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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r 04. 2021

천사가 아닌 아이들

그들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넌 성선설을 믿어, 성악설을 믿어?"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도 도덕 혹은 윤리라는 과목을 배우는 과정에서, 막 저 단어를 습득하게 된 동급생들 사이에서 이 질문이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갓 태어난 아이의 마음이 선한가, 악한가를 논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우리들이 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무척이나 심오한 철학적 난제였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혹은 성무 선악설이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당시 우리가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날까지 살아왔었던 인생의 경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악설을 선택했다.







 그로부터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들'이 어린 시절의 내게 행했던 짓을 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도 없다. 어렸던 나를 가장 집요하고도 오랫동안 괴롭혔던 그 가해자 집단은 바로 나의 사촌들이기 때문이다. 


 내 유년기에서 가장 괴롭고 두려웠던 시기의 기억을 돌아보면, 그 안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두컴컴했던 내 책상의 밑이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나는 8살이 채 되지 않았던 나이였을 것이다. 나는 어두운 것을 싫어하고, 귀신 이야기라도 들으면 밤에 잘 때 무서워서 불을 끄고는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은 어린아이였다.


 언니들 - 나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 이 그 날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내 방에서 나와 함께 놀아줬을 때, 늘 혼자 방에 틀어 박혀 있어서 심심했던 나는 너무 신나고 기뻤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본인들 기분이 내킬 때면 나와 종종 놀아주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차가운 태도를 보이며 마치 그 자리에 내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무시하고 따돌리곤 했다. 아마도 같이 놀기엔 내가 너무 어리고 귀찮았던 탓인지, 대화에 끼워주지 않거나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고, 따돌리려는 행동을 취하곤 했다.


 언니들은 나를 지속적으로 무시하다, 내가 시무룩해져 눈물을 흘릴 것 같을 지경이 되어서야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나를 끼워주곤 했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나는 그런 언니들과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던 것 같다. 나의 어머니처럼, 나를 무시하고 내게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그들을 나는 무척이나 열망했다.


 그 날, 내가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사전에 작전을 짰는지 갑자기 내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놀아주지 않겠다는 언니들의 으름장에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겁에 질렸다.


 언니들이 내게 해 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공포 이야기 속 주인공의 나이도 나와 같았고, 사는 집의 동호수도 나와 같았다. 귀신은 주인공의 책상 밑에 산다고 했다. 주인공의 책상 밑에서, 주인공을 쳐다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건 '진짜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나서는, 순식간이었다. 책상 앞에 있던 바퀴 달린 의자가 뒤로 젖혀지고, 내 몸은 책상 밑의 작은 틈으로 몰아넣어졌다. 내 몸이 책상 밑 공간으로 파묻히자, 언니들은 다시 바퀴 의자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으며 내가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언니들은 낄낄대며 말했다.



"야, 위에 좀 봐봐."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언니들이 나를 좋아해 주지도 않을 것 같고, 나와 두 번 다시 놀아주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위를 쳐다본 순간,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책상 밑에 붙어 있는 눈알 두 개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는 울며 비명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의자를 붙잡고 몸부림을 쳤다. 의자의 맞은편에서, 의자가 뒤로 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은 채로 재밌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 높여 웃는 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부림을 치고 울고불고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책상으로부터 벗어나자, 언니들은 내게 말했다.



"그거 그냥 인형 눈알 뜯어서 붙여둔 거야. 재밌을 것 같아서."



 '진짜 귀신같지?'라며, 언니들은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을 재현하면서 자기들끼리 웃었다. 나는 숨을 쉭쉭 내쉬며, 내가 아끼던 인형의 눈알 두 개가 뜯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내겐 그 '장난'이 전혀 재밌지 않았다. 언니들은 이것이 재미있는 놀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엄마에게 이 일을 고자질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언니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그걸 계기로 또다시 따돌림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고모 댁에 맡겨져서 커야 했던 내 유년기는 어찌 보면 불행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이혼을 계기로 자신의 삶으로부터 만족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학대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했고,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를 마음으로 느끼며 자라났다. 학창 시절엔 좋은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가족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며 외로움을 덜 느끼고 컸다. 이혼 가정의 자녀였지만, 다행히 좋은 사람들 위주로 만나왔던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은 그럭저럭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거나 불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내 어린 시절에 그늘을 드리운 것은 친구도, 부모님도 아닌 바로 사촌지간인 '그들'이었다. 나중에 그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들이 어린 시절의 나를 무척 싫어했던 것은 맞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집이 망하기 전 잠깐 잘 살았을 때, 새 옷이나 비싸 보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집이 부자라고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여서 재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를 부쩍 더 챙겨서 그게 또 재수가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입장에서는 단지 엄마도 아빠도 없이 친척 집에 맡겨져서 크는 내가 안쓰러워서 말이라도 한마디 더 걸어주시고, 한 번이라도 더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어주신 것이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문제는, 그들과 내가 '가족'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설과 추석 명절 때마다 친척 집에서, 혹은 시골 할머니 집에서 서로의 얼굴을 봐야 했다. 나는 그들과 만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좋았다. 당시의 내 심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나를 제외하고서는 똘똘 뭉치는 그들만의 스쿼드에 나 또한 편입되고 싶어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안간힘을 썼었으니까.


