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불쑥 그렇게 말해 온 것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며칠 전, 친구가 내게 자신의 아버지가 이번에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마음 아픈 소식에 당장 친구에게로 달려가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각자의 달라진 삶의 영역 만큼이나 물리적 거리가 벌어진 우리에게는 그저 조금 오래도록 나누는 전화 통화가 최선이었다. 그렇게 목소리로나마 멀리 있는 힘든 친구를 부둥켜안은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무렵. 훌쩍 친구가 꺼낸 말에 나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일단 가자. 어디든."
나는 여행 예찬론자는 아니다. 오히려 여행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여행 회의론자에 속한다. 이렇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어린 시절에는 배낭 하나를 매고 종종 여기저기 잘 다니곤 했다. 그것도 일부러 위험하고 불편한 곳만 찾아다니면서, 심지어는 '오직 여행만이 진정한 자신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 어쩌고 운운하며 나름 허세를 부린 적도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30대가 되면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된 후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다.
인생에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줄어든, 어느덧 7년 차 직장인인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리프레시'의 기회라던가 '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오히려 리프레시보다는 한없이 피곤하고 번거로운 일에 가깝다. 며칠 동안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직장에서 내 자리를 며칠간 비우기 위해 일을 당겨서 미리 하고, 주변을 정돈하고, 내 평소의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내겐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래도 내가 고령의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단 이틀 내지 삼일만 연이어 자리를 비워도 그들에게는 밥을 갈아주고 물을 갈아줄 조물주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과 동일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나의 부재를 세상의 무너짐과 같은 것으로 인지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길게 집을 비우는 것이 더욱 싫어졌다.
대신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았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해롤드 크릭처럼 복사 + 붙여 넣기를 하듯 한주 한주의 시간을 채워가며,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을 칸트처럼 살아내는 것은 대체로 지루했지만 평온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결국 나는 나 스스로가 그쪽을 더욱 선호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시국에 나는 굳이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평일에만 이틀의 휴가를 내고.(시국이 시국인지라 주말을 피해서 평일로만 이틀의 일정을 잡았다.) 여행을 먼저 제안한 것은 친구였지만, 사실 여행이 필요했던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여행은 꼭두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평일에 출발하는 여정이라 해도, 출근 시간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 시간을 지체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동선을 위해, 출발 전날 밤 친구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나는 직장 근처에, 친구는 우리가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고향에 아직 그대로 살고 있었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의 제목으로부터 차용을 해보면, 나는 '떠나간 자'였고 친구는 '머무른 자'였던 셈이다.
채 몇 시간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바로 출발했다. 동절기인지라 사방이 한밤처럼 깜깜했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로 일찍 출발한 보람이 있었는지, 2시간 정도 지나자 우리는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 수도권을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양재 IC를 빠져나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러시 아워를 피해 서울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는지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다음 휴게소까지만 정신을 붙잡고 가자는 생각에 힘겹게 운전대를 잡고 한참을 가고 있는데, 순간 멀리서부터 반짝이던 전광판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졸음운전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순간 친구도 나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전광판을 지나치자마자, 단 둘 뿐인 차 안에서 미묘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뭐야, 뭔데.' '저거 뭔데. 이 세상이 아니면 대체 어디라는 건데...' 하며 우린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봤던 졸음운전 방지 표어들 중에서 베스트인 것 같아."
"조사 하나가 살짝 아쉬워. 이 세상'이' 아닙니다 말고 이 세상'은' 아닙니다 하면 더 재밌고 상상의 여지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니?"
그 후로도 우리는 한참을 그 표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면서 나는 점점 졸음이 몰려오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무사히 다음 휴게소까지 갈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졸음운전을 방지하고자 했던 그 표어는 정말 효과 만점이었고, 지루한 순간에 상상력의 여지를 불러일으켜준 그 표어가 우리의 이후 여행의 콘셉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여수, 남해였다. 친구는 남해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했다. 그저 멀리 있는 바다를 보고 싶다고, 추운 날씨를 피해 남쪽으로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반면, 나는 7년 전쯤 가족여행으로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여수와 남해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뭐 한번 더 가면 어떤가 싶어서 그냥 단순하게 친구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했다. 새벽같이 내려갔더니 그렇게 막히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아서, '역시 우리나라는 정말 작구나'하고 새삼 감탄(?)했다. 올라오는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가는 관광지마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로 자동차로 이동했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불편함이 추가되었지만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었다.
