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소사이어티> 바비의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코로나 블루의 시대다. 때론 정말로 세상이 멈춘 것 같다. 사람들은 각자 집에 갇혔고, 일이 끝나면 착실히 집으로 돌아간다. 바깥에서는 취미 생활 하나 마음 편하게 할 수 없다. 누군가와 밥 한 끼, 커피 한 잔 같이 하자는 것이 부담스럽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요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서로 멀리서 안부를 전할 수밖에 없는 지금 사람들은 각자의 우울감을 속으로 끌어 안고 이 시기를 어렵게 견뎌내고 있다.
그동안 당연하게 인간으로서 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코로나19 여파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2020년은 다 같이 ‘없었던 해’로 쳤으면 좋겠다”며, ‘올해는 다 같이 나이 한 살 안 먹은 걸로 치자’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 - 엔드 게임> 사이의 5년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구와 인류를 구원할 히어로들이 다시 뭉칠 때까지 사람들은 5년의 시간을 소멸된 채 보내야 했다. 그리고 5년 뒤 돌아온 그들은 '블립드(Blipped)'라고 불렸다. ‘반반 삭제’ 당했던 사람들은 5년 간의 시간 동안 나이를 먹지 않았지만, 남겨졌던 사람들은 5년의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 그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 또한 반으로 나뉜 것 같다. 코로나19를 ‘금방 종식될 이상 상태’로 규정하고, 2020년을 인생에서 ‘없던 것’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로 견뎌서 흘려보내고 싶은 사람들과, 코로나19가 금방 종식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대비하고, 성장하려는 사람들. 전자는 ‘블립’됐던 사람들에 가까울 것이고, 후자는 남겨져서 나이를 먹어야 했던 사람들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사실 둘 사이에서 오래도록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근처에서 검사를 받거나 자가격리를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무서운 질병에 대해 도통 현실감을 가질 수 없더란 말이다. 그러다 지난주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라는 기사에서, 코로나는 당분간 종식되지 않을 것이니 ‘코로나가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이재갑 교수의 인터뷰를 읽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0588377
"환자가 병에 반응하는 단계가 있어요. 처음엔 화를 내죠. 그다음엔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요. 그다음 급속도로 우울해지고 마침내 인정하고 수용하게 돼요. 전 국민이 그 단계를 겪고 있어요. 저도 달라진 삶에 적응하려고 해요.
역설적이지만, 체념하면 답이 나와요. 한 달 간다면 이대로 버티잖아요. 2~3년 간다는 걸 알면, 그제야 인정하고 무언가를 하죠.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버티지 말고 바꾸라고 해요. 밀레니엄은 2000년이 아니라, 2020년에 시작됐다고요."
코로나는 종식되지 않는다, 체념해라.
가뜩이나 심약하고 예민해진 마음에 ‘팩트 폭격’ 몽둥이로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직설 화법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한 번 보자”는 어중간한 지인들과의 약속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조언이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급격하게 바뀐 삶의 패턴으로 인해, 주변인과의 단절로 인해. 극도의 우울함과 불안함을 이겨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건 어쩌면 일종의 시험일 지도 모르겠다. 빙하기처럼 대격변 시대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미처 적응하지 못한 나는 하염없이 허둥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더 이상 ‘코로나가 어서 잠잠해져야 할 텐데’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저 말은 이제 곧 ‘나도 유튜브나 할까’라는 직장인 허언과 거의 유사한 등급의 위상을 확보하게 될지도 모른다.)
허둥대고, 흔들리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내 20대 시절은 훌쩍 건너뛰었고, 내 삶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보여지는데 나는 왜 아직도 흔들리고, 괴로운 것일까?
아침에 눈떠서 일어나 출근하고,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혼자 도시락을 먹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혼자 멍하니 틀어박혀 있자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도통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냥 눈이 떠지는 대로 눈을 뜨고, 감아지는 대로 감는 삶이라면 나는 대체 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에겐 꿈도 없고, 희망도 없다. 더 살아봤자 조금 늦게 시체가 되거나, 조금 더 빨리 시체가 될 뿐이다. 그러면 내가 오늘 하루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갈 텐데... 어차피 결국 쪼그라들어 소멸할 삶이라면.
