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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r 09. 2021

답정너가 필요한 순간

그냥 내 편 좀 들어주면 안 돼?

 

 얼마 전, 일하던 식당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유독 날이 풀려 사람이 붐비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분주했던 피크타임. 갑자기 어떤 현장으로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손님 하나가 식당 한가운데 서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다 당신들 잘못이잖아!!!"



  소란의 원인이었던 중년 여성은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식당 직원을 앞에 세우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파들파들 떠는 것일까? 하고 가서 보니, 원인은 직원 하나가 사이드 메뉴 주문을 잘못 처리한 데 있었다.


 손님 앞에 서 있던 직원은 당시 실수를 인지하자마자 바로 고객에게 사과하며, 시간이 조금 소요될 수 있으나 해당 사이드 메뉴를 다시 가져다 드릴지, 아니면 사이드 메뉴 가격에 대한 환불을 해 드릴지에 대해 고객에게 문의를 했다고 한다. 그 질문에 고객은 '됐다'라고 하고 일단 식사를 마친 상황이라고 했다.


 그렇게 정리가 된 줄 알았던 테이블의 손님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갑자기 분노가 폭발했는지, 식당 한가운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욕설을 정면으로 듣고 있던 직원을 도와 나 또한 허둥지둥 사과했지만, 그녀의 분은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몰랐다.


 "다 필요 없고, 애초에 주문받은 사이드 메뉴를 잘못 가져온 게 잘못 아닌가요? 제가 지금 틀린 말 하고 있나요?"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맞다. 애초에 메뉴를 잘못 갖다 드린 것은 우리 측의 잘못이 맞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10여 분 간 이어진 그녀와의 무한 루프는 그 '잘못'의 대가라고 하기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과하고, '사이드 메뉴를 다시 갖다 드릴까요' 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제 밥 다 먹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화를 냈다. 그럼 사이드 메뉴 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누가 돈 몇 푼 아쉬워서 그러는 줄 아느냐'며 또 화를 냈다. 마치 구간 반복처럼 이런 과정이 몇 번 더 반복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점점 겉면부터 잘게 잘게 깎여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손님이 비록 내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진 않았지만, 내게 고정된 채 형형하게 번쩍이던 시선과 완고하게 팔짱 낀 자세, 새된 소리로 퍼붓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는 지금 내 마음만 같아서는 너의 뺨을 수도 없이 때리고 싶어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는 뉘앙스로 피부에 꽂히듯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주 5일 사무직으로 일하는 나로서는 이런 직접적인 모멸감에는 평소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식당이라는 세계는 달랐다. 억울해도, 속으로는 '이만하면 우리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라고 느끼고 있음에도,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식당의 종업원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일단 어떻게든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 다시 그 현장을 떠올려 보아도, 나는 그녀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그녀가 우리에게 바랐던 것은, 그녀가 바랐던 정확한 시간에 갖춰진 메뉴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손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일개 종업원일 뿐인 우리에겐 음식을 더 해드릴 능력은 있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손님은 마지막까지 분을 풀지 않았다. 그녀와 같이 온 일행들마저 내게 침이라도 뱉을 듯한 표정으로 '장사 그딴 식으로 하지 마시오!'라고 일갈하며 나가는 순간, 나는 허탈함과 자괴감, 무엇보다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우리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게 이 정도의 취급을 받을 정도의 잘못이란 말인가? 고작 몇 천 원짜리 사이드 메뉴 때문에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던 것일까?라는 씁쓸한 생각을 하며.


 그리고 그 생각은 마치 체한 것처럼, 명치 한가운데 박혀 도통 내려가지 않았다.






 그 날의 퇴근길은 유독 고되게 느껴졌다. 가게 밖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해 질 녘 발밑의 그림자처럼, 오늘 있었던 일이 퇴근하려는 발목을 붙잡고 길게 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벌써 몇 시간이 지났지만 명치 가운데 자리 잡은 체기는 그대로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답답한 마음을 고스란히 안고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내리든지, 토해내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메신저를 켜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간단히 안부를 묻고는, 단톡 방에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친구 3명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면 풀린다는 속설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지, 오늘 일에 대해 공감하고 경악해주는 친구들의 위로에 어느 정도 맘이 풀리며 속이 점차 편안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런데 애초에 그 직원이 주문을 잘못 받은 게 잘못 아니야?"



 그 메시지가 내 대화창에 떠올랐을 때, 그리고 그것을 읽었을 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나마 조금씩 풀어져내려가고 있었던 명치의 덩어리가 다시 꽉 뭉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확 붉어져왔다. 그건 피가 식는다기보단, 마치 들끓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노로 길길이 날뛰는 고객 앞에 10분간 세워진 채 몇 번이고 '당신들 잘못임을 인정하라'라는 요구를 받은 이후, 생각지도 못하게 기습적으로 '그래도 그건 너네 잘못 맞잖아'라는 말을 듣게 된 순간 나는 다시 낮의 끔찍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친구로부터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바로 저런 말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그 손님과의 실랑이 내내 내가 손님으로부터 귀에 박히듯이 들었어야 했던 말이었고, 적어도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로부터  순간 듣고 싶은 말은 결단코 아니었다.






 아키요시 리카코의 소설, <절대정의>에는 다카기 노리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의 캐릭터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정의의 수호신'이나 '극도의 원리 원칙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살면서 스스로 규칙을 어기는 행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규칙과 법, 정의의 신봉자다.


 학창 시절, 그녀의 그런 성향은 때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가끔은 그녀가 처한 환경의 분위기를 개선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인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옳지 않은 것을 견딜 수 없을 뿐이다. 단 1mm라도 '부정'한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이다.


