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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Dec 07. 2020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어떤 인생은 소설이 된다.



오늘은 내 아버지의 64번째 생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나의 아버지가 최민수인 줄 알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채 모래시계의 한 장면 - "나 지금, 떨고 있냐?" - 를 흉내 내는 나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내 눈에는 TV 속에 나오는 최민수 아저씨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훤칠하고 중후한 매력을 풍기는 외모에 옷도 신발도 썩 잘 차려입던 멋쟁이였던 나의 아버지는 잘생겼던 만큼 이런저런 사연도 많은 남자였다. 아버지가 가끔가다 한 번씩 툭 내던지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품고 있던 파란만장함이, 곱디 고운 모범생으로 자랐던 내게 얼마나 자극적으로 와 닿았던지.


 그래서일까, 처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나는 항상 그의 삶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보다도. 내 가족, 바로 내 아버지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흥미진진했던 그 이야기들을. 그리고 아마도 오늘이 그러기에 적당한 날이 아닐까 한다.


 내 아버지의 길고 지난한 삶의 여정을 단 한 편의 글로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한번 기록해 보려 한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나의 아버지는 1956년, 전라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8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막 태어났을 때 그에게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누나가 셋, 형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전후 관계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나의 할아버지는 바람을 피우셨다는 것 같다. 두 집 살림을 할 정도로. 할아버지는 당시 기준으로 따져봐도 그 동네에서는 알아주는 미남이었고, 스캔들 메이커로서의 삶을 한껏 즐겼다. (한 번은 할아버지의 지인이 모는 택시에 할아버지가 젊은 애인과 함께 탄 적이 있는데, 뒷좌석에서 여자에게 작업 거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하여튼 그 결과 아버지의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은 아버지를 낳아주신 할머니가 아닌 다른 여인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에게는 이복형제가 생긴 셈이다.


 복잡했던 출생이야 어떻든, 그래도 8남매는 비교적 사이좋게 지냈다. 딸만 줄줄이 낳다가 본 귀한 아들인 첫째 아들은 누나 셋이 있는 넷째였지만 동시에 장남이자 미래의 가장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그는 책임감은 있었지만 조금 주눅 들고 유약한 성정으로 자라났다. 아버지의 남동생은 이복남매를 제외하고서는 실질적인 막내아들이라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안타깝게도 몸이 매우 약해서 가족들은 항상 그를 걱정했다.


 <작은 아씨들>의 남자 버전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의 아버지는 그런 가운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둘째 아들로 거리낌 없이 자라났다. 장남의 부담을 지는 것도 아니고, 막내처럼 몸이 약해 가족의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었던 그는 자연스레 집 바깥으로 돌며 골목대장으로 자라났다.