매일 뉴스에 뜨는 전국의 확진자 수를 보며, 전 세계 사망자들의 수치를 보며. 나는 2014년 4월의 한없이 무력하고 우울했던 나를 떠올린다. 그 배에 타 있던 아이들과 나 사이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어서. 마찬가지로 최근의 나는 내가 그저, 아직 운이 좋아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은 것이고, 그렇기에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그저 운이라고. 이렇게 계속 생각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 알지만, 아무래도 자꾸만 우울한 생각의 연쇄 과정에서 도통 빠져나올 수가 없다. 때로는 내 생각에 내가 질식할 정도로.
이런 코로나 블루는 나만의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요즘 들어 자주 대화하는 친구와 부쩍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내가 대체 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난 나만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 친구도 모르겠단다. 사실 나도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왜냐면 나도 잘 모르겠거든.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위로하려고 할 땐 머리가 하얘져서 생각나지도 않던 위로의 말이 친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나오더라.
“어차피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인류는 2021년까지 싹 다 멸망하거나, 한 10억 명 정도만 살아남을 것 같은데. 굳이 우리가 죽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어떻게든 죽을 것 같아. 꼭 지금 우리 손으로 이 생을 끝내야 될까?
그냥 잠자코 순서를 기다려보자. 산불로 죽든 코로나로 죽든 원전이 터지든 어차피 2021년까지 지구는 어차피 우리를 죽이려고 할 거야. 우리가 혹시 운이 좋아서 2021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다면, 글쎄, 뭐 그때부터의 삶은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살면 되지 않을까?"
그것은 친구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또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문득 언젠가 봤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가 떠올랐다.
브룽크스 지역의 한 가난한 가정의 막내였던 바비는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부푼 꿈을 안고 무작정 할리우드로 온다. 그의 유일한 연고는 이미 그곳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은 외삼촌이다.
그러나 바비와, 그를 부탁한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외삼촌은 오랜만에 보는 조카를 기대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는다. 삼촌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던 바비는 오랜 기다림 끝에 어렵게 삼촌을 만나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어필해 보지만, 제대로 된 일인지 알 수도 없는 잡무만 겨우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할리우드로 넘어왔건만, 삼촌으로부터는 냉대를 받고 어쩐지 큰 맘먹고 일탈을 해보려 해도 평소에 안 해보던 짓이라 그런지 무엇 하나 잘 풀리지 않는다. 바비는 어쩐지 조금 의기소침해진 상황에서, 고향에 있는 누나에게 애써 잘 지내는 척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짠함이 묻어나는 안부 편지를 쓴다. 그의 편지를 읽고 난 뒤, 누나 에블린은 이런 답장을 써준다.
Dear Bobby, It's raining here today.
바비에게, 이 곳은 오늘 비가 오고 있어.
Very pretty, but a little melancholy.
예쁘지만 조금 우울하기도 해.
Leonard says, its the poignancy of life,
레너드는 그게 바로 인생의 비통함이라고,
and not only do we have to embrace its meaninglessness,
우리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and celebrate life because it has no meaning.
그 의미 없음을 자축해야 한대.
Its too deep for me, but mom always boils it down to:
내겐 너무 어려운 말이긴 하지만, 어머니도 늘 그런 말씀을 하시잖아.
‘매일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언젠가 하루는 네가 맞는 날이 오니까.’
매일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눈 뜨지 않게 되는 진정한 인생의 마지막 하루가 온다는 것이다. 뭔가 엄청나게 염세주의적이지만 어쩐지 그래서 더 희망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사실 2021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죽지 않고 무사히 눈을 떴으니까’ 또 하루를 사는 거다. 매일 밤 죽는 것처럼 눈을 감는데, 다음날 눈이 떠지는 걸 보니 아직 내가 살아있더란 말이다. 이런 삶인데, 굳이 의미까지 찾을 필요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만약 누군가 내게 ‘왜 사냐’고 물어본다면, 이제는 이렇게 바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