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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Nov 27. 2020

제 부모가 홀수입니다만

누군가의 무례함에 우아하게 답변할 수 있다면.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것이 궁금해졌던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나는 내 윗집이나 옆집, 아랫집에 사는 사람들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 2년짜리 전세 세입자였고, 1인 가구였으며, 평소에 집에서 그다지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사회생활도, 꼬박꼬박 나가던 운동도 할 수 없게 된 난 어쩔 수 없이 집에 콕 틀어박히게 되었다. 그런 시국에, 설상가상으로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임대차 3법 여파가 경기도 변두리에 있는 이 쪽 동네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급기야 나는 영끌을 해서 내가 살던 집을 덜컥 매수하고 말았다. (브런치 이전 글 : <얼떨결에 내 집 마련> 참고)


 그렇게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갇힌 집주인이 된 나는 비로소 나의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니,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집에 갇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집에 갇힌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쿵쿵 거리는 소리였다. 천장에서 자꾸만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사뿐사뿐 살살 걸어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나와 위아래로 서로의 천장과 바닥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에게는 그런 배려심은 없는 것 같았다. 때로는 쿵쿵, 때로는 콩콩거리며 들려오는 소리는 한 번씩 들려올 때마다 요란했다. 마치 사람 크기만 한 야행성 고양이가 우다다를 하며 밤새 돌아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소리가 들려올 때 천장을 쳐다보면 그 사람의 위치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때로는 그 소리가 안방에서 거실, 거실에서 화장실 쪽으로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머릿속으로 누군지 모를 내 이웃의 동선을 집 구조를 따라 그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귀에 들리기 시작하자, 그 소리는 계속해서 거슬렸다. 원격근무를 하는 한낮, 저녁을 먹고 쉬는 저녁 타임은 기본이고 새벽 2시가 넘어서까지 내내 머리 위에서 쿵쿵대는 소리를 듣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질 정도였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층간소음이 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군가 새로 이사를 온 것인가? 그렇다면 더욱 절망적이었다.


 임대차 3법으로 인해 내가 사는 집은 집값이 나날이 오르고 있었고, 매물은 한주 한주가 지날 때마다 절반으로 뚝뚝 떨어지며 급속도로 잠기고 있었다. 이런 비상시국에, 정말 윗집에 누가 새로 이사 온 것이 맞다면... '똘똘한 한채'를 찾아 실거주를 하러 온 집주인이라면 당분간 이사 나갈 일이 없을 것이고, 운 좋게 전세를 얻어 들어온 전세 세입자라면 2년 뒤에 갱신 청구권을 행사할 테니  꼼짝없이 4년은 위아래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니겠나. (솔직히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윗집에 누가 이사 온 게 맞는지, 전세인지 자가인지 궁금해서 비슷한 시기에 호갱노노에 매매/전세 거래 신고된 내역을 대충 뒤져보기도 했다.)


 쉽게 이사를 가지 못하는 시대에, 아무래도 나의 윗집에는 엄청난 꾸러기 이웃이 입주한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앞으로 4년 간은 상황이 바뀔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Serenity Prayer에서 그러지 않는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평온을 구하라고.


 그래서 나는 그냥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틀어두고 게임을 하거나.. 그렇게 다른 것에 몰입을 하면서, 윗집에서 시끄럽게 굴 때마다 순간적으로 문득문득 올라올 것 같은 짜증을 내리눌렀다. 대신, 윗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늦게 자는 나도 나지만 대체 새벽 2시까지 우다다를 멈추지 않는 나의 이웃은 어떤 사람일지 가끔씩 진지하게 상상해보곤 했다.



'홈트하는 사람인가? 새벽 2시까지 에너지가 엄청나네. 낮과 밤이 바뀐 사람일까?'


'혹시 초등학생인가? 그러면 새벽 2시까지 잠을 안 자게 두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초등학생이면 차라리 좋겠다. 몇 년 뒤면 사춘기 될 거 아냐. 자고로 애들은 사춘기가 되면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는 법이니까 지금처럼 저렇게 방과 방 사이로 막 뛰어다니진 않을 거야.'


 '아니면 고등학생 정도 됐으려나? 나도 그땐 종종 늦게 잤으니까. 방에서 수능 공부를 하다가 야식을 먹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아예 사람이 아니고 대형견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동네에서 엄청 큰 차우차우를 본 것 같은데..'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윗집 꾸러기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는 천장 너머의 존재가 마냥 그렇게 '만악의 근원'같이 느껴지진 않았다.


