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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n 02. 2020

내가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당신은 모른다

모멸당한 자들을 위하여

  


'회사'라는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사회'다.

그런고로, '회사생활'이라는 것은 때로는 종종 '사회생활'이라는 말의 동의어처럼 쓰이곤 한다.


 지금의 회사에서 보낸 시간도 어느덧 5년째가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생각해 보면 이 회사 내에서도 꽤나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최근 연달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현재의 회사에 조금의 피곤함과 권태를 느끼며 방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 생활에 지친 내가 집에 오면 늘 틀어놓는 것은 <오피스(The Office)>였다. 모큐멘터리의 대명사이자, 너무도 유명해서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바로 그 시트콤. 지구 상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 같지만 실재해서는 안될 어떤 가상의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각종 상식선을 벗어난 해프닝들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화를 내고 또 웃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또 금방 지나 있고는 했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지 않은가. 낮 동안 그토록 사무실에서 온갖 일들에 시달리며 상처를 받아 놓고서는, 집에 와서  또 회사 생활과 사무실에 대한 콘텐츠를 틀어놓다니.


 나는 그저 이 시트콤을 너무도 사랑했을 뿐이다. 처음 <오피스>를 봤던 대학생 때는, 나도 언젠가 번듯한 직장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하물며 내가 저 던더 미플린 스크랜튼 지점의 또라이 같은 이들과 내 미래의 직장에서 조우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실제로 취업한 이후 던더 미플린 스크랜튼 지점과 같은 재미있는 직장은 이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후에도, <오피스>는 가끔씩 기억 속에서 그 윤곽이 흐릿해질 때쯤 다시 오랜 친구를 찾듯이 봤던, 나의 '소울 드라마'였다.


 그렇기 때문에, 퇴근하고 집에 와서 편안하게 앉아 태블릿 PC에 <오피스>를 재생하는 것은 올 상반기 나의 루틴이 되었다. 하루에 깨어 있는 대부분을 ‘사무실’과 관련하여 보내는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아침에도 출근하고, 밤에도 출근하는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는, 퇴근하고 나서 정말 친했던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러 가는 기분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내가 <오피스>를 평생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 한 횟수는 5,6회 정도는 될 것이다. 이젠 굳이 자막 없이도 내용을 이해하며 볼 수 있고, 특정 대사는 외울 정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피스> 속 인물들은 아직까지도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실제로 직장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한 명 한 명이 파괴력 넘치는 '직장생활 빌런'들로 꽤 이름을 날렸을 테지만, 적어도 그 스토리라인과 상황을 철저히 스크린 밖에서만 즐길 수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네이트 판에나 올라올 것 같은 촌극의 장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내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인지, 혹은 최근 회사에서 유독 힘든 시기를 건너가고 있는 중이어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올해 들어 다시 <오피스>를 정주행 할 땐 유독 캐릭터의 감정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번에는 <오피스>의 히어로, ‘마이클 스캇’이 유독 다층적인 캐릭터로서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다.





‘제발 제가 갈 직장엔 마이클 스캇 같은 상사는 없게 해 주세요!’



 한 때는, 어떤 직장에든 첫 출근하기 전날마다 그렇게 남몰래 빌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관종에,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고, 무리수 개그를 던지며, 직원들을 귀찮게 하는.. 내게 있어 그는 현대적인 개념에서 직장 상사가 갖지 말아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춘 ‘세계 최악의 보스 빌런’ 그 자체로 보였다. (물론 <오피스> 팬이라면 결국에는 누구나 그의 매력에 설득당하고 인정하게 되지만, 사실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오피스>를 보면서, 내가 아직 회사 생활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을 땐 그저 어렴풋이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할 뿐 마음 깊이 와 닿지는 않았던 순간들이, 가슴으로 직접 와 닿는 것 같은 순간들을 느꼈다. 비록 짧은 순간순간들이었지만, 마이클과 내가 ‘동기화’되어 서로의 감정에 교감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그런 순간들은 보통 마이클의 가장 웃기고 밝은 순간들이라기보다는, 그의 가장 어둡고 깊은 내면에 숨겨두었던 상처가 드러나는 순간들이었다. 예를 들면, 그가 외로움을 느끼거나, 타인으로부터 충분히 인정받고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의 상황. 마이클 스캇이라는 캐릭터는 <오피스>에 출연하는 분량의 90%를 대책 없는 밝음으로 채워나갔지만, 내가 그에게 정작 빠져든 것은 10%의 어두운 순간들이었다.