 그들의 괴롭힘은 주로 어른들이 바쁜 틈을 타, 집 마당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사랑방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꾸 그들만의 '그룹'을 만들었다면서, 막내인 내가 그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그건 때로는 어린 내가 도저히 맞힐 수 없는 본인들끼리 미리 지정해둔 암호이기도 했고, 책이나 TV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봤던 것이기도 했다.


 그 사랑방에서의 날들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 하루는 그들이 내 양 손목을 노끈으로 빈틈없이 꽁꽁 묶고는 분무기와 세숫대야를 두고 나보고 알아서 손목의 노끈을 풀어보라고 한 날이다. 내가 세숫대야에 받아둔 물에 노끈을 불려보려고도 하고, 발버둥을 치며 갖은 애를 쓰는 동안 그들은 내 주변에 빙 둘러서서 나의 묶인 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낑낑거리는 걸 재밌다고 지켜봤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나는 그들 앞에서 왜 그렇게까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필사적이었던가에 대하여. 왜 그런 가치 없는 자들의 인정을 목말라하며 나 스스로에게 그런 굴욕을 선사했던 것일까.


 눈이 무릎까지 왔던 어떤 날도 있었다. 그들은 내게 '잘 버티면 우리 그룹에 가입시켜 줄게'라고 하면서 나를 어떤 외딴 학교 운동장의 눈밭 속에 묻어놓고 그들끼리만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거기서 눈을 맞으며 한두 시간을 서 있었고, 결국 동상에 걸리기 직전, 혼자서만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나온 집안 어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날, 온몸이 얼어서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가자 그 자리에 잇던 사촌들은 내 몰골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들도 그들에게 왜 그랬냐는 추궁은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아이들 중에 나에게만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 현장에서 나를 지켜주고, 얼어붙은 나를 돌봐주고, 나의 서러운 마음을 대신해 나쁜 언니들을 혼내줄 부모님이 내게만 없다는 것을. 단지 그 자리에는, '아이들끼리의 단순한 장난'이라며 자신의 자식의 잘못을 은근슬쩍 넘기려 하는 가해자들의 부모만 있었다는 것을. 그런 자리에서, 가족이지만, 가족이기에, 더 이상 내가 그들로부터 입은 상처를 드러낼 수 없도록 하는 무언의 압박이 그 날, 그 집안의 공기에 서려 있었던 것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들의 괴롭힘은 끝났다. 아마도 그들 또한 각자 사춘기를 지나며 서로 덜 교류하게 되고,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입시 문제 등 다른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나를 괴롭히는 데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은 그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고, 배척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몇 년 새 우리의 사이가 놀랍도록 좋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 사이가 좋았던 그 와중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그들의 - 그중에서도 주동자의 -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밉보이게 되면 끝장이라고, 그 괴롭힘을 또 당하고 싶지는 않다고, 언니가 내게 호의를 보이는 이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심리일 순 있으나, 나는 언니가 나를 괴롭힐수록 언니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언니가 나에게 잔혹하고 못되게 굴수록, 나는 더욱더 언니가 이렇게 난폭하게 굴지 않는 언니의 '경계 안'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필사적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몇 년 정도를 지내고, 내가 대학을 가고 그들이 사회인이 되면서부터는 가끔씩 교류를 하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 입장에서도 우리들이 각자 형제자매가 적다 보니, 서로 친형제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을 계속 어필하기도 하셨기에. 우리는 주기적으로 만났고, 실제로 꽤 사이가 좋았던 시기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시기 내내 나는 진심으로 그 상황을 즐거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내게 아무리 친절하게 대한다 해도 나는 그들을 마음 놓고 대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도 그들이 조금이라도 내게서 맘에 안 드는 부분을 찾아낼 것 같고, 내가 자칫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겨우 받아들여진 그들의 무리에서 순식간에 나를 차갑게 떨궈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욱 혼란스러웠던 것은, 알게 모르게 내가 진심으로 그들의 스쿼드에 끼어들고 싶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에 너무도 대단해 보였고, 저렇게 되고 싶었고, 동경했던 사촌언니들은 사실 다 큰 어른인 내가 보기엔 별 게 아니었다. 단지 그때 어렸던 나의 세계는 너무도 좁았고, 언니들은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어른이었던 탓이다. 어린 시절에 나를 위압적으로 괴롭혔던 그들을, 막상 사회에 나와서 '사회인'으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두고 보자 사실, 내가 그렇게까지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복달할 필요도 없는 인간들이었다는 사실만을 깨닫자 왠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다.