 주변 인물들에게 있어서 '노리코'의 존재는 뭐랄까, 무척 복잡한 존재이다. 그녀가 하는 말은 바르다. 바르지 않은 말은 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스스로가 법을 지키고, 정도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 외의 모두가 자신과 같이 '100% 올바른'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녀가 있는 장소의 분위기는 대체로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다. 친구들은 절대 틀린 행동을 하지 않는 노리코를 존경하고 신뢰하면서도, 자꾸만 노리코의 존재가 불편해지고 급기야는 올바르기 그지없는 존재인 그녀를 어려워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소중한 친구인데 왜 이렇게 피곤해지는 걸까. 혹시 난 노리코가.......
'싫은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친구에게 하기 어려운 말인데도 제대로 지적해 줬을 뿐이잖아. 저렇게 좋은 친구인데, 게다가 틀린 것은 내 쪽이잖아.

-

직원들은 노리코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고, 사무실은 하루 종일 껄끄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노리코가 하는 말은 언제나 논리 정연했으며 백 퍼센트 옳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절대정의> 中

 

 이렇게 그녀들은 계속해서 노리코에 대해 찜찜해하면서도'노리코를 미워하면 안 돼, 따지고 보면 노리코가 하는 말이 다 맞으니까.'라며 마음속의 명치의 매듭만 남몰래 더 단단히 조여 간다. 그러나 그렇게 꾹꾹 각자 조이고 있던 매듭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순간, 그녀들은 비로소 자신을 압박해온 '노리코'라는 '정의의 히어로'가 사실은 히어로가 아닌 몬스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히어로는 오직 정의를 위해 악과 싸우는 데 열중한다.
 그러나 정의의 히어로가 공격을 할 때마다 주위의 자연이나 건물은 파괴되고, 자동차나 기차는 나가떨어지고,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이리저리 허둥지둥 도망친다. 그렇다면 그건 몬스터가 하는 짓과 다를 짓이 없지 않나. 결국, 정의의 히어로는 정의에 집착하는 몬스터가 아닌가.

                                                                                        <절대정의> 中


  <절대정의>의 노리코와 마찬가지로, 내 에피소드를 듣자마자 대뜸 내게 '너네가 먼저 잘못한 거지. 고객이 그런 행동을 할만한 빌미를 제공한 거잖아?'라고 말한 내 친구에게도 어떤 악의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정의>속 노리코의 친구들 또한 노리코의 그런 발언이나 행동들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점점 노리코의 '100% 옳음'에 질려버린다. 그 옳음이 친구를 죽여버리는 원인이 될 정도로 싫어서 견딜 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답정너'라는 말이 있다. 마음속에 특정한 답을 정해두고 타인에게 물어보는 모습을 풍자한 단어이다. 솔직히 평소 긍정적인 맥락에서 쓰이는 단어도 아니고, 최근에는 그 단어에 담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가급적 이 단어와 거리를 둔 사람이고 싶었다. 혹시라도 내가 '답정너'처럼 보이지 않을까 일상 속에서 대화할 때 항상 경계했다. 사실은 '답정너'의 반대말이 더 쿨 해 보이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지는 어떤 말과 의견이든 듣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기에.


 그러나 이번 일로 나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역시나 나는 지극히 소인배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가 친구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옳은 말, 바른말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내게 필요했던 답은 '그래도 그건 네가 잘못한 게 맞잖아'가 아니라, 그저 '아, 정말 속상했겠다. 너무 맘에 담아두지는 마'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듣고 싶은 말을 먼저 정해두고 말을 꺼내다니. 내가 그토록 기피하던 답정너 짓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타고난 선비 기질 때문일까? 마음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는 나 스스로가 답정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싶어서. 그렇지만, 뭐, 내가 뭐라고? 내가 도대체 뭐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나도 그저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내 편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의 경험으로 인해, ‘답정너’라는 게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의 내게 필요한 게 그 상황을 해결하는 해결책이나, 옳고 그름을 가르거나, 명확한 정답이 아니었듯이. 그 날의 내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타인이 아닌 ‘따뜻한’ 친구였다. 설령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친구의 행동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고, ‘속상했겠다’는 한마디엔 전혀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더라도 분명 그 순간의 내게는 후자가 훨씬 더 위로가 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정이란 것은 무척 특별한 관계가 아닌가. 친구가 내게 필요한 답을 답정너로 물어올 때, 내 스스로의 생각이나 가치 판단을 우선한 정답이 아니라, 정답이 아닌 걸 잘 알면서도 그래도 친구가 원하는 오답기꺼이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답이 아닌, 친구의 마음을 맞힌다는 것은 어쩌면 꽤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내 눈에 보이는 정답을 질문과 함께 가지고 와 주는 친구의 모습이란 그 자체로 또 얼마나 소중한 우정의 증거냔 말이다.


 분명 나는 그 날 손님과의 실랑이보다, 친구의 반응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냥, 이럴 땐 두말없이 내 편 들어주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어린아이 같은 서러운 마음이 울컥 치솟기도 했고. 그렇지만, 누군가 내가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는다 해서 그게 또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렇게 나의 깨달음은 또다시 온전히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만약 이런 상황이 내게도 생긴다면, 일단은 옳은 사람이 아닌, 따뜻한 사람이 먼저 되기로. 소중한 누군가의 ‘답정너’ 질문에 가끔씩은 그저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는 사람이 되기로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록 당황해서 바로 말을 못 했지만, 앞으로 혹시라도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친구에게도 시원하게 한 번 이렇게 말해볼까 한다.



 “나 지금 '답정너'하는 거잖아.
그냥 내 편 한번 좀 들어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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