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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Nov 22. 2020

콜럼버스의 달걀과 <소멸세계>

사유리의 선택,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


 일주일 만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남편도, 애인도 없이 혼자 아이를 낳은 한 여자의 말에 세상은 한 주 내내 시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급하게 찾아서 결혼하는 건 어려웠어요."


"'낙태를 인정하라'를 거꾸로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 것을 인정해라' 이렇게 하고 싶어요. 낙태하라 만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 것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마치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이 이랬을까. 사방에서 '가부장제의 파괴'라느니, 뭔가 큰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호들갑을 떨어대는 와중에, 내 머릿속에는 문득 일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는 왜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날 임신했어?"






 무라타 사야카는 <편의점 인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내게 있어 '무라타 사야카' 하면 가장 떠오르는 첫 번째 소설은 바로 <소멸세계> 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58678



  이 소설은 현대 일본의 평행 세계 어딘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쪽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인간의 성욕과 종족의 번식을 위한 가족 결성 행위를 철저히 별개의 성격을 지닌 행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무라타 사야카가 창조한 <소멸세계> 속의 사람들은 이쪽 세계의 사람들처럼 사랑을 하는 상대와 섹스를 하고, 그 동일한 상대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이루고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 세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남녀 사이의 '결혼'이란 철저히 성욕이 배제된 채, 부모님이나 남동생, 여동생과 같은 새로운 가족을 취득하기 위한 가족 구성 행위일 뿐이다. 물론 결혼을 한다는 것에 '종족 번식'의 목적은 있다. 그들은 잘 맞는 가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상대를 골라, 결혼을 하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서로의 정자와 난자로 인공 수정을 통해 아이를 갖는다. 부부라면 아이를 갖기 위해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되고, 애초에 '가족'으로 만난 사이이므로 부부끼리 섹스를 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 불리며 경원시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마네 또한, 전남편이 자신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에 혐오감을 느껴 (어떻게 가족한테 욕정을 느낄 수가 있어?) 경찰에 신고 후 이혼한다.


 대신, <소멸세계>에서는 부부 사이가 아닌 다른 관계에서 사랑과 성욕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취급된다. 주말이면 부부는 각자 애인과 데이트를 하러 나간다. 놀라운 것은, 이 애인이라는 존재가 꼭 '인간'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캐릭터나 소설 속 캐릭터도 '애인'이 될 수 있다. (주인공 아마네는 열쇠고리로 만들어진 캐릭터와 '데이트'를 한다. 그녀가 항상 들고 다니는 프라다 파우치 속에는 그녀를 언제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40명의 '연인'이 소중히 들어있다.) 부부는 서로의 애인을 만나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연애사를 재밌어하며 들어주기도 한다. '당신이 멋진 연애를 해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언제쯤 이 사람과 아이를 가질지 생각한다. 저녁때 집에 돌아오면 서로 같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생각한다. '역시 집이 좋아. 집에서는 사랑 따윈 하지 않고 편히 쉴 수 있잖아.'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섹스를 즐기지 않는다. 섹스는 '교미'라는 말로 폄하되어 불리며, 마치 진화가 덜 된 사람들이나 즐기는 과거의 유물 같은 행위로 치부된다. 자식을 낳기 위해서 의무적으로라도 섹스를 해야 했던 예전 사람들과 달리 <소멸세계> 속 사람들에게는 성욕은 귀찮으며,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고, 정기적인 마스터베이션이나 연인과의 관계로 집 밖에서 처리해야 하는 귀찮은 욕구일 뿐이다.


 문제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아마네는 이 세계에서 당연시되는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네는 <소멸세계>가 지금의 형태를 띠기 전의 과도기에, 부부간의 섹스를 통해 태어난 '일반적이지 않은' 출생 히스토리를 가진 아이이다. 마치 영화 <가타카>의 빈센트처럼 말이다. (그 또한 유전자를 최고의 조합으로 사전 조작하여 만들어지는 아이들이 대부분인 세계관에서, 자연적인 임신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살아있는 내내 동일한 세계관 속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간다.)