 중고등학교 때 그는 길러서는 안 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자진해서 선도부장을 했다. '그 시절에는 원래 노는 애들이 선도부장을 했어. 그래야 담배를 뺏어서 피울 수 있으니까.' 라며, 그는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내게 큰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은밀히 그렇게 말하곤 했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의기양양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그는 집안의 천방지축 시한폭탄 같은 둘째 아들로 살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속을 썩였다. 그도 그럴 것이, 8남매 중에 나의 아버지와 같이 사고를 치고 다니는 별종은 없었다. 다른 형제들과 한 배에서 나왔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동네에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다고 한다. 밖에서는 온갖 감언이설로 다정하게 여자들을 꼬드기는 할아버지도 집에서는 무뚝뚝하고 엄격한 가장에 다름 아니어서, 나의 아버지가 사고를 칠 때마다 그는 무섭게 혼냈고, 때로는 폭력도 행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는 통제당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났다. 점점 내 아버지는 특유의 보스 기질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주변에 아버지를 따르는 학생들과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의리' 넘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던데.. (한 번은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려는 학교에 대항하여 데모를 조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번은 친구와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코가 깨져 논두렁에 처박혔다. '아, 사고 쳤다!' 공부머리는 없었지만 영민했던 아버지는 상황 판단이 무척 빨랐다. 이번에 잡히면 다리몽둥이 하나 분지러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그는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의 서랍장에 숨겨져 있던 곗돈을 훔쳐 친구와 함께 서울로 달아났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할머니 곗돈을 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남대문 시장에 가서 '청바지'라는 것을 하나 사 입는 것이었다. 신문에도, 잡지에도 나오는 그 세련된 것을 한번 꼭 입어보고 싶었단다. 그렇게 친구와 청바지를 하나씩 사고 나이키인지 나이스인지 모를 운동화도 한 켤레씩 사고 나니 돈이 다 바닥나버렸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서울에서 돈을 벌고 있던 누나에게 연락했다. 어떤 누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일하다 와서 잔뜩 피곤했을 누나는 멀리서 사고 치고 도망 와 청바지와 새 운동화를 신고 철없이 헤벌쭉 웃고 있는 중학생 남동생을 도저히 다시 길바닥으로 내몰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고향 집으로 끌려간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이 말썽꾸러기 남동생을 패대기쳐 놓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본인이 성인이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온 이유 중에도, 그런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조금은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말썽을 피우던 그도 마냥 10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10대 때부터 이미 어른인 양 행세하고 다니던 나의 아버지는 드디어 나이를 먹고 적법한 성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올라와 경기도 쪽에 터를 잡았다. 방해하고, 눈치 주는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껏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올라와 질풍노도와 같은 20대 청춘을 보낸다.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지만, 내 아버지의 20대 시절은 꽤나 거칠었던 것 같다.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조직에 몸담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를 보러 사무실에 갈 때면 항상 깍두기 머리를 한 아저씨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ㄷ자로 앉아있던 풍경이 먼저 떠오르니까.


 시골에서는 보스로 한껏 행세하고 다녔지만, 아마도 조직에서 그의 위치는 중간 보스 이상으로 올라가진 못했던 것 같다. 30대가 된 뒤, 어쩌다 갔던 카지노에서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나이로도 19살밖에 되지 않았던 앳된 여학생에 내 아버지는 한눈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로부터 밤낮 없는 구애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 무서워했다고 한다. 시커먼 사람이 맨날 각진 그랜저를 타고 쫓아다니니까. 요즘 같아서는 그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겠지만, 당시만 해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버젓이 여자 꼬시는 꿀팁으로 통할 때였다. 아버지는 우직하게 나무를 찍어댔다. 결국 엉겁결에 하룻밤 역사가 일어났다. 그 단 한 번으로, 원치 않는 임신이 일어났다. 그렇다. 그 여학생이 나의 어머니이다.


 나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어머니는 인생을 비관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어쩌다 치른 하룻밤으로 덜컥 들어선 아이가 한없이 밉고 저주스러웠다. 그녀에게는 따로 약혼자가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를어찌한단 말인가. 그녀는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그저 원망스럽고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떨떠름하게 나의 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임신에 아버지가 그렇게 뛸 듯이 기뻐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 날부터 어떻게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그 존재를 없애고 싶은 어머니와, 애만 낳고 떠나도 좋으니 제발 아이만 무사히 낳아달라는 아버지 사이의 지독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증오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사랑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애초에 그렇게나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혹시 뱃속의 내가 잘못될까 봐, 아버지가 본인 발밑에 납작 엎드려 애원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녀가 담배를 뻑뻑 피워댈 때마다 아버지는 13살이나 어린 그녀의 발을 붙잡고 매달려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제발, 아이가 잘못될 수 있으니까 담배는 피우지 말아 달라고. 그녀는 그럴수록 더욱 패악을 부리고 담배 한 개피를 새로 꺼내 꼬나물었다. 아마 그렇게라도 절망감과 분노를 아버지에게 표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버지는 어머니의 발밑에서 어머니에게 빌고, 믿지 않는 신에게 빌었다. 제발 아이가 잘못되지 않게 해 달라고. 제발 멀쩡한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정작 그토록 고대했던 내가 태어나는 그 날에는 산부인과에 오지 못했다. 그는 그 날 구치소에 있었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그도 내게 아직까지 명확히 얘기해주지 않는지라 이 부분은 늘 내 상상의 영역 속에 남겨두고 있다.) 구치소에서 내가 무사히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는 특별히 요청하여 반입해 온 옥편을 폈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소홀히 하고, 평생 책 몇 권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자가 뭐가 뭔지는 대충 알았다. 옥편을 뒤지고 뒤지다, 잘 모르는 그의 눈에도 제일 멋있어 보이는 한자를 하나 골랐다. 임금 왕자가 들어가 있는 게 멋지다며.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임금 왕(王) 자가 아니고 구슬 옥(玉) 자가 부수로 쓰이면서 점이 하나 빠졌을 뿐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면 선녀가 날개옷을 되찾은 듯이 바로 훨훨 날아갈 것 같았던 나의 어머니는 의외로 떠나지 않고 아버지 옆에 잔류했다. 다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철저히 방치했다. 우는 소리를 포함하여 아이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저 싫고 귀찮았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어쩜 저렇게 미울까 싶었다. 그렇게 차가운 바닥에 방치되어 우유도 제대로 못 먹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결심했다. 아이를 데리고 일을 다니기로.