 층간 소음이 아닌 이웃의 냄새가 나의 관심을 끌 때도 있었다. 나의 세탁실 창문과 붙어 있는 옆집 부엌 창문으로부터, 주말 점심이나 평일 저녁때 가끔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음식 냄새로 나는 그 날 그 날 옆집이 어떤 메뉴를 먹는지 알아채 버리곤 했다. 나의 이웃 입장에서는 알리고 싶지 않은 TMI였을 순 있으나, 그래도 나는 옆집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좋았다. 가끔씩 현관문 앞에서 뻘쭘하게 마주친 적 있었던 그분들은 50대쯤의 부부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음식 냄새를 통해 옆집의 메뉴와, 얼핏 스쳐 지나가면서 봤던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식탁의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아, 오늘은 제육볶음인가 보다. 뭔가 아저씨가 좋아하실 것 같네. 아, 저 집은 매일 다른 메뉴를 잘 챙겨 먹는구나.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정작 나는 먹지도 못하는 집밥을 먹는 그 이웃의 존재를 그렇게 냄새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 혼자 사는 집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나 외의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가끔씩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도 나는 나의 삶이 그렇게까지 적막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한 기사를 보았다. 층간 소음에 분노한 한 고3이 아파트 내에 경고문을 붙였는데, 그것이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https://m.news.nate.com/view/20201126n27333


 나도 최근 층간소음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기사의 타이틀만 봤을 땐 '고 3이니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으로 클릭했다. 그러나, 막상 기사 본문에 사진으로 함께 올라온 경고문의 내용을 보자마자 나는 무척 놀랐다.


 무례함이란 게 원래 그렇다. 깜빡이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와 일순간 정신을 놓게 만든다. 곧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이 썼다는 그 '층간소음 경고문'의 한 표현을 보고 나는 잠시 까무룩 해졌다.


"당장 내일부터는 네 부모 수가 홀수가 아닌 것을 증명하듯 그만 들렸으면 좋겠다."



'네 부모가 홀수'.


참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파괴적인 표현이었다. 알고 보니 이 표현은 인터넷 비속어로,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종종 쓰는 드립이라고 한다. (ex. "야, 네 부모 홀수냐?" )


 지난번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브런치 이전 글 : <콜럼버스의 달걀과 소멸세계> 참고) 나는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한부모 가정의 자녀로 살아왔다. 정말로 '부모가 홀수'인 사람인 것이다.


 지금은 괜찮지만, 만약 내가 저 글을 쓴 학생과 동년배의 나이거나 좀 더 어린 나이였다면 저 표현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필사적이었다. 내가 엄마가 없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엄마가 있는 척, 나를 키워주신 고모와의 에피소드를 엄마와의 에피소드인 것처럼 지어내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저 학생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내 부모의 수가 홀수가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왜 부모가 홀수인 것이 부끄러웠을까. 왜 내 부모가 홀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네 부모 홀수냐'는 질문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저런 사람들의 무례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솔직히 5,60대가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쟤가 애미 없이 자라서 그래"라고 하는 것까지는 괜찮다. 옛날 분들이고, 한부모 자녀가 별로 없던 시대에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내일모레 수능을 보는, 내 나이의 반토막 정도 되는 어린 학생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수능을 코앞에 두고 한창 예민할 때, 인테리어 공사로 인한 층간 소음으로 고통을 받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이렇게 무례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생각보다 부모 수가 홀수인 자녀들은 많다. 부모가 이혼을 했을 수도 있고, 사별을 했을 수도 있고, 혹은 미혼모일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기러기 가족이 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부모가 홀수가 아닌 짝수라도, 사회적으로 봤을 때 '스탠더드'한 기준에 속하지 않는 독특한 가족들도 있을 수 있다. 부모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재혼 가정이거나, 요즘은 폴리아모리 같은 다자연애나 공동 육아 개념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영구적인 상태가 아니다. 인간의 삶의 형태란 다양해서, 어떤 수치적인 개념으로 간략히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변화를 겪는다. '짝수'로 구성된 부모의 수만을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살다 보면 결국 언젠가 인간은 누구나 홀수의 부모를 갖게 될 때가 온다.


 저 경고문을 쓴 학생 또한 그럴 것이다. 본인은 지금 부모가 짝수인 정상 가족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런 표현을 혐오 발언으로 내뱉을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학생에게도 언젠가 '부모가 홀수'가 되는 날이 온다.


