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Nov 02. 2020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삶이라는 고통 속에서.


 그녀의 비보를 접한 것은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던 오늘 오후였다.


그저 TV에서나 가끔 봐 왔던, 일면식도 없는 그녀의 죽음을 처음 접했을 때. 그것도 그녀 혼자가 아닌,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평소 그녀의 팬도 아니었고, 그녀가 나오는 방송을 찾아보는 사람도 아니었음에도 한동안 무척 마음이 아팠다. 마치 그녀가 나였던 것처럼.


 그녀의 소식을 처음 접한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라며 그녀의 죽음의 이면을 궁금해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이유가 집요하게 궁금하진 않았다. 그저 많이 힘들었겠거니,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이 아팠겠거니. 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때나마 TV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 일부를 잠시 떠올려 보는 것이 오늘 내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여성이, 그것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개그우먼'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가 그렇게 갔다는 것이 뭔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비정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런저런 톡방에서 그녀의 소식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메신저 창을 통해 퍼져나가는 그녀의 부고 기사와 썸네일 속 그녀의 사진을 보며, 결국 한 줄의 링크로 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질 한 사람의 씁쓸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소식을 전해온 친구에게,  난 이렇게 말했다.



 "있지, 산다는 건 정말 너무 고통인가 봐."

 


 '우리 왜 살지?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지 뭐. 사실 안 태어날 수 있었다면 안 태어났을 거야. 산다는 건 정말 고통 그 자체니까.' 평소 서로 그런 말을 시시덕거리며 주고받던 친구였지만, 오늘 그녀의 소식 앞에 내가 불쑥 꺼낸 이 말 앞에서는 둘 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참담한 죽음이었다.







 삶이라는 것은 고통이다. 나 역시 30년을 조금 넘게 살아오면서, 때로는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아프고 힘들 때마다 대체 왜 내가 살아 있어서 이런 꼴을 보고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종종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까. 나 스스로 나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텅 빈 방 안에서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20대 때는 그런 힘든 순간에 주위에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괴로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 늦은 밤 집 앞에 찾아와 우는 나의 등을 두들겨주며 이런 말을 건네주던 사람도 있었다.



 "네가 너 자신을 해치고 싶을 때는, 너를 너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여기 나처럼 말이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스스로를 상처 입혀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말라. 결국 내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말 덕분이었다. 나는 내가 죽을 때 아픈 것보다도, 내가 목숨을 끊는다면 그다음에 홀로 남겨질 아버지의 갈기갈기 찢길 가슴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텼다. 그렇게 이를 꽉 악물고 살다 보면, 가끔씩은 또 괜찮은 것 같은 때도 왔다. 인생은 대부분 고통스러웠고, 대부분 거지 같았지만 그래도 가끔 가다 평온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고, 그럴 때는 나의 생을 붙잡아줬던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들이 나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나는 철저한 혼자가 되었다. 그 시절 그렇게 나를 지탱해주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애초에 내 인생에서 그 소중한 존재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 것은, 일차적으로는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힘들고, 종종 우울해지면 잠수를 타버리거나 툭하면 인연을 가볍게 끊어버리는 나의 고약한 성질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각자 나이를 먹고 서로의 삶의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며 자연스럽게 페이드 아웃되어 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30대 중반의 나는 이렇게 어떤 사건으로 인해 감정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오롯이 홀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좀처럼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우울해했다. 이런 나의 우울함을 단절시켜줄 어떤 수단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무척 두려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이대로 혼자 집에 들어갔을 때, 내가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나를 사랑했던 다정한 사람들이 내게 해줬던 말을 나 자신에게 하지 못한다. 앞으로 더 살아서 좋을 일이 뭐가 더 있겠어? 삶이란 어차피 고통스러울 뿐인데.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남아 있는 소중한 사람들은 언젠가 다 세상을 떠나고, 나조차 그럴 텐데. 앞으로의 삶에는 이별만 남았을 텐데, 차라리 내가 이별을 고하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당장 오늘 밤, 이 순간, 어떻게 나 스스로를 재워야 할지 그 방법조차 묘연한 나에게 나 자신을 맡겨도 될까. 알 수 없는 밤이다.



 




 이미 결과로만 남아버린 타인의 죽음 앞에 내가 이 이상 그 어떤 말을 더 얹을 수 있겠는가. 나는 차마 그럴 수 없다. 어머니와 함께 그 길을 택해야 했던 그녀의 먹먹한 마음도 나는 차마 헤아릴 엄두를 낼 수조차 없다. 그저 이 노래를 듣는 것으로 추모의 마음을 대신할 뿐이다.



마침, 가을이다.



+


秋桜 (코스모스) - 中森明菜 (나카모리 아키나)

https://youtu.be/Std19LANtzM

うす紅の  秋桜が  秋の日の何気ない  陽だまりに  揺れている
연분홍빛 코스모스가 가을날의 무심결에 햇살에 흔들리고 있어요

此の頃  涙  もろくなった  母が庭先で  ひとつ咳を  する
요즘 들어 부쩍 눈물이 잦아지신 어머니가 뜰 앞에서 한번 기침을 하시네요

縁側で  アルバムを  開いては 私の幼い日の  思いでを
마루에서 앨범을 펼치고는 내 어렸을 때의 추억을
  
何度も  同じ話  くりかえすひとり言みたいに  小さな  声で
몇 번이나 같은 말로 되풀이하네요.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こんな  小春日和の  穏やかな  日はあなたの優しさが  しみてくる
이렇게 화창하고 평온한 날에는 당신의 다정함이 스며들어요
 
明日  嫁ぐ  私に  苦労は  しても笑い話に  時が  変えるよ
내일 집을 떠나는 내게 "고생은 하더라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올 거야"라며
 
心配  いらないと  笑った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셨어요

あれこれと  思い出を  たどったらいつの日も  ひとりでは  なかったと
이것저것 추억을 더듬으니 언제나 나 혼자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今更ながら  わがままな  私に唇  かんでいます
이제 와서지만 멋대로 고집만 피웠던 내 잘못에 입술을 깨물고 있어요

明日への  荷造りに  手を  借りてしばらくは  楽し気に  いたけれど
내일 가져갈 짐을 꾸리는 것에 도움을 주시면서 잠깐 즐거우신 것 같았지만
 
突然  涙こぼし  元気でと何度も  何度も  くりかえす  母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내게 건강하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거듭 당부하시는 어머니
 
ありがとうの言葉を  かみしめながら生きてみます  私なりに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살아 보겠어요. 내 나름대로
   
こんな  小春日和の  穏やかな  日は
이렇게 화창하고 평온한 날에는

 もう  すこし  あなたの子供でいさせてください
조금만 더 당신의 자식으로 있게 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맹수의 식사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