 내가 태어난 이후로 얼마 뒤쯤 아버지는 조직에서 독립하면서 사업체를 차렸다. 중요한 미팅을 할 때,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 아버지의 각진 그랜저 조수석에는 항상 갓난아이가 타고 있었다. 잘 생기고 남자다운 인상이었던 나의 아버지가 검은 양복에 한 손에 애를 안고 나타났을 때,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때로는 각진 그랜저의 조수석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때로는 깍두기 머리를 한 조금 거칠지만 다정한(?) 삼촌들의 손에서 공동 육아당하며 자라났다. (그 때 당시 삼촌들을 다시 만나면 아직까지도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 어릴 때 기저귀 갈아줬다"다.) '라떼파파'라는 말이 유행하기 30년도 전에 나의 아버지는 이미 '라떼파파'의 모범을 보였던 셈이다.


 어머니와는 식을 올리진 않은 상태로 동거 중이었고 그 생활은 당연하게도 원만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한창 창창한 나이였던 본인이 왜 아버지의 집에 들어앉아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애를 하나 낳은 몸으로 어디 훌쩍 떠나기엔 나의 어머니는 배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본인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나가기에는 막막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 딸을 볼 때마다 증오심과 복수심을 불태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마찰이 심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 삶이 힘들었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래도 나를 사랑했다. 본인을 쏙 빼닮은 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든든한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어머니의 패악을 피해 가끔씩은 둘이 놀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이 생겼다. 아버지를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본인의 괴로움을 해소할 방법이 없을지 사주팔자를 보러 갔고, 거기서 '둘째를 가져. 그럼 부부관계가 좋아져!'라는 조언을 들은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 남동생이 태어날 때까지는 원만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남동생의 탄생은 나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전까지의 삶에 있어서는 차마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갓 태어난 나의 남동생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이번만큼은 잘해보고 싶다'던 어머니의 마음은, 복중의 태아를 위해 피우던 담배를 끊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내 남동생은 태어나자마자 대학병원에서 2,3번의 두개골 수술을 받아야 했다. 30대 중반까지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던 그에게 인생에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련이 닥쳤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기쁨과, 그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슬픔이.


 내 남동생은 갈비뼈가 하나 없다. 갈비뼈를 빼서 두개골을 벌리는데 썼기 때문이다. '그럼 내 남동생이 아담이야?' 라고 물어봐도 아버지는 웃지 못했다. 팔뚝보다도 작은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3번의 수술을 겪는 동안 겉으로 한없이 강해 보였던 아버지는 보이지 않게 속으로부터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아버지가 도박에 손을 댄 것은.


 지금의 나는 당시의 아버지보다 조금 어린 나이이지만, 어쩐지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왜 도박에, 경마에 속절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 아버지에게는 의지할 가족이 없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상경하고 나서부터 시골집에 계신 부모님과는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고, 아내는 조금도 마음의 의지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너무 어렸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삶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는 시기에 그는 나의 어머니와 혼인신고도 하고 결혼식도 올렸지만, 도박, 경마에 빠지고, 따로 애인도 생겼다. 30대의 나이에 엄청난 부를 이룩했던 나의 아버지는, 승승장구하던 인생 한복판에서 그 부로도 해결할 수 없는 너무도 커다란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그 거대한 좌절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처절히 몰락하고 만다. 신도시가 지어질 때 제일 먼저 손가락으로 콕 집어서 샀다고 자랑을 했던 최고급 아파트도, 폼나게 타고 다니던 각진 그랜저도 없어졌다. 어머니와 관계 개선을 해보려고 등록해줬던 운전면허 학원에서 어머니는 강사와 바람을 피웠다. 본인의 바람은 지나가는 것이어도, 어머니의 바람은 용납하지 못했던 그는 한동안 그 배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훌쩍 집을 나갔다.


