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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r 15. 2021

오늘의 인생

이런 일 저런 일 있더라도 오늘.


 마스다 미리의 책을 좋아한다. 어찌 보면 참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공감이 가는 디테일을 꼬집어낸 그녀의 글들은 읽기도 편하여 부담스럽지 않다. 국내에 출간된 그녀의 책들 중 가장 좋아하는 타이틀이 바로 <오늘의 인생>이다.





 그동안 글로 쓰려고 마음먹고 에버노트에 드문드문 적어두었던 메모들을 보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틈틈이 써두었던 그 메모들은 각자의 주제를 가진 한 편의 글로 채 피어나지 못하고 클라우드 DB 속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다시 읽어봐도 그중에 글로 발전시킬만한 메모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는 것도 왠지 아까운 것 같아서, 평소와는 달리 조금 가볍게 나열해 보려 한다.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의 형식을 차용해서 말이다.








"찌질한 게 아니야, 인간적인 거지."


 좋은 소식이 있는 타인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한없이 땅바닥을 파고 들어가던 중. "나 정말 찌질하지?"라는 내 자조 섞인 질문에 대한 친구의 즉각적인 답에 어쩐지 위로를 받아버린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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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운동을 일찍 끝내고 하이볼을 마시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수필을 읽으려고 했다. 비교적 간단히 할 수 있는 풀업을 하려고 풀업 바에 올랐는데 다섯 번도 안돼서 풀업 밴드가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란 인간은 대체 얼마나 무거워진 것일까? 어쩐지 난감한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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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지금처럼'. 현재의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점점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것임을, 그것을 막연히 머리로만 생각해 보다가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 언젠가는 와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된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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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난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난 이제 안 되는 거겠지'라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 중 뭐가 더 나은 것일까? 세상은 전자의 사람을 조롱하고, 후자의 사람은 무참하게 밟아준다. 어차피 세상으로부터 긍정을 받지 못할 거라면 '30대 중반, 이젠 진지하게 노선을 정할 때인가?'라고 허세를 부려보는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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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어서일까? 요즘 들어 부쩍 명언집이 좋다. 아포리즘같이 간결한 한 문장으로 삶의 진리를 담아내는 글들에 빠지게 된다. 생의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져가고, 나는 매일매일 그다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수록, 이 세상에 넘쳐나는 좋은 인사이트를 담은 고전이나 책들을 죽기 전에 내가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최근 해리포터 컴플리트 컬렉션을 한 달 걸려 원서로 읽었는데, 아무리 재밌다지만 두 번은 못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끝나고 나면 해리포터만 읽었으니까. 만약 나중에 다시 읽는다면, 중간중간에 쳐둔 밑줄 위주로만 후루룩 볼 것 같다.


 독서라는 행동을 미지로 가득한 특정 도서의 페이지 속에서 내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과 조우하기 위한 통과 의례라고 치면, 처음부터 문장만 뽑아 읽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을까. 어차피 책을 읽고 나서 남는 게 문장이라면, 거꾸로 문장을 보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을 골라 읽는 게 어쩌면 더 효율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것은 나이 탓이다. 나이가 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구차하게 계산하고 명분을 세우려 노력하진 않았을 것 같다. 요즘은 왓챠에서 시리즈를 하나 시작할 때도 소요시간을 먼저 계산해버리고 만다. 서글프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그런 건가 보다. 어쨌든 그렇게 오늘도 퇴근길에 <걸작 문학 작품 속 명언 600>이라는 제목의 책을 사서 들어온,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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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밥 먹고 똥만 싸다 죽을 거야? 그렇게 살다 죽으면 대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


 꿈도 야망도 없이 그저 먹고 자고 싸는 내 인생이 한심하다며, 어느 날 아버지는 면전에 두고 그렇게 호통을 치셨다. 그때 나는 속으로 '지구에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것도 나름 좋은 인생 아닌가...' 하고 은밀하게 생각했지만 눈치가 있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나마 최대한 다른 똥(?)은 안 싸고 가는 게 내가 이 세상에 무능력자로 태어나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본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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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하지 않은 30대 중반의 삶은 무료하다. 심지어 나는 커리어에 대한 야망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좁은 업계에서 나이까지 먹어버려서 어쩐지 커리어로 도약을 꾀하기에도 상황이 꽤 애매해졌다. 이제 점점 이직하기도 힘들어지겠지.


 앞으로 내 인생에 변화구가 찾아오긴 할까?