 직원을 정리 해고한 뒤 혼자 집에서 고독하게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라던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뒤에 숨어 있을 때의 모습이라던가.

 Love of life라고 생각했던 홀리를 잃고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상사 데이비드 왈러스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의 그의 표정 등.


 

 그 장면들에는, 그의 나머지 90%의 비이성적인 행동들에 당위를 부여하는 그의 연약한 내면을 엿보게끔 할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문득 자신의 두려움을,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들에 매료되었다. 그의 10%는 내가 고민을 품은 채로 보이는 어두운 표정들과 비슷했다. 나는 마이클 스캇이라는 캐릭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주에 봤던 <New Boss>라는 에피소드에서, 나는 이 결정적인 장면을 봐 버리고 만다.  



 

 어느 날 갑자기 던더 미플린 스크랜튼 지점에 또 다른 슈퍼바이저 찰스 마이너가 부임한다. 마이클은 그가 찰스의 전임자인 젠이나 라이언처럼, 잠시 지점이 돌아가는 상황을 시찰한 후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찰스는 회의실을 차지하고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한다. 그는 고압적인 태도로 스크랜턴 지사의 모든 일에 간섭을 하기 시작하고, 마이클이 보스로서 유지하고 있던 권위를 무신경하게 짓밟는다.


 마이클은 이 문제에 대해, 찰스를 고용한 뉴욕 본사의 데이빗 왈러스에게 호소해 보려 한다. 마이클은 스스로 지난 시간 동안 나름대로 잘 꾸려왔던 스크랜튼 지사의 평온한 분위기와 질서가, 던더 미플린이 취급하는 ‘종이’라는 상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한 무법자에 의해 존중받지 못하고 무너지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찰스 마이너는 ‘관리직’에는 어울릴지 모르지만, ‘종이’ 업계에 대한 전문가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데이빗 왈러스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에게 연결하려는 전화는 오히려 사무실의 무법자 찰스 마이너에게 다시 돌아간다. 이에 마이클은 반복되는 찰스의 월권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뉴욕 본사로 달려간다.  





 그렇게 뉴욕 본사까지 2시간 여를 달려 겨우 도착한 마이클이 데이빗 왈러스를 마주친 곳은 ‘남자 화장실’ 앞이다. 그가 사무실에 있었으면서도 별다른 이유 없이 마이클의 전화를 피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마이클은 여기서 아마도 조금의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렵게 갖게 된 데이빗 왈러스와의 미팅 자리에서, 마이클은 조금은 격양된 상태이나 최대한 차분하도록 노력하며 왜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스크랜튼 지점장으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차근차근 털어놓는다.



 여기서 마이클 스캇은 <오피스>에서 그간 보여줬던 모습들과 비교해봤을 때, 놀라울 정도로 진지한 모습을 보인다. 마이클 스캇은 항상 천진하고, 아이 같고, 밝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마이클 스캇’이 아닌 던더 미플린 스크랜튼 지점장인 ‘마이클 스캇’으로서 진지하게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투는 정중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직접적이고 단순하다.




“That doesn’t seem fair. and I think I’ve earned more than that.”
그건 부당한 것 같아요. 나는 내가 그것보다는 회사에 더 벌어줬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마이클이 뉴욕까지 달려와 자신의 면전에서 어렵게 털어놓은 진심에 대하여, 데이빗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이클이 던진 문제 제기에 대하여, 데이빗은 ‘마이클의 재직 15주년 기념 파티’로 화제를 돌린다. 그것은 마이클이 처음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 말문을 열며 던졌던 ‘찰스가 제 15주년 기념 파티를 취소했어요!’라는 한 마디에 대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데이빗은 어떻게든 자금을 융통하여 마이클의 15주년 기념 파티를 차질 없이 진행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데이빗의 말을 들은 찰나의 순간, 마이클의 표정에 실망인 듯 '현타'인 듯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이 회사에 기여하고 헌신해왔던 시간이 얼마인데. 이 회사는 분명 내 의견을 받아들여줄 것이다' 라던 믿음으로부터, 15년을 헌신해 왔던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작 한 순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시간만이 흘렀을 뿐이다.