 아마네가 자신의 출생이 '일반적이지 않다'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다. 부부끼리 사랑을 하는 것도, 섹스를 하는 것도 이상한 취급을 받는다. 제 주변에 자신처럼 태어난 친구들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마네는 그 사실에 수치심과 불만을 느낀다. 급기야는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엄마는 왜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나를 임신했어?"



 아마네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내가 널 낳은 건.... 사랑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어.
태어났을 때부터 이 세상은 미쳐 돌아갔어.
나만은 정상이고 싶었지."



 평범하지 않은, 즉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소설 내내 아마네를 괴롭히는 그녀의 콤플렉스로 작용한다. 아마네는 자신이 아마도 이 세상의 마지막 이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공수정이 아닌 남녀 간의 섹스를 통해 자신의 출생이 이루어졌던 순간, 이미 자신의 안에 어머니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저주를 걸어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섹스가 사라져 가는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섹스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기에 주인공 아마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정상적인' 게 무엇인지 의문을 던진다.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만큼은 '정상'이어야 한다고.


"세상의 상식과 부합하든 하지 않든 그건 우연에 불과하고, 다음 순간에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어지는 거지."


"우리는 진화의 순간을 살아가는 거야. 언제나 그 길을 가는 '도중'이라고."


 그러나, 아마네의 어머니는 '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아마네를 임신하고 낳아 그녀의 일생의 번뇌를 제공한 장본인이면서도, 그녀는 아마네만큼 정상과 비정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는다. 아마네는 그런 어머니 때문에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혼란스럽다.  급기야 자신에게 자꾸 이 세상에서 '정상'이 아닌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면서까지 그녀는 이렇게 절규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광기가 뭔 줄 알아? 바로 정상이라는 거야."


"엄마, 나 무서워. 어디를 가도 그놈의 '정상'이 계속 쫓아오잖아. 난 그냥 비정상으로 살고 싶은데, 어디를 가도 쫓아와서 어떤 세상에 있어도 나는 정상일 밖에 없어."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남성 해방 대작전>와 같이, 남성과 여성 간의 성 역할을 반전시킨 콘텐츠는 몇 번 봤었지만, 결혼과 성욕,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정면으로 반전시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라타 사야카는 <소멸세계>에서 인간을 '세상을 먹고 그 세상에 딱 맞는 형태로 변화하는 동물'이라고 표현한다. 세상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이 소설을 읽으며, 나 또한 나는 내가 그렇게 세상을 먹고 자란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태까지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던 개념들 -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가정을 갖고 아이를 갖는 것 - 등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살아오는 동안 그런 개념들을 내게 먹여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 인간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사실, 인간은 그 세상보다 훨씬 유연하고 넓은 존재가 아닐까? <소멸세계>의 아마네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본인이 비정상적인 출생으로 태어났음에도, 어떤 삶 속에서도 정상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멸세계> 속 세계관에 딱 맞는 모습의 자신으로서도, 그 세계에서 만들어 낸 실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도,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나누지 않는 섹스를 마지막까지 갈구하면서도, 어떤 삶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이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인간의 삶의 모습에는 정답이 없다는, 그 막연함과 막막함 때문에.





 지난주 언론을 도배한 사유리 씨의 비혼 출산 기사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그러한 <소멸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for-sayuri_kr_5fb2f749c5b6f79d601a1a4c



 사유리 씨의 선택과 그로 인해 촉발된 논쟁, 무수히 쏟아지는 날 서거나 다정한 의견들을 보며 <소멸세계>를 떠올린 것이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를 묻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소멸세계> 에서, 고등학생이었던 아마네는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 이 세계의 평행세계를 상상해본 적 있어요? 인공수정이 이렇게까지 발달하지 않았다면, 모두 아직 교미를 하고 있었을까요?"


"마지못해 그랬겠지. 번식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원시적인 방법으로 교미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류는 진화했는데."