 그저 층간소음일 뿐인데,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조롱과 혐오의 대상으로 굳이 끌어들여서까지 글을 써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어야 하는 것일까. 정중하게, 당사자 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예의를 지켜서 말할 순 없었던 것인지. 그저 욱한 마음에 써 제껴 내린 글 속에 속속들이 박힌 무례함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그는 짐작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필사적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아이를 키우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유치원생만 되어도 내어주는 숙제들이나,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하라고 내준다는 주말용 과제들을 볼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힌다. 아빠 차종을 써오라는 둥, 엄마와 스케이트장에 다녀오라는 둥. 부모로서 그런 과제를 수행하느라 너무 힘들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동료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곤 한다.



"그럼 아빠나 엄마가 없는 애들은 그런 과제 어떻게 해요?"



 아직까지 그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해주는 동료를 보진 못했다. 우리 애가 다니는 유치원에, 초등학교에 그런 애가 있을 리가 없다는 듯 얼버무리는 그들을 보면 나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분명 없을 리가 없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소외되고 있을 거고, 거짓말로 과제를 작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나는 슬프다. 누군가가 아빠, 엄마와 수행한 그 주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부모가 홀수'인 걸 들킬까 봐 숨죽이고 있을 얼굴도 이름도 모를 그 아이를 떠올리면 그냥 마음이 참 많이 아프다.


 모르겠다. 비혼 임신으로 태어난 사유리 씨의 아들도 장차 이 나라에서 자라게 될지도 모를 일인데. '네 부모 홀수'라는 표현이 버젓이 비속어로 쓰이고 있는 나라에서, 그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이래저래 나의 입장에서는 정말 읽기 씁쓸했던 기사였지만, 그래도 마냥 씁쓸하지만은 않았다. 저 학생의 무례함에 대처하기 위해 입주민이 작성했다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글은 차분한 어조로, 고3이라는 시기가 일생일대의 중요한 시기인 것은 알겠으나 이것은 도를 넘은 행동이라며, 글을 쓴 학생이 문제와 대상을 지적하는 방식에 대해 차분하게 꾸짖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부분인데,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이 문제와 상관없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란다'라고 쓰여있었다. 글쓴이의 어조는 마지막 한 줄까지 예의 발랐으며, 차분하면서도 묵직했다.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온 경박한 무례함에 저토록 우아한 답변을 남길 수 있다니!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이는 글이든 무엇이든, 어찌 됐든 그저 눈살 한번 찌푸리고 무시해버리거나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을 무례함에 누군가는 저렇게 정중한 글로 답변을 남겨주었다. 어린 학생이 잘못을 깨우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학생의  앞날 위해 엄청난 친절을 베푼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학생도, 입주민도, 모두가 피해자이다. 학생 입장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해 독서실에 가지도 못했을 거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데, 인테리어 공사도 계속 진행되니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란 게, 정말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너무 힘든 시기라는 것을 나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입주민 또한 그런 학생의 심정을 잘 알고, 이해했기에, 학생의 무례함에 저런 친절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 기사를 보다 보니, 언젠가 드라마를 보다 주인공의 방에 붙어 있는 것이 인상 깊어서 따로 저장해 둔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난 김에 나도 이 문구를 출력하여, 현관문 안쪽에 붙여놓았다.


 이 시국, 세상 가장 안전한 집 밖을 벗어나 밖으로 나섰을 때 마주치게 될 수많은 일들 앞에서 조금은 더 다정하고, 친절해질 수 있도록.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그것을 눈에 새기며, 마음속에 격언처럼 상기시키며 마음을 다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제 기사에서 목격한 누군가의 친이  나로 하여금, 무례함 앞에 우아하게 친절을 건넬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고 싶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까지 때리라고 마저 내미는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제는 무작정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입장을 먼저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직 파악할 수 없는 층간 소음 꾸러기처럼, 결국은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일 테니.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알 수 없는 그들 자신만의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친절할 것.



앞으로 내가 외출할 때마다 꼭 상기해야 할 두 가지,




+


 수능을 앞두었다는 저 글의 작성 당사자인 고 3 수험생은 어쩌면 지금 상당히 당황스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욱해서 치기 어린 마음에 쓴 글이 기사화가 되고, 일이 커져서 괜스레 더욱 심란해지기만 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괜히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서 멘탈 수습하고 시험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리고 수능시험이 끝나면 라가와 마리오의 명작, <아기와 나>를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 만화의 주인공 형제의 부모가 홀수다. 부디 이 따뜻한 작품이 한부모 가정에 대한 학생의 편견을 깨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훈훈하고 따뜻한 홀수 가족♥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46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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