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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r 08. 2020

조는 메그가 될 수 없다.

이별 직전의 다이얼로그.


"우리 내년쯤에 결혼하자."


 스물여덟 언저리에 처음 만났던 그는 분명 실행력이 있는 타입이었다. 모든 면에서 항상 한결같이 저돌적이며 진취적이었다.


 그는 항상 미래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꼭 '우리'가 함께 하는 그림 같은 미래가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업을 잇고, 그와 나를 닮은 반쪽씩 똑 닮은 아이 둘을 낳아 그들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 그는 60세 까지는 우리 둘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내자고 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본인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희망이라며 눈을 빛내는 그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그의 열정에 진심으로 맞장구를 쳐줄 수 없는 내가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문득문득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바라는 '아내'의 상에 나는 도저히 나 자신을 투영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키워낼 아내.

 그의 어머니처럼, 아버지가 이끄는 가업의 안살림을 관리하며 든든하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아내.

 그의 어머니처럼, 젊은 시절에는 고생을 좀 하더라도 나중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좋은 집에 사는 것만으로 인생의 보람을 느낄 아내.



 그가 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빛나는 눈으로 미래를 얘기할 때마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미래'의 그림 속에 내가 있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헌신적이지도, 순종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남자 친구의 회사에 들아가 적성에도 맞지 않는 회계 업무를 보며 60세까지 스스로'죽었다'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현재의 즐거움을 유예하며 늙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는 행복한 미래의 그림이었지만, 나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가올 미래가 불안하고 답답해서 밤잠을 설치게끔 만드는 어두운 그림이기도 했다.


 우리가 만나는 내내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며 청혼해 왔다. 어서 나와 빨리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나와 가족이 되어 같이 미래를 향해 함께 열심히 달려갔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냥 기쁘지 않고, 그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어떻게든 '유예'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최고의 남자 친구였다. 나를 무척 사랑해 주었고, 나에게 헌신했지만 그럴 때마다 기쁜 한편 불안했다. 그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는 정말 나를 그 자체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랑 결혼할 거니까' '그냥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아내가 될 사람한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라는 마인드에서 비롯된, 일종의 모럴의 투자로 느껴져서. 어찌 보면, 미래의 아내에게 본인이 기대하는 헌신의 정도를 내게 미러링해 보여주는 것처럼 - 너도 나중에 내게 이 정도는 해 줄 거지? - 로 느껴져 숨이 막혔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급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시 내 주변의 누군가는 저렇게 남자가 여자한테 '꽂혀서' 정신없이 달려들 때 '어어..'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는 거라고 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런 식의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후 몇 년 뒤에도 결혼을 못하고...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어쩌면 이번 생에서 그것이 나의 마지막 결혼할 찬스가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도 좀 있다...)


 그와 함께 있을 땐 행복했지만, 어서 이 단계를 정리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그의 기대감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도저히 나로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결국 그에게 이별을 선고했다.


 당신이 원하는 미래의 그림을 기꺼이 그려 나갈 수 있을, 그 미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생각할 여자를 만나라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래'에 걸맞은 여자는 아니라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며, 내가 자신이 오래도록 기다려 온 여자라며 호소해 왔다.


 나는 말했다. 당신이 그려 놓은 그림이 직소 퍼즐이라 치자. 성공적인 삶, 귀여운 자식들, 그리고 배우자. 당신은 지금 당신이 구상한 미래의 직소 퍼즐에 남은 한 조각을 채워 넣고자 하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당신은 그 상대가 모습을 바꾸어 그 퍼즐에 맞추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야 당신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완벽한' 그림을 완성할 테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 조각처럼 생기지 않았다. 내가 들어감으로써 모든 조각들은 다시 흩어질 것이고, 당신은 결코 애초의 의도대로 완성된 그림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내게 왜 변할 수 없냐고 물었다. 자신은 나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나에게 맞춰줬는데, 왜 나는 그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것이냐고.


그는 내게 이런 사랑을 원했다


 나는 말했다. 사람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고.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곁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나는 그저, '그런' 여자가 아닐 뿐이며, 누군가가 꿈꿔 온 미래의 그림을 위한 한 조각의 직소 퍼즐로 소비되고 싶지는 않다고.


 그는 다시 말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면, 여자들은 바뀌게 되어 있다더라. 너도 바뀔 것이다. 일단 결혼을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사랑한 나의 특성은, 당신이 꿈꾸는 미래의 가정의 '와이프' 역할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당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당신이 결혼 여자는 순종적이고, 참을성 있으며, 나 자신보다 아이를 우선시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여자여야 한다고. 그렇지만 애초에 당신은 내가 저런 여자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저런 여자가 아님에도,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재미있어서,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게 좋아서. 함께 있으면 즐겁고 편안해서, 자꾸 같이 있고 싶어서 나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런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가 당신을 위해 결혼 후 완벽한 아내로 바뀌길 바라는 것은 욕심 아닐까? 내가 그렇게 된다면, 당신이 내게 사랑에 빠지게 됐던 나의 특성들은 전부 사라지는데. 그게 나의 매력이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결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 될 거야. 나는 내 미래와 일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할 거고, 모성애도 없어. (그는 아이를 낳으면 여자는 무조건 모성애가 생긴다고 설득했지만...) 나는 당신 곁에서 내가 잃은 것들을 생각하며 불행해할 거고,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편안한 삶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할 거야. 그런 나를 보며 당신도 힘들어하겠지. 이건 잘 될 리가 없어. 우리는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제 그만 그걸 인정하자.


