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 맘때쯤 되면나의 화두는 '습도'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최근의 나의 모든 생활 습관이나 신경은 '습도를 유지'하는 데 온통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 비염러인 내게, 매년 겨울마다 찾아오는 미친 건조함은.. 필연적으로 코 안쪽이 버석하게 마르는 호흡기의 건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신체적 증상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다지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 연례행사처럼 비염 증상이 심하게 찾아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병원에 찾아가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 정도로 대응해 왔을 뿐. 그렇지만 증상이 완화되는 것은 그 전후 잠시 뿐으로, 근본적인 기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그 증상은 얼마 안가 재발하곤 했다.
버석해지고 갈라져 피가 나는 내 코 안을 들여다보며, 의사는 혀를 쯧쯧 차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집이 많이 건조해요? 약 먹고 잠깐씩 좋아져도 집이 건조하면 소용이 없어요. 가습기도 틀어 주면서 평소에 습도 관리를 같이 해줘야 해요."
의사 선생님은 간단한 것처럼 말했지만, 내게는 어쩐지 '습도 관리'라는 개념이 무척 막막하게 느껴졌다.
온도 조절은 방이 춥다 싶으면 보일러에 설정된 온도를 올리면 되고, 미세먼지는 창밖이 뿌옇고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리면 그냥 공기청정기를 돌리면 될 일인데.. 습도에 대해서는 어쩐지 그렇게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하기가 어려웠다고나 할까?
그래도 나름대로 습도를 올려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자기 전 집안 구석구석에 대접에 물 받아놓기, 숯 물에 담가놓기, 나무젓가락과 물티슈로 DIY가습기 만들기, 물에 젖은 수건 널어놓기, 빨래 널기, 가습기 가동... 그래도 나의 증상은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그냥 운명인가 보다. 이러고 살아야지 뭐. 하는 생각으로 거의 포기 해갈 무렵. 문득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눈에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그 책의 제목은 바로 <우리 집이 숲이 된다면>이었다.
책 제목과 표지의 이미지를 보자마자, 신기하게도 공감각적인(?) 상쾌함이 느껴졌다. '숲'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기분이 싹 리프레시되는 것 같았달까. 그러고 보니 나의 집에는 집안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새들 외에는 살아 숨 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이트 톤으로 단정하게 인테리어 된 집은 깔끔하긴 했지만 일견 삭막해 보이기도 했다. '숲'까지는 아니지만, 잘 죽지 않는 나무 같은 것은 한 두 개 정도 키워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이 있는 풍경... 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낮에도 밤에도 숨 쉬고 뭔가 내뿜는 존재가 집에 자리 잡아 준다면, 겨울철만 되면 싹 달아나버리는 습도도 좀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이 세상에는 죽은 식물도 살려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근데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제로-섬 게임이 아닌가? 즉, 세상에는 정확히 그 반대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나는 살면서 몇 번 화분을 선물 받은 적도 있었고 키워볼 기회도 있었으며, 심지어 처음 독립할 때는 큰 맘먹고 행운목까지 샀지만... 결국 불사신이라는 선인장까지 몽땅 죽여버렸던 식물 연쇄 살인마였다. (아마 전과 9범 점도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왠지 흙이 무서웠다. 흙 속에 뭐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 아닌가. 분갈이를 하다 보면 흙에서 애벌레나 지렁이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매일같이 코피를 흘리며 이비인후과를 왔다 갔다 하는 삶도 무시무시하긴 마찬가지였다. 코 세척만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무리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내 생존에 걸린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어떻게든 노력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대망의 첫 화분들을 집에 들이게 된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 의지에 따라 집에 식물을 들이게 된 만큼, 나는 품종 선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1. 잘 죽지 않을 것 (불사신 수준이어야 함) 2. 공기 정화 능력이 우수할 것 3. 습도 유지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 4. 병충해에 강할 것
위 네 가지 조건에 충족하는 것들을 고르다 보니, 최종적으로 NASA에서 선정한 공기정화 능력이 우수한 식물이라는 아레카야자와 고무나무를 각각 들이게 되었다. 특히 아레카야자는 매일 1L의 수분을 내뿜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물을 찾아보던 과정 중에 너무 예뻐서.... 오로지 외모만 보고 픽한 산세베리아 문샤인까지. 그렇게 우리 집 식물 1기 라인업이 얼추 완성되었다.
거의 30년 동안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 없던 내가 왜 이렇게 처음부터 한꺼번에 많은 아이들을 들였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 같다. 다 물 주는 주기도 다르고 좋아하는 환경도 달랐지만 이번에 나에게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물 주기 알리미 '서스티'였다.