 내가 진심으로 즐거워할 수 없었던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어린 시절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의 차이 때문이었다. 나를 괴롭힌 그들은 어린 시절에 나를 괴롭힌 것을 '괴롭혔다'는 행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냥 심심해서 벌인 재미있는 놀이였을 뿐이고, 심지어 그들에게는 나를 괴롭혔던 구체적인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어린 시절은 그저 재미있는 추억들로만 가득했을 뿐, 그 속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그들에게 매달렸던 어린 내 모습은 마치 논란을 일으켜 방송에서 편집된 배우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선택적 기억력이란 게 대단하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용기를 내서 당사자 중 하나에게 이렇게 물어봤던 적이 있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그리고 난 단 한 번도 이 질문에 대한 성의 있는 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도.


"내가 그랬었어? 전혀 기억 안 나는데?"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우리가 어릴 땐 좀 철이 없었잖아. 너 엄마 아빠 없다고 할아버지가 잘해주시는 거 질투 좀 났었던 건 기억나는데 ㅎㅎ 그랬었나?"


 당한 사람은 처절히 기억하고, 괴롭힌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괴롭힌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어린 시절은 흠결 없는 즐거움 그 자체다. 어쩌면 그들은, 어렸던 나도 그 괴롭힘을 '자발적으로' 즐겼다고 생각하고 합리화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쟤가 우리랑 놀고 싶어서 먼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잖아'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들 중 누구 하고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 얼마 전, 그들 중 누군가가 아이를 낳았다고 어렴풋이 어른들을 통해 전해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축하를 위해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더 이상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좀 끔찍하다.







 10대 시절의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고 답했지만, 지금의 나는 모든 아이가 악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어떤 아이들은, 선하지 않을 뿐이다.


 수없이 뜨는 학교폭력이나 집단 괴롭힘과 관련한 충격적인 뉴스들을 보며. 그 와중에도 '내 아이는 아닐 거야'라고 감싸는 부모들을 보며. 나는 '천사'가 아닌 아이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들도 언젠가는 크고, 철이 들어 부모가 될 것이다. 나의 사촌 누이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철이 든다'라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그랬다는 그 말은 얼마나 간편한 회피의 수단이냔 말이다.


 나 또한 자라나는 동안 그들이 거쳤던 연령대를 똑같이 거쳐왔고, 학교나 학원에서 그 연령대의 친구들과 언니들을 사귀었다. 그러나 그 연령대의 어떤 타인도 내게 '그들'처럼 못되게 굴진 않았다. 부모님 이혼 이후 씻는 법을 몰라 한참을 씻지 못해서 몸에서 냄새가 나던 나를 왕따 시키지 않고 함께 같이 놀아주고, 친구로 대해주었던 친구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뭐 일찍 철이 들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내가 자라나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 중에, 하필 내 사촌들만 철이 좀 늦게 든 것일 뿐일 리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내 10대 시절, 내게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시골에 내려가서 그들과 한 방에서 자야 하는 시간들이 두려웠다.


 내가 사촌 중 하나에게 큰 상처를 받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시도하고, 그 사랑방에서 나를 무릎꿇려두고 모두의 앞에서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던 것 또한 그들이었다.


 30대가 된 그들은 그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난다는 그들의 그 말이 난 참 우습다. 나는 이렇게 생생하게, 충격적으로 한 장면 한 장면 어떻게 일이 흘러갔는지 순서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이미 사회인이 되고 어머니가 된 그들은 기억을 못 한다는 것이 말이다. 내겐 30대가 된 지금도 가끔씩 꿈에 나올 만큼 길고 지난했던 괴롭힘의 시간들이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기억에 남겨둘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말이다. 


 그들 중 일부는 내가 어린 시절의 일을 그렇게까지 마음에 담아두는 줄 몰랐다며, 나를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그것이 누구를 위한 사과란 말인가?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사과라고 볼 수 있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악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찝찝해서, 그런 상태로 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당당한 사회인이 되고 싶어서 피해자인 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용서의 값은 그렇게 헐값에 후려칠 수 있을 만큼 저렴하지 않다. 무엇보다 나는 그저 어린 시절에 '멋모르고' 그런 행동을 순순히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개과천선했다 한들 내 삶의 바운더리에 두고 살아가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그런 잔인한 행동을 '별다른 생각 없이' 자행하며, 나로 하여금 성악설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내가 굳이 노력해서 곁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과의 철저한 절연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괴롭힘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감히 함부로 연락하지 말라.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본인의 마음의 안정을 위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려 하는 행위라면 더더욱 가해자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잊지 말고, 부끄러워하고, 죽을 때까지 찝찝해하며 살라.


비록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지언정, 누군가가 그 피해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평생 당신의 자식에게 부끄러운 어미 혹은 아비로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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