 그가 마지막 순간 내 말을 완전히 납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6개월 뒤엔가, 1년 뒤엔가.. 그가 내게 그때 내가 했던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며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온 걸 보면 언젠가 한 순간에는 '아 우리는 그래서 헤어져야 했던 거구나' 하고 그 나름대로 납득하는 순간이 있었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그와 헤어졌지만, 나는 그와 헤어지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결혼을 전제로 하는 만남만 아니라면 그는 정말 최고의 남자 친구였고, 무척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와의 이별은 내가 겪었던 이별 중 가장 상대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는 이별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꼭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예쁜 가정을 이루고 살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진심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게 쏟아 주었던 사랑에 대해서 내가 깊은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3주 전, 극장에서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았다. 어려서 책으로 처음 접했을 때도 내겐 조 캐릭터가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영화 내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던 조가 완전히 내 마음을 울린 것은 영화 후반부, 로리의 청혼을 거절한 이후부터였다.



"네가 나를 사랑해줘서 정말 고맙고, 네가 정말 자랑스럽지만.. 네가 내게 원하는 것만큼 너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어."

"사랑할 수 없다고?"

"나는 내 감정을 바꿀 수 없어. 아닌 걸 맞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 될 거야. 테디,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우리가 결혼하면 재앙이 될 거야. 우린 끔찍해질 거라고. 우리는 둘 다 성격도 불같고..."

"네가 나를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내가 다 참을 수 있어!"

"난.. 못해, 시도해봤는데 잘 안 됐어."

"가족들 모두 기대하고 있어.. 너만 허락하면 돼, 우리 행복해질 수 있어!"

"진심으로 승낙할 수 없으니, 대답할 수 없어. 언젠가는 너도 내가 맞다는 걸 깨닫게 될 거고 결국은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그럴 일은 없어!"

"너는 사랑스럽고 완벽한 부인을 맞이하게 될 거야. 널 사랑해주고, 가사를 돌봐주겠지. 그렇지만 난 아니야. 나는 어색하고 겉돌 거고 너는 내가 부끄러워질 거야. 우린 맨날 다투겠지. 지금도 싸우고 있잖아! 나는 고상한 척하는 사교계를 못 견디고 너는 내가 쓰는 글들을 못 견딜 거야. 우리는 불행해질 거고, 차라리 함께 하지 않았기를 바라게 될 거야."

"더 할 말 있어?"

".. 나는 앞으로도 내가 결혼을 할 것 같지 않아. 나 자신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나의 자유를 너무 사랑하거든."

"아니, 너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거고 엄청난 사랑에 빠질 거야. 두고 봐."



 그렇게 로리를 거절했던 조는 도시에서의 만만찮은 생활, 동생 베스를 잃고 난 후 느낀 절망,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 속에서 다시 로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무래도 내가 로리를 너무 빨리 거절한 걸지도 몰라요."

"그를 사랑하니?"

"만약 그가 내게 다시 청혼한다면, 그러자고 할  것 같아요. 그가 제게 다시 청혼할까요?"

"하지만 그를 사랑하니?"

"저는 사랑받는 게 더 중요해요. 사랑받고 싶어요."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여자에게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외모뿐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사람들이 오직 여자에겐 '사랑'만이 전부라고 하는 게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



 로리의 청혼에 "널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어" 라며 괴로워하던 조가, 나중에는 어머니 앞에서 '너무너무 외로워. 사랑받고 싶어' 라며 우는 장면을 보면서, 나 또한 '너무 빨리 거절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과거의 연인을 떠올렸다. 모르겠다. 지금 그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그를 잡으려고 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요즘 들어 무척 외로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누군가 '그를 사랑하니?'라고 연거푸 물어올 때, '네, 그를 사랑해요!'가 아닌 '...하지만 나는 너무 외로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인연을 억지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 살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서, 고민은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조와 베스, "내 꿈이 너의 꿈과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는 네 명 다 다른 캐릭터성을 대표하고 있지만, 특히 메그와 조는 정 반대의 가치관을 표방하고 있는 것 같다. 상류 사회를 동경하는 메그와 상류 층의 사교계를 극혐 하는 조. 사랑하는 사람과 이룬 가정을 최우선으로 하고 싶은 메그와 사랑보다도 꿈과 자아실현이 소중했던 조. 어찌 보면 로리는 메그 같은 여인과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큐피드의 화살은 꼭 장난을 쳐서 로리 같은 남자가 조에게 꽂히게 만들어 버린다. 조와 메그가 서로가 될 수 있었다면, 원하는 대로 스위치를 눌러서 그때 그때 '모드 체인지'라도 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는 조금 더 많은 연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사랑을 택한 메그와 자아실현을 택한 조


 사실 나도 모르겠다. 어머니 앞에서 외로움을 토로하는 조처럼 통렬한 외로움을 토하다가도, 가끔씩 선을 보면 그 남자들이 내게 바라는 '현모양처'의 역할이 부담스러워져, 다시 그 사람과 헤어질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매번 '참 좋으신 분이지만, 저와 인연이 아니신 거 같다'라고 거절할 때마다,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라고 울부짖던 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다. 차라리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건 내가 천성적으로 메그가 될 수 없는 조이기 때문이겠지.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


 모르겠다. 이미 난 좀 늦은 거 같은데 나도 언젠가는 나중에 대고모처럼 "여자는 결혼을 잘해야 해" 라며 내 조카들을 닦달하는 할머니가 될까? 기왕 그렇게 될 거라면, <작은 아씨들>의 대고모처럼 부자라도 되고 싶은데.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말하듯, 어쨌든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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