내돈내산으로 간증합니다. 서스티 짱이에요. 개발자여 그대는 자칫 사라질 뻔한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이 서스티는 화분에 꽂아두기만 하면, 필터의 색상 변화로 언제쯤 화분에 물을 줘야 할지 힌트를 주는 신통방통한 물건이었다! 일일이 화분마다 젓가락으로 찔러보며 흙이 완전히 말랐는지 아닌지 체크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줄 뿐 아니라 나같이 물 주는 주기를 까먹거나 아니면 아예 틀려서 화분을 학살하고 마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한 줄기 빛 같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처음 집에 식물을 들였던 그 날부터 1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비교적 무탈하게 함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서스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화분이 몇 개 없었던 초창기, 나는 그렇게 서스티의 눈치(?)를 보면서 식물에 물을 주는 타이밍을 조심스레 익혀갔다. 나는 정말 이 식물들이 잘 살아주길 바랐다. 또 본의 아니게 어떤 생명을 이 집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감성적인 이유와, 이 정도로 큰 식물은 죽게 되면 처분할 때 화분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야 할 뿐 아니라 처리가 무지 귀찮다는 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그리고, '아레카야자와 고무나무는 죽지 않는다'는 신화(?)처럼, 그들은 습도계에 습도가 1%도 잡히지 않는 (계기판이 --%로 표기된다..) 고비사막 같은 우리 집의 척박한 환경에서 잘 살아남아 주었다. 죽지 않고 살아주는 것도 고마운데, 심지어 새로운 잎을 피워내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엄청나게 감동했다.
새 잎이 돋아나는 모양도 각양각색!
그들의 성장으로 인해 내가 느끼는 이 충실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늘 똑같아만 보이는 집안 한 구석에서 천천히, 자신만의 페이스로 자라나고 변화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도 가슴 찡해올 일이냔 말이다.
그중에서도, 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문샤인 화분 구석을 뚫고 자라난 모체의 1/100 크기의 미니어처 같은 연둣빛의 아기 문샤인을 봤을 때 나는 너무 감동해서 당황할 정도였다. 황급히 사진을 찍어 문샤인 화분을 구매했던 화원의 사장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구석에서 이렇게 새로 자라났어요!'하고. 마치 손자를 자랑하는 할머니의 기분이었달까.
엄지손톱만한 아기가 자랐다!
그러나 사장님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당황스러웠다.
'어이쿠, 새순이 자랐네요~ 모체의 영양을 뺏어갈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잘라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문가로서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판단이었겠지만 나는 그 문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잘라버리라고? 이 Baby를? 나는 놀라 다급하게 답 문자를 입력했다.
'아니... 그렇지만... 잘라 버리기엔... 너무... 지나치게... 좀 많이 귀여운데요.....?ㅠㅠ'
나의 문자를 읽은 사장님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사장님으로부터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그럼 조금 더 크면 따로 다른 화분에 옮겨 키우세요. 모체의 뿌리가 손상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그 후 문샤인은 그 자리에서만 충 3촉의 아기 문샤인을 생산하며 우리 집 다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년 간 이런 식으로 3촉이나 키워냈다..! 이렇게 큰 아이들은 다 새로 화분에 심어 다른 집에 나누어 주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 집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튼튼한 식물들과 먼저 지내보며, 많은 식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과거로부터 비롯된 식물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대체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구석에서 꾸준히 알아서 잘 자라는 그들을 보니 뭔가 머쓱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며 나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반려식물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른 종으로도 화분을 한 두 개씩 조심스레 늘려나갔다. 집뿐 아니라 회사 책상에도 화분을 하나 갖다 둘 정도로, 나는 반려식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회사 책상에 둔 문샤인. 점심시간을 틈타 숟가락으로 분갈이를 하고, 환기가 여의치 않은 날엔 선풍기 바람이라도 쐬어준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나는 1년 좀 넘는 시간 동안 여러 반려식물들과 함께 무사히(!) 동거 중이다.이제는 웬만한 분갈이 정도는 플라스틱 수저 하나만 있어도 10분 만에 슥삭 해내고, 마사토와 상토도 구분해내고, 줄기가 쓰러지는 식물은 지지대를 세워 고정시킬 줄도 알고, 이케아에서 산 화분 거치대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조립할 정도의 '식물 덕후' 초급 레벨 정도로는 성장한 것 같다.
그렇게 반려식물을 돌보다 보니, 이것은 또 반려동물과의 삶과는 또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느덧 (감사하게도) 10년째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지만, 식물을 돌보는 마음과 동물을 돌보는 마음은 또 다르다고 느껴지는 요소들이 있달까.
우리 집 반려동물과 반려식물의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공간에서 지낸다 치면, 동물은 확실히 움직이는 존재다. 끊임없이 숨을 쉬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동물은 어떻게든 스스로 원하는 것을 반려인에게 전달할 능력이 있다. 그렇지만 식물은 다르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간에게 적극적인 동작으로 전달할 순 없다. 다만, 겨울철 창문에 닿은 잎이 노랗게 시든다던가, 목이 마를 때 잎을 푹 수그린다던가. 새로 잎을 피워낸다던가, 끝이 바싹 마른다던가, 주름이 진다던가...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수동적으로전달한다.