언택트가 중요한 시국인지라 곳곳의 이런 풍경들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우리는 하루를 꽉 채워서 돌아다녔다. 평소에 나는 하루 9시간씩 사무실에 갇혀 있었고, 그나마 하던 운동량도 코로나19 이후로 많이 줄었다. 친구는 집에서 강의 자료를 만드느라 외부에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어릴 때와는 사뭇 체력이 달라진 것을 우리 각자 인지하고 있었던지라, 여행하는 도중에 내내 골골거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기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린 2박 3일 치고는 꽤나 충실한 동선으로 여행을 했다. 대나무로 가득한 숲도 거닐고, 중간중간 커피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목표했던 바다도 봤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레일바이크를 타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친구와 나는 14살 때, 고향의 한 보습학원에서 만났다. 밤늦게 끝나면 각자 집으로 가기 아쉬워 편의점에서 간식을 하나 사 물고는, 동네를 산책하거나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중학교는 한 끝 차이로 학군이 달라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재회했고, 또 3년을 붙어 지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어렸고, 치열했고, 각자 힘들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리고, 치열하고, 힘들게 살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지 않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위안이 되는 것은 나란히 사진에 찍힌 우리의 모습이 20년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모습은 그 사람을 처음 인지한 어느 한순간으로 멈춰져 기억되곤 한다. 내가 현재 60대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50대의 그의 모습을 보고, 훌쩍 커 대학생이 된 조카들을 보고도 유모차를 탄 채 나를 올려다보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듯이. 그러므로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을 까먹을 것 같을 때, 그 모습을 기억해주는 거울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나와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여전히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의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누군가 나의 14살을 기억해줄 것이라는 것이 문득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내게는 이번 여행이 그런 순간들이었다.
20년이 지났어도, 친구와 있을 때는 14살처럼, 20살처럼, 26살처럼 웃을 수 있다.
나란히 찍힌 사진 속에서, 그렇게 켜켜이 쌓인 우리의 시간을 겹쳐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두 번째 날 밤, 숙소에서 우린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끼리 같이 여행하다 싸우고 절교하는 애들 있잖아. 왜 그런 걸까? 이렇게 편한데."
지난 20년 간 친구로 지내오면서도, 이 친구와 여행을 했던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생각해보면, 난 20대 때는 늘 혼자 여행을 다녔다. 성격상 누군가에게 잘 맞추지 못하기도 하고, 혼자 다니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끼리일수록 같이 여행 가면 싸우게 된다'는 얘길 듣고, 싸움이 두려워 그냥 혼자 하고 싶은 대로 다니고 말지, 하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친구와 같이 다녀보니, 좀 더 자주 여행을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더란다.
나는 여수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어 했고, 친구는 바다와 일출을 보고 싶어 했다. 중간에 즉흥적으로 다른 곳으로 빠지기도 했고, 중간중간 경치 좋은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지체해도 괜찮았다. 내가 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회나 복국, 돌게장 등 현지 유명 음식을 먹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고, 나는 해안 자전거도로를 찾지 못해 결국 여수에서 자전거를 타지 못했지만 그걸로 투덜거리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어, 다른 맛있는 거 먹고, 다른 재미있는 거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우리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뜻했던 것을 다 하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이틀을 썩 재밌게 잘 보냈다. 나는 독립서점에서 책을 6만 원어치 샀고, 친구는 바로 그 옆 공방에서 향초를 샀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를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친구는 대답했다.
"그렇게 안 맞는 애들이 있어. 우린 아닌가 보지 뭐."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던 날 아침에는 친구가 보고 싶어 하던 일출을 보러 갔다. 이번에도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 눈을 떠 서둘러서 출발했다. 다행히 좀 일찍 도착해서 여유 있게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갔다. 6시 20분쯤 보리암에 도착하자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비수기였던지라 그렇게까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미리 확인하고 온 해가 뜬다는 시각은 6시 55분으로, 아직 30분이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암자 한 구석에 걸터앉아 해가 뜬다는 동쪽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날따라 정말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긴 했다. 심지어는 먹구름 비슷한 구름이 우리 위에서 해가 떠오르는 쪽으로 돌진을 하고 있었다. 하필 전날 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살짝 비가 왔었고, 아침에 확인해 본 일기예보도 '흐림' 상태였다. 두껍게 깔린 구름 사이로 생겨난 조금의 틈만이 그나마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서 들여다보듯, 떠오르는 해가 저 사이에 걸려주기만 한다면 좋을 텐데.
나는 이미 이런저런 여행지에서 일출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해맞이에 대한 간절함이 그다지 크지는 않은 상태였다. 사실 일출을 볼 수 있을지, 볼 수 없을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새벽같이 산을 오르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달까. 반면 내 친구는 여행을 갈 때마다 어디에든 일출 보기에 도전했으나 매번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시간이 감에도 움직일 낌새가 전혀 없는 두터운 구름과 점점 밝아지는 하늘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포기하고 뒤돌아 서기 시작했다. '오늘은 해 안 뜬다!' 하고 중얼거리며 줄줄이 사라지는 사람들 틈으로 꿋꿋이 해가 떠오를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친구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실망감,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미 해 다 뜬 거 아냐?"