60대가 되어도 80대가 되어도 난 이렇게 이 집에서 살다 이 자리에서 죽을 것 같은데.


 내 인생 최고의 아웃풋이 현재일까 봐, 그마저도 이미 저물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무서워진,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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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타일작 작가의 변명>이라는 독립출판물을 읽었다. 최근에는 뭐든지 잘 풀리는 사람보다 열심히 했는데 잘 풀리지 못한 사람들이 무척 애틋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처절하게 고백할 수 있는 대범함에 큰 위안을 얻는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잘 안 풀린'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의 실패담으로부터 위안을 찾다니, '내가 요즘 마음이 좀 많이 꼬이긴 꼬였나 보다.'하고 생각해보는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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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력하며 잘 나아가다가도 어느 지점이 되면 더는 노력을 하지 않고 만족해버린 삶을 살아왔던 주제에, 이제 와서 더 위로 올라갈 길이 막혔다고 좌절하고 있는 게 스스로도 한심한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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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극도로 심심한 나머지 집에서 10대 20대 남자 아이돌 댄스를 따라 춘다. '에어로빅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처음에는 내가 그 동작들을 따라 할 수 있을지 살짝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30대 중반인 내가 17살이 추는 춤을 추는 게 가능하다.


 아이돌 군무라는 것이 사실 프리스타일 댄스가 아니라 정해진 안무의 순서를 외우고 팔, 다리를 맞추면 되는 것이다 보니 의외로 모범생 기질이 있는 내게는 무척 재미있는 운동이 되었다. 매뉴얼대로 정해진 동작을 취하다 보면 몸도 힘들고 정신도 다른 쪽에 집중이 돼서 그런지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기왕이면 치매 예방도 됐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춤바람이지만, 가끔은 회사 화장실에서 전날에 외우지 못한 안무를 슬쩍슬쩍 거울을 보며 따라 해 보다 거울 속 내 모습에 현타를 느끼고 황급히 자세를 정돈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래도 손발이 딱딱 맞는 안무를 여러 번 추고 나니 기분이 좋은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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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새들은 할아버지들이다. 그중 한 마리는 사람으로 치면 110세는 되었다. 아직까지 건강하게 잘 날아다니고 밥도 잘 먹고 횃대에서도 잠을 잘 자 주는 것은 외로운 독거 생활 중인 반려인으로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가슴 찡하게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늦출 수는 없다. 새는 자연에서는 가장 연약한 존재로, 병이 들어도 아픈 것을 티 내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리는 연약한 생명체들이다. 오늘은 내 곁에 있어주지만, 내일은 새장 바닥에 차갑게 굳은 채로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나갈 땐 '오늘도 무사히'라 인사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불을 켤 땐 횃대에 곱게 앉아있는 새의 그림자가 두 마리인지를 꼭 확인하고, 안심하는 패턴이 작년부터 반복되는,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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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들은 다 바쁜 것 같다. 나만 빼고. 나도 따라서 좀 바쁘고 싶은데 영 바쁘지가 않다.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열심히 할 게 없다. 공부하고 밤을 새야 할 정도로 바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럽다. 일이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연락도 주고받지 않은 채 누워서 '아 심심하다. 심심해서 죽어버릴지도.' 라는 말만 내뱉는 나라는 인간은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이대로 보내기엔 이 시간이 아까운 건 알겠는데, 취미생활은 이미 충분히 했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무작정 아무거나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사촌언니에게 '언니가 공부하는 자격증 뭐야? 나도 그거 똑같이 공부할래'라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또 쭈그러져 있었다. 학창 시절 땐 다 같이 같은 걸 하면서 바빴는데, 지금은 다 다른 걸 하면서 바쁘니까 더 모르겠다. 난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오직 나만이 잉여롭게 무료하다는 것이 무척 서글픈,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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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아리에 난 딱지를 긁었는데 살점이 떨어지며 피가 났다. 시간이 흘러도 살점이 좀처럼 메꿔지지 않는다.

턱에 난 여드름 두 개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짜도 짜도 계속 부활한다.

식초가 말라붙은 식초병 뚜껑을 따다 손바닥 피부가 베이고, 손등 힘줄을 삐끗했다.

자전거를 타다가 무릎에 든 멍 자국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회복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어쩐지 서글픈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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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은 뒤에서부터 오고, 운명은 앞에서부터 온다."라는 말이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거부하고 싶어지는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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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간만 짧게 딱 쓰고 하이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쓰기 시작한 지 2시간이 넘어버렸다. 어서 글을 올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수필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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