물 주기 전/후. 스파티필름은 물 달라고 어필을 확실히 하는 아이다. 그래서 좋아한다. (유일하게 서스티 안 꼽고 키움)
그럼에도 특이한 것은, 식물들은 기본적으로 무심하게 내버려 둬야 잘 큰다는 것이다. 반려동물들에게 있어서 집사가 본인에게 무심해지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무척 서운한 일일 것이지만, 반려식물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오히려 조금은 반가운 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일매일 들여다보고 컨디션을 체크할 때보다, 잊고 있다가 문득 가끔가다 한 번씩 들여다봤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티가 나는 본인의 성장 요소를 인간이 눈치채 줬을 때. 그때 그들의 모습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식물과 나는 그런 점에서 좀 비슷한 것 같다. 나 또한 내향인인지라, 사람들로부터 지나친 관심을 받고 싶지는 않을 때가 많으니까.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늘 주목받기보다는 그저 가끔가다 한 번씩 생존 신고만 하고 살고 싶은 걸. 만약 누군가 나를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물이 필요하지 않냐고 시도때도 없이 흙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본다면 나는 조금 움츠러들며 이렇게 말해버릴지도 모른다.
"앗... 저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말아주세요."
결국 식물 키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물 주기의 주기만큼이나 '적당한 무관심'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흔히들 식물을 키우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물 주기'에 대해 화원에서 들었던 공식을 맹신하기 때문이다. '얘는 물 한 달에 한번 주시고요, 쟤는 2주에 한번 주시면 되어요.' 하는.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렇게 공식처럼 딱 정할 순 없는 것이었다. 식물에게 있어 물이 필요한 주기는, 그 식물이 어떤 환경의 집으로 가게 되는지에 따라서도, 또 그 집 내의 어떤 공간(ex. 볕이 잘 드는 거실, 해가 잘 안 드는 작은 방 등등..)에 배치되느냐에 따라서도 각자 달라진다. 그 식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1-2주에 한 번이라느니, 한 달에 한 번이라느니 하는 일률적인 공식을 따랐다가는 결코 식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쉽고 간편한 보편적인 공식으로는 알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을 파악하려면, 결국은 끊임없이 곁눈질로 눈치를 봐야 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고 물을 줘서 과습으로 뿌리를 질식시켜서도 안되고, 너무 무심하게 내버려 두어서 말라죽게 해서도 안된다. 그 중간을 지키면서, 소심한 짝사랑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식물은 가지가 꺾이며 독을 내뿜는다. 때로는 누군가 상처를 입었을 때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되는 것처럼. 온몸으로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내뿜는 그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꼬인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식물과 함께 한 최근 2번의 겨울, 나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비염러를 벗어났다. 습도계를 뚫고 지하세계로 수렴하는 것 같았던 우리 집 습도는 그래도 식물들이 형성한 '리틀 포레스트'가 힘 내주는 덕분인지, 가습기와 협공하면 60%까지는 도달해준다. 그게 어딘가. 아침마다 코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삶의 질이 한결 좋아졌다 느낀다.
침대 머리맡 뷰.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아니지만 숲에서 잠들고 싶어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재택근무다 뭐다 여러모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는데, 문득 지루함을 느낄 땐 바지런히 식물들을 돌보며 머리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바닥의 먼지를 다 흡착해서 하얘진 고무나무 잎을 반질반질하게 닦는다던지, 끄트머리가 갈변한 아레카야자 잎사귀를 신문지 깔고 잘라주면서 '손님~머리가 상했네요~ 끝부분 좀 다듬어드릴게요! 오호호~' 하면서 30대 중반에 혼자 미용사 놀이를 한다던지.(정작 내 머리는 방치해두면서...)
오늘은 볕이 좋은 김에 평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안타까웠던 화은용의 지지대를 세워 줄 겸 분갈이도 같이 해 주었다.
이제 연쇄 살인마는 벗어났지만, 아무래도 분갈이 빌런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분갈이를 마친 화은용에 대해 나는 또 한동안 무심해져야 할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지나치게 좋아하진 않으려고 한다. 이것도 나름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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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쓰신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주제의 칼럼을 읽다가, 퇴계 이황 선생님의 유언이 "매화에 물 줘라." 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훈 선생님은 그 유언에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고 하셨지만, 식물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나에게는 그 말이 어쩐지 더할 나위 없이 구체적인 생활감으로 와 닿는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이 세상에 초연하게, 화초 하나만을 남긴 채로 떠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나의 반려식물들만큼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 영구히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문득 가슴이 웅장해진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