"아냐, 조금만 더 기다려봐. 이러다가 뜬다니까."
30분 동안 친구와 이런 대화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 약속의 6시 55분이 되었을 무렵. 하늘은 핑크빛이 되었는데 해가 뜨지 않고 밝아지는 상태에서 한번 더 친구에게 "이미 해 다 뜬 거 아냐?"하고 물어보려고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친구가 밝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야, 저기 봐! 해 뜨잖아!"
친구의 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으셨고, 나는 남동생과 연락을 하지 않은 지 6개월이 다 되어 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번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그 일들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절벽에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이 애태우던 빨간 태양이 구름 사이로 마치 기적처럼 떠오른 순간, 나는 손을 모으고 친구의 아버지가 건강히 회복되시기를, 나의 가정의 복잡한 문제도 해결되기를 바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계속해서 속으로 속삭였다. 한 번의 일출로 두 가지의 소원을 비는 나의 욕심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혹시 이 소원에 우선순위 설정이 필요하다면 친구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시는 쪽이 좀 더 시급한 것 같다고.
거의 1,2분도 되지 않아 해가 다 떠버렸고, 그 속도감에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해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길었는데, 해가 저렇게나 빨리 떠오르다니. 마치 저게 인생이 흐르는 속도 같아서, 너무도 빠르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 해 뜨는 거 보니까 좀 우울한 것 같아. 삶에서 정말 아름다운 순간들은 저렇게 직전에 잔뜩 뜸 들이다가, 정작 몇 분만에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게 아닐까?"
나의 침울한 물음에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 짧긴 하지만 해가 다 뜬 후에도 이렇게 아직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도 예쁘지 않아? 그리고 해는 하루 종일 밝게 떠 있다가 또 나중에 다시 피크 타임이 찾아오잖아. 해 질 때도 얼마나 예쁜데. 아직 끝난 게 아닐 거야."
얼마 전에 운동하다 허리를 다친 적이 있다. 평소 같았으면 전혀 다칠 난이도의 동작이 아니었는데, 그 날따라 이상하게 허리를 삐끗해버렸다. 그것은 정확하게는, 운동 때문에 다친 거라기보다는.. 그 전날 갑자기 해보고 싶어서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했던 탓에 허리 쪽 근육이 긴장되어 있는 상태에서 무리한 동작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찾아간 단골 한의원에서, 허리에 침을 꽂으며 의사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허리를 다쳐오는 이유 중 가장 큰 게 '운동'이에요. 평소에 운동을 안 하다가 몸 생각한다고 무리해서 스트레칭하고, 근력 운동하고.. 그러다 보면 허리에 피로가 조금씩 누적돼서 한 번에 터지는 거죠. 원래 안 하던 짓 하면 다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억울한 마음에 발끈했다. 지난 추석 연휴 때 대국민 특집 나훈아 콘서트에서 나훈아 씨 MC 멘트를 감명 깊게 들었던 탓이다.
"근데 나훈아 씨는 안 하던 짓을 하라던데요!"라는 말이 억울한 마음에 턱끝까지 솟구쳤다. 나훈아 a.k.a 테스 형은 말씀하셨다.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 끌고 가야 한다고. 인생을 충실하게, 길게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라고.
최근 시간의 흐름이 유독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 그저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월말 월초를 바쁘게 지내고 나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중순이 오나 싶었더니, 금세 또 연말이 되어 연말 결산과 내년 사업 계획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같아서는 시간이 그저 '흐르는' 것도 아니고, 굽이굽이 접는 것 같다. 늘 반복되는 시간의 의미 없는 부분을 접어내다 보면, 그러는 새 어느덧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내게 여행의 효용에 대해 일깨워준 중요한 모멘텀이 되어주었다. 짧은 기간이었고, 코로나19로 인한 제약 상황도 많았지만, 나는 하루하루를 무척 길게 보냈다. 연말 콘서트 준비에 한창이실 테스 형이 지금 당장 내 앞에 오셔서 물어보신다 해도 나는 그 이틀만큼은 감히 내가 시간의 모가지를 잡아 비틀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하루라도, 24시간이라도.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밀도와 속도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참 오랜만에 느껴봤다. 여행 회의론자였던 나 자신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자주 내 일상 중간중간에 비일상적인 요소를 끼워 넣어 보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