 이렇게 말하며 목놓아 우는 장면이 있다.
"나도 돌아갈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
근데.. 나는 집이 없어어어어!!! "
사실은 이 넓은 서울 하늘 아래 편히 누워 쉴 '내 집' 하나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이 이 작품의 진짜 주제라 하더라...
노숙자가 들끓는 지하도에서 시작해서 80평대 모델하우스에서 끝나는 미장센은 좀비가 창궐하는 세상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돌아갈 집을 찾아 헤매듯이, 코로나 시국에서 '내 집 마련'을 부르짖는 무주택자들의 서러움을 강렬한 염세주의로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좀비 아포칼립스물인 것처럼 보였던 이 애니메이션이 담고 있던 주제는 결국 이 시국 무주택자의 설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다른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슬펐다.
뭔가 급하게 몰리듯이, 쫓기듯이, 총 맞듯이 산 거긴 한데, 그래도 어쨌든 내겐 유사시에 파고들 수 있는 거북이 등딱지 같은 집이 생겼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때 맘 편히 콕 틀어박힐 집 한 채라도 없었다면 얼마나 서러웠을까. 때마침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회사에서도 한시적 재택근무를 시작했는데, 이게 이제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니 집 안에 틀어박혀도 마음이 한결 편안하긴 하다.
최근의 2030 ‘패닉바잉' 현상에 대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말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또 말했다.
‘영끌’은 맞지만 투기한 것은 아닌 나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불과 한 달 반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영끌’해서 집을 사는 30대의 반열에 스스로 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내가 집을 산 것은 전적으로 임대차 3법 ‘때문’이지, ‘덕분’이 아니다. 30대의 싱글 여성으로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존의 위기를 느껴서 산 것이지, 투기를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집값의 절반이나 되는 돈을.. 월급의 30%가 넘는 비용을... 35년 만기로 매달 갚아 나갈 생각으로 대출을 지를 수 있겠냔 말이다... (투기할 돈도 없다 진짜...)
그래도 집을 사자마자 일주일 만에 집값 시세가 5천만 원이 올랐다는 얘기를 하자 친구는 "야, 잘됐다! 축하해"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이게 축하받을 일인지 조금 긴가민가하다. 특히 이 동네 시세는 내가 전세로 살던 5년 간 꿈쩍도 않았었는데, 그런 돌부처 같은 시세가 일주일에 천만 원씩 오르는 기현상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인 것 같아서. 내 집값이 오르는 게 기쁜 마음보다도 이런 비정상적인 흐름에 불안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얼떨결에 집은 생겼고, 계약서를 썼던 그 날 이후로도 내 집값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부에 전적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품을 수도 없는,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이 글을 썼다.
이 자리를 빌려 두 분 장관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그래요, 제가 ‘영끌’해서 집산 30대입니다.
돈 없어서 실거주 한 채도 겨우 은행 빚 영끌 해서 샀는데 투기세력이라니요.
그리고 저 집 사는 데 보태주실 것이 아니면
굳이 저를 안타까워해주진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