 데이빗 왈러스는 회사 중역이라는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정작 ‘뭣이 중헌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보기 위해 2시간을 운전해 달려온 ‘마이클 스캇’의 존재를 전혀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이클의 존재는 던더 미플린에 있어서 너무 ‘당연’해져 있었고, 그의 정당한 항의를 그저 ‘삐침’이나 ‘징징거림’으로 치부했다. 눈 앞에 앉은 사십 줄의 남자를 마치 자기 자식을 설득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려고 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평소에 ‘마이클 스캇’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우해 왔는지를 너무도 투명하게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마이클은 던더 미플린에서 자신의 업무 인생의 15년을 바쳐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일해왔다. 심지어 실적도 좋다. (단지 그에게 부족했던 게 있다면 상사에게 자신을 효율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자기 포장의 기술인데, 이것은 그가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이라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런 마이클이 원했던 것은 회사에 대한 자신의 기여와, 그에 따른 결과인 자신의 직급과 그에 걸맞은 권한을 보장해 주는 것뿐이었는데. 정당한 대우와 존중만을 바랐음에도,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했던 보스에게조차 똑같은 모욕을 받은 그는 문득 자신이 앉아있는 이 공간을 더 이상 스스로 견뎌낼 수 없음을 느낀다.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모멸감에 휩싸인 그는 마음을 먹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이 한마디를 남긴 채.




"You have no idea how high I can fly."
내가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렇게 문을 닫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떠나는 그의 모습은 점잖고 담담해 보이지만, 그의 씁쓸한 듯한 눈빛은 마치 ‘문제는 15주년 파티가 아니라고, 이 멍청아!’ 라는 그의 내적 외침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장면들을 보며 최근 나의 회사 내 상황들과, 그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회사를 다니면서 겪었던 결정적인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퇴사를 결심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한계를 느끼고, 한없는 절망감을 느꼈었는지. 나의 상사들은 어떤 면에서 데이빗 왈러스 같이 나를 진절머리 나게 만들었었는지 말이다.


 어떤 형태의 불공정한 처사에 대해서,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회사 내의 많은 일들에 대해서, 나 또한 상사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보통은 그런 이야기를 잘하지 않으려 하지만, 가끔씩 계기가 생기거나 스스로 스트레스 상황이 극에 달해 정말로 참기 힘든 한계치에 다다르는 순간에는 마치 S.O.S를 요청하듯 상사와의 면담 자리를 요청하곤 했던 것 같다.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종종 마이클의 ‘15주년 기념 파티’와 같은 ‘노이즈’가 끼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사실, 마이클에게 있어서 ‘15주년 파티’는 그저 트리거였을 뿐이다. 이미 뉴욕의 본사까지 운전해서 와서 데이빗 왈러스를 대면하는 시점에서, 그에게 있어서 파티의 개최 가능 여부는 이미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아마 15주년 파티를 캔슬하는 조건으로 찰스 마이너를 그의 스크랜튼 사무실에서 몰아낼 수만 있었다면 마이클은 기꺼이 그 조건을 수락했을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찰스가 파티를 개최하지 못하게 했다’가 아니었다. 마이클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부임한 찰스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과, 데이빗과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어 커뮤니케이션을 가로채는 이 모든 것들을 부당하다고 느낀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내가 이 회사에 그동안 기여한 게 얼만데, 회사가 나를 이렇게 대할 순 없어요’라는, 모욕당한 자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서글프게도, 데이빗과 마이클의 이 촌극같은 동문서답은 실제 회사 내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실무자들은 끊임없이 고충을 토로하지만, 상부에서는 ‘그럼 15주년 파티만 열어주면 돼?’라고 물어보는 그런 상황들이. 꼭 ‘퇴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이런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되고는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 나는 이 에피소드를 계속 돌려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들어 회사 생활 중에 종종 겪는 모욕적인 상황들 속에서, 순발력이 떨어지는 나는 ‘아, 그때 이렇게 말해볼 걸!’하고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있어, 마이클의 퇴사는 다소 충동적인 면은 있으나, 최근의 나에게는 이만큼이나 이상적인 퇴사의 모습도 없어 보인다. 그를 보며 나 또한 정작 필요한 순간엔 강하고 단호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스스로 모멸당했다고 느낀 순간, 나에게 모멸감을 준 누군가의 면전에 바로 이렇게 말하고, 미련 없이 그 공간을 박차고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걸요!
그동안 여기서 군말 없이 일해준 걸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떠날 그 날을...오늘도...방구석에서 조용히 꿈꿔본다...

(그러려면 일단 드와이트처럼 공격적이고 터무니없을 정도의 자존감을 많이 끌어올려놔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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