 내 아버지의 몰락은 한순간에, 너무도 급격하게 일어났다. 그는 하루아침에 신도시에서 거리를 거닐다 보면 모두가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해오던 유명인사에서,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거지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지난해소득 기준으로 책정된 의료보험비 고지서를 보고 경악했다. 뗏구정물이 흐르는 몰골로 구청에 가서 항의할 정도로. 내가 지금 돈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내란 말이오? 하고 항의해봤지만 그저 공허한 외침에 그칠 뿐이었다.


 아내는 이혼해서 나갔고, 집에 있는 짐들은 전부 빼서 이삿짐센터에 보관을 맡겼다. 어디 의탁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식들과 함께 떠돌아다닐 순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누나의 집에 보냈다. 일전에 친구의 코를 부러뜨리고 서울로 상경했을 때, 자신을 돌봐주었던 그 누나였다. 딸은 8살로, 어느 정도 컸으니 대충 맡겨도 괜찮았다. 다만 아직 3살인 아들은 아직 아프고, 누군가가 병수발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소정의 생활비를 어떻게든 마련해서 지불하는 걸로 하고, 한 때 우리 집의 가정부였던 아주머니에게 아들을 맡겼다. 그 아주머니가 아들을 유독 안쓰러워하고 예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내 아버지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가족을 잃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날이 춥지 않으면 역 앞 벤치에서 노숙을 했다. 때로는 도박도 했다. 조직 생활 시절에 알고 지냈던 후배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주기도 하고, 변변찮지만 일자리를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경마장에 갔다. 머릿속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딸과 아들의 모습이, 번듯하게 있던 집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대박'이 터져준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인복이 있는 편이라, 그럭저럭 굶어 죽지는 않았고, 한두 달에 한 번씩 밖에서 만나는 딸에게 생활비를 건네줄 정도로는 벌었다. 예전에 자신이 돌봐줬던 후배들과 입장이 바뀐 것은 아버지 자존심에 무척 상처를 주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가끔가다 만나는 딸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은 다행이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머니 사정이 항상 넉넉했던 것은 아니어서, 딸을 만나는 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딸이 너무 보고 싶었고, 만날 때마다 쑥쑥 커져 있는 딸의 모습을 보며 중요한 시기를 함께 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왠지 딸을 만나기만 하면 자신이 일주일간 써야 할 생활비까지 몽땅 용돈으로 털어 건네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들을 맡아 준 아주머니에게도 매달 일정한 생활비를 부치기로 약속은 되어 있었지만 그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가족이 헤어졌던 초반 3년 정도는 평소 가족이 떨어져 지내다가도, 동생의 생일만큼은 세 식구가 모여서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동생의 생일에도 아주머니 네에 동생을 보러 가지 않았다. 도저히 아주머니에게 밀린 생활비를 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동생을 찾지 않았던 그 어느 생일.


"아빠가 날 버렸어."


  남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한참을 울었고, 그 다음 해부터는 생일이 되어도 더 이상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고 느낀 것은 어느 날이었다. 속이 꽉 굳는 느낌이 들었다. 소화도 안되고, 변이 나오지도 않았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지만, 소화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별로 도움 안 되는 의사 소견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런저런 병원을 다녀보고 몸에 좋다는 것을 어려운 형편에 나름 찾아 먹기도 했지만 증상에 차도가 없던 어느 날. 누군가가 '신경 정신과에 한번 가보세요'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자마자, 다시 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화기와 정신이 연동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정신과는 정말 미친 사람들만 가는 거라고, 평생 정신과에 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만 것이다.