 사유리 씨의 선택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지만, 변화해 가는 세상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미래의 사람들은 왜 우리가 그렇게 그녀의 선택에 호들갑을 떨어댔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동안 테이블 위에 달걀을 어떻게 세울지 고민해왔다. 출산율은 0명 대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혼인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별다른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시대의 변화로 인한 당연한 흐름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로, 기존의 제도와 시스템을 고스란히 유지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출산율을 끌어올리려 괴랄한 정책들 (ex. 가임기 여성 지도라던지..)만 내놓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보면,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은 수요는 다른 곳에도 있다. 동성 부부일 수도 있고, 싱글 맘이나 싱글 파파일 수도 있다. 사유리 씨는 그런 사람들에게, 달걀을 세워야 한다면 달걀 껍데기를 깨서 세울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존재가 되어준 것이다.


 여자 연예인 한 명이 혼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세상이 바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선택지도 있어'라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녀의 용기는 충분히 의미 있다.  


 그럼에도 불편함을 느끼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순 있다. 그런 것도 세상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기존의 가부장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나 또한 이 세상을 먹고 자란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소멸세계> 에서도, 세상의 급진적인 변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어머니에게 딸 아마네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아?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든 어떤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끼기 마련이고, 그 비율은 항상 일정할 거야."


"변화하는 우리를 따라 세상도 그 모습을 바꾸고 있어. 그뿐이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아니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도중에 있는 존재들일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새롭게 다가오는 이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사유리 씨가 새로운 선택의 폭을 용기 내어 넓혀준 것에 감사하며,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삶 또한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애한테는 아빠가 있어야지' 하고 오지랖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애미 없는 자식'이었던 내가 감히 한 마디 하고 싶다.


 나는 8살까지 엄마와 살았지만,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우울했던 시간이었다. 엄마는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는 이유로 낳자마자 딸을 내팽개쳤고, 아빠는 갓난아기였던 나를 안고 젖을 먹이며 일을 다녀야 했다. 늘 나만 보면 '꼴도 보기 싫다, 날 귀찮게 하지 말라'라고 하던 엄마 밑에서 8년을 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처음으로 그녀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세상에 어떤 엄마는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얼떨결에 자식을 낳긴 했지만 그다지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도 종종 있다. 나는 마치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준 어머니가 없는 것처럼, 오로지 아빠의 사랑으로만 컸다. 만약에 아빠도 요즘 시대의 30대로서 선택할 수 있었다면, 미혼부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아직 어렸던 나이지만, 이혼 과정에서 괴로워하는 아빠의 모습은 30대가 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연히 남아있다. 그 고통은 아빠 인생에 짙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나를 낳고 그냥 바로 아빠를 떠나 주었던 것이, 단지 덜컥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억지로 결혼했다가 힘들게 이혼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릴 땐 편부 가정이었던 것이 부끄러워 숨겼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길을 가다 넘어져도 무심코 '엄마'가 아닌 '아빠'를 찾는 나를 보며, 아마도 눈치 빠른 어른들이나 주위 친구들은 내가 엄마가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빠는 나를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해주었지만, 단지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주눅 들었던 것은, 그것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고 필사적이었던 어린 시절은 내 마음속에 아직도 조금 그늘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그늘이 나의 부모님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이혼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주체적이고 밝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음에 맞지 않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정상적인 가족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분이 계속 함께 살았어야 했다면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어둡고 우울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누구도 나를 보며 직접적으로 '애미 없는 년'이라며 면전에서 비아냥 거린 사람은 없었다. 나의 아빠는 한 명이었지만, 아빠 혼자서 내게 두 명 분의, 아니 그보다 넘치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름 잘 컸다고 생각한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았으며, 내 밥벌이를 하고, 취미도 즐기는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잘 컸다.


 언젠가 한 번은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네 어머니는 너를 어떻게 키우셨니? 내 자식도 너처럼 키우고 싶어서 그래."


 "아, 저는 어머니가 없는데요."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만약 내가 한창 성장할 때, 한부모 가정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 조금은 덜했더라면, 나 또한 조금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날 이때껏 살아오면서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상처를 준 것은 이혼을 한 나의 아빠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편견이었다. 그러니 사유리 씨가 낳은 아이에게 '아이에겐 아빠가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는, 진심으로 그런 걱정은 넣어둬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정말로 걱정이 된다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된 세상의 수많은 '비정상 가족'들에 대한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 주시면 된다. 이미 걱정이 가득하신 만큼 꼭 가장 최전선에서 노력해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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