 몸이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이렇게 한 순간에 변해버릴 수 있는 건가.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정신과 약에 의존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지만, 죽으려 해도.. 좀처럼 죽을 수가 없더란 말이다. 자꾸 눈앞에 딸과, 본인도 어려운 형편에 자신의 딸을 군말 없이 맡아 키워주고 있는 누나, 그리고 아직도 병원 치료가 필요하며, 아마도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장애가 있는 아들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어떻게 죽겠나. 그리고 독하게 마음먹고, 경마장에 발걸음을 끊은 그 순간이 통째로 방황하기만 했던 40대의 아버지의 삶에 있어서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이후로 아버지는 예전 동료들, 그리고 누나 등 친척들로부터 자금을 조금씩 모았다. 도박이나 경마는 '한 방'을 노리는 것이지만, 본인의 천직인 사업이라면 정말 큰 맘을 먹고 다시 한번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했던 경험을 살려 이것저것에 도전해 보았다. 오락실도 해보고, 스크린 경마장도 열어보고, 식당에서 일을 배워와서 식당도 차려봤다. 그 과정에서 이후 15년의 인생을 함께 한 여자친구도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인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아버지는 나를 줄곧 돌봐주었던, 그리고 자신을 돌봐주었던 누나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딸은 비교적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잘 컸다. 딸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없었다는, 가족과 함께 했던 과거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은 한편에 묻어둔 채 그는 오로지 일에 매달렸다. 일에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하루라도 빨리 '우리 가족'의 버젓한 집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인생 후반부의 미션이 되었다.


 다만, 그러는 도중에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의 예상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만만치 않았을 뿐.


 딸은 그나마 나았다. 가끔씩 봤었으니까. 눈치도 있고 영리한 딸은 알아서 공부했고, 알아서 대학까지 나왔다. 제 엄마를 닮아 좀 까칠하고 정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고모네 집에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식구들과 어울려 컸으니까. 그렇지만 아들이, 아들이 문제였다. 아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지 거의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이 진짜로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으로 도전했던 사업이 드디어 안정적인 성공 궤도에 접어들었을 때. 18년에 걸친 방황을 끝내고, 어느덧 50대 중반의 나이가 된 그는 이제는 아들을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마침, '제 살길 찾겠다'라고 훌쩍 해외로 떠났던 딸이 막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참으로 어색한 재회였다. 세 사람은 가족이었지만, 18년의 시간을 떨어져 있던 세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일반적인 '가족'이 서로에게 가지는 그것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세 사람이 함께 살기를 바라며 이를 악물고 재기에 노력했던 20여 년 간의 시간은 다 무엇이었던 걸까? 이 세 사람이 한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것은 이미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대학에 들어가며 일찌감치 독립한 딸은 이미 혼자만의 삶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고, 가정부의 집에 맡겨졌던 아들은 가정부를 '엄마'라고 알고 컸다. 애초에 그는 그 여자와 손조차 잡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동안 자식을 대신 맡아서 키워줬던 은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보은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세월의 빚을 다 청산하고 나니, 어느덧 60대가 훌쩍 다가와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지독한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완전히 되찾고 싶었던 '가족'의 형태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도 되찾을 수도 없었다. 30년 전 도망치듯 허겁지겁 집을 빠져나오며 대충 이삿짐센터에 맡겨두었던 짐을 이제 와서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것처럼.


 그렇게 그가 인생을 다시 찾았을 땐, 이미 그의 아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의 인생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갔다. 어긋난 가족의 형태였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는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가족'의 형태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지난 세월, 혼자서 척박한 삶을 버텨가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가족에 대한 절실함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50대의 나이에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사업 구조를 만들어둔 그가 다음으로 주력했던 것은 가족들과의 관계 회복이었다. 아들, 딸과는 여전히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달에 2,3번은 만나서 같이 식사를 했다. 비록 외식이긴 하지만, 주기적이고 안정적으로 가족과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것,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나의 아버지는 진심으로 만족했다.


 시간을 내어 친척들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급기야는 사업이 망한 이후로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던 고향집에도 자식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실 무렵,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 시골에 내려갔던 밤을 기억한다. 할아버지와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했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직 어렸던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날 밤, 아버지가 어릴 때 다니던 학교의 운동장의 그네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기나긴 갈등의 역사를 속성으로 들었다. 그래도, 내가 느끼기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로부터 많이 맞기도 했고, 자꾸 바람피우며 매번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나쁜 남자였는데도 말이다. 아마아버지가 나에게 바랐던 사랑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에 와서는 생각한다. 본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나 또한 인생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게 했던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사랑해주길 바랐고, 혹시 그 날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내게 그것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아버지는 그때부터 늘 본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60세의 나이에 가족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굳이 고집을 부려 이른 영정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 아버지는 내게 영상 편지도 자주 남겼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얼마나 보고 싶을지 모를 거라면서 굳이 최고급 품질의 카메라를 사들여 1080p가 넘는 고화질 영상을 찍곤 했다.


 그는 왠지 자꾸만 조급해졌다. 지난 18년의 세월 동안 사라져 버린 아이들이 못내 안타까웠다. 지금은 어느 정도 돈을 벌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부모로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던 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자식들만 보면 귀에 딱지가 얹도록 잔소리를 하게 됐다. 한 번 시작하면 한, 두 시간은 기본이었다. 지난 18년어치의 자녀 교육을 속성으로 처리하고 싶었다. 눈치가 빠른 딸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잔소리가 시작되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묵묵히 그 자리에 앉아 귀담아 들었다.


 아버지는 딸의 인생이 안타까웠다. 어릴 땐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눈칫밥을 먹고 컸으며, 혼자 있어 버릇해서 좀처럼 남에게 정을 나눠주지 못하는 딸의 모습이 답답했다. 가끔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인생에서 가급적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악연이었던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딸은 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딸을 미워할 순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사랑했으니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들의 존재였다. 커가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아들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그가 떠난 다음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딸이 앞으로 져야 할 인생의 무게가 고단하게 느껴져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노력했다. 친척과의 교류를 더 활발하게 하려고.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이 떠난 후에 세상에 남겨질 딸이 감당해야 할 부담을 동년배의 사촌들과 조금 나눌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자신이 힘들 때 누나를 찾아갔듯이, 독불장군 같은 딸에게도 힘들 때 매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딸은 그런 아버지의 노력을 불편해했다. 친척들과 만나는 자리를 자꾸 회피하고 삐딱하게 굴었다. '나는 그 집 식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딸을 볼 때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지내는 날 구석에서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딸의 모습이 그는 너무도 답답했다. 이게 다 저를 위해서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나중에 하나뿐인 딸이 집안의 기둥 같았던 큰 형님의 아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무척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가 충격을 받을까 봐 오래오래 참아왔고 죽을 때까지 묻어두려고 했지만, 그 사람과 만큼은 절대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형제처럼 지낼 수 없다'며 오열하는 딸 앞에서 아버지는 애써 덤덤한 척했지만, 이후 딸이 자기 집으로 돌아간 뒤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식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으레 부모는 자기 자신을 탓하기 마련이니까. 나의 아버지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결국 평범한 부모였을 뿐이고.


 결국은, 내가 아이 옆에 있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딸 옆에 계속 붙어 있었다면,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딸은 그 문제에 있어 결코 아버지를 탓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후 혼자 형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이후 그는 형과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이제 인생의 완연한 후반기를 맞은 그는 여전히 사업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여전히 나는 아버지와 동거하지 않고 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남동생은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히다 결국 어딘가로 훌쩍 떠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며 울던 아이는 이제 다 커서 그렇게 스스로 아버지를 버리고, 누나인 나와도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그의 인생의 거의 전부이다. 사실 이 이후로도 이야기들이 좀 더 있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적는 것으로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가정환경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나의 아버지가 평범한  회사원이면 어땠을까, 매일 저녁이면 퇴근하자마자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주말에는 평범하게 여가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달이 지구의 궤도를 따라 돌듯 그렇게 한해 한해 주기적으로 돌아가는 안정적이고 조금은 심심한 삶에 대한 동경.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매운맛'이었던 아버지의 삶을 보며,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토록 흥미진진한 인생이라니!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매 순간마다 충실하게 변화해왔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내가 마치 영화 <빅 피쉬> 속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영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UP> 시리즈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다. 각각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14명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7년 주기로 그들을 인터뷰하며 삶의 변화를 관찰 및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7살이었던 그들은 어느덧 60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 속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에 그러하리라고 어느 정도 예견되는 삶을 살아가고,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부터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성장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실제의 삶을 실제 인생의 타임라인으로 관찰하는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7년 주기로 방영될 때마다 영국에서 큰 화제를 일으켰다. <UP> 시리즈 속 주인공들이 각 매체에서, 그리고 영국인들에게 회자되는 상황을 보면 마치 <트루먼 쇼>나 <보이후드> 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입에 가장 오르내리는 화제의 인물은 단연 '닐'이다.

 


 7살의 나이에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던 그의 인생은 다른 출연자들의 인생에 비해 무척이나 변화무쌍했다. 21살의 나이에 이미 가출해서 주택을 무단 점거하며 공사장 막노동을 하며 지내고, 그렇게 20대를 지나 30대 초중반까지 그는 히치하이킹을 하며 전국을 떠도는 부랑자로 살아간다. 35세의 닐에게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7년 후의 당신은 뭘 하고 있을 것 같아요?'라고 질문한다. 그 질문에 닐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중요한 건,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을까죠."




 '아마도 노숙자로 방황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고 운이 좋으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의 프리한 대답에 당시 시청자들은 닐을 무척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7년 뒤, 그가 버젓한 차림으로 지방의회에 나타났을 때  나타났을 때 시청자들이 받았을 충격은 매우 강해서, 오히려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저는 책임지는 자리엔 적합하지 않아요'라던 반항기 넘치는 소년이 인생 중반에 이르러 지방의회 의원이 된 것이다! 그의 삶은 한번 더 반전을 거듭하여, 63세의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종교에 귀의한 평신도 사역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적 구원을 전하고 있었다. '내가 살면서 본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다'라던 20대의 그가, 60대에는 본인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UP> 시리즈의 많은 애청자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로 '닐'을 꼽으며, 롤러코스터같던 그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진행되는 모든 변화가 충격적이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가장 '인생'에 충만했던 삶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충만했던 삶이란 무엇일까. 그저 단순히 그가 이런저런 삶의 다양성을 경험해봤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의 삶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의 삶이 충실하게 보였던 이유는, 결국 닐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명확히 관철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노숙 생활을 하며 방황했던 스스로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방의회 의원이 되고 종교에 귀의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언제나 그 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충실히 시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과거의 방황조차. 그는 자신이 원했던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떻게든 밀고 나가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렇게, 닐은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그것도 매우 충실하게. 어쩌면 소설 같은 인생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의 인생은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이기에, 심지어 한 번뿐인 인생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닐에게서 나의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나의 아버지 또한 나름대로는 그토록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7살의, 14살의, 28살의, 34살의, 49살의 나의 아버지가 꿈꿨던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64세의 나이에 그가 꾸는 꿈은 무엇일까. 결국 생의 마지막에 있어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인생은 소설이 된다. 오늘 하루도 모험하지 않고 공상만 하는 나는 오늘도 그저 상상하고, 또 상상할 뿐이다. 이런 나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소설이 될까.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지만, 그 인생을 충실하게, 제대로 살아낸다면 기회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진정한 'YOLO'란 뒷문장까지 함께 봐야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


1.

이 글의 제목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타이틀이다. 또한 본문은 내가 무척 사랑하는 소설 <스토너>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각각의 도서들의 제목과 요소를 차용하여 나만의 글을 쓴 것이지만,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해당 도서들과 하등 상관이 없다. 혹시라도 해당 도서의 리뷰를 기대하고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본의 아니게 낚게 된 셈으로, 미리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그래도 이와 별개로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과 <스토너>에 대해서는 언젠가 글로 다루려고 한다. 단지 그 책들이 품고 있는 문장들을 내가 너무도 사랑하기에 함부로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어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 엘레나 페란테 / 한길사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845844


스토너 / 존 윌리엄스 / 알에이치코리아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600367



2.

 오늘 일과 중에 이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몇 년 전 아버지에 대해 썼던 브런치 글의 조회수 알림이 푸시로 도착했다. 글 번호가  2번인 것을 보아, 아마도 내가 브런치를 개설한 후 정식으로는 거의 최초로 썼던 글 같다. 이렇게 삶의 어떤 순간들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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