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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r 22. 2021

속 쓰릴 땐 금융 치료

망한 소개팅도 잊게 만드는 수익률의 기적



 얼마 전에 소개팅을 했다. 코로나 이후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 모르는 상대와 편하게 만나 식사하며 즐겁게 대화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나름대로 좋은 분위기로 자리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애프터 연락이 없었다.


 그 날,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마지막 연애 이후 드문 드문 소개팅을 받아 남자를 만나봤지만, 예전에 비해 애프터를 받는 비율이 확 낮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 분위기가 꽤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상대에게 연락을 해볼까도 고민해봤지만... 고민 끝에 그만뒀다.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 사람이 그 정도로 아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건 뭐랄까, 자존심의 영역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나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은 과거에 내가 이끌렸던 상대들에 대한 마음보단 '나쁘지 않다, 연락 오면 더 만나볼까'에 가까웠다. 그러니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 다시 약속을 잡는 시도를 하거나 아니면 '죄송하지만 제 타입이 아니시다'라는 명확한 거절의 메시지를 듣고 마무리를 짓는 과정을 굳이 무릅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또한 그런 내 미적지근한 호감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 괜찮은데?'가 아닌 '연락 오면 더 만나봐야겠다' 정도였던 내 마음을.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호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나이가 몇인데.. 내가 먼저 이렇게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섞인 마음이 더 클 것 같았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봐도 그런 어쭙잖고 미적지근한 마음에서 비롯된 연락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둘 다 서로 과년한 나이이기에, 서로의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한쪽에서 점잖게 끊어주는 게 일종의 방식인 것 같기도 하고.


 뭐 누구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나를 보며 '그냥 몇 번 더 연락해서 만나보라는 거지, 누가 꼭 결혼하래? 하여튼 넌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라고 일침을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나를 다그치는 목소리들 중에는 나 자신의 목소리도 있었다. 상대에게 연락을 하지 않기로, 소개팅남에게 '까였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와중에 자꾸 마음속 한 구석에서 무럭무럭 어두운 마음이 뾰족하게 자라났다.



 '난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하여튼 난 이래서 안되나 봐.'



 고작 한 사람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느껴지는지.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던 멘탈에 갑작스레 던져진 돌 한 덩이 때문에 마음속에 일어난 파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후벼 파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에서 띠링하고 알람이 울렸다. 무심코 확인해보니, 휴대폰 대기화면엔 다음과 같은 알림들이 와 있었다.





 그것은 업비트 앱의 수익률 알람이었다. 며칠 전 별생각 없이 분산 투자 겸 사 두었던 코인 중 하나가 실시간 급등 중이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황급히 업비트 앱을 켜서 엠블 차트를 확인했다.



엠블은 최초 확인한 시점으로부터도 꾸준히 올랐다.



 떡상. 그야말로 떡상이었다. 벌겋게 치솟은 불기둥의 아름다운 슈팅 라인을 눈에 담은 순간, 나는 직전까지 나를 감싸던 모든 번뇌로부터 단박에 벗어날 수 있었다. 너무 조금 담은 거 아닌가? 지금이라도 조금 더 담을까? 약간 분할 매도하고 밑에서 다시 살까? 엠블 이대로 동전(100원) 까지 쏴버리면 어떡하지?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리면서 추가 매수 주문을 거는데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오로지 원초적인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엔 이미 더 이상 나를 차 버린 소개팅남이 머물 자리는 없었다. 마음에 강 같은 평화와 함께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이래서 주식, 코인 하는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속이 쓰렸는데,
이거 보고 있으니까 속이 하나도 안 쓰리네?




 그렇다. 코인 수익률이 나로 하여금 망개팅(망한 소개팅)의 고통을 잊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금융 치료'라고 부르는 듯했다.

 


 




 '금융 치료'는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로, 돈으로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겨내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돈으로 아프고 지친 마음을 치료를 해준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가끔씩은 누군가 사회 법규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신고해서 범칙금을 내게 하는 등의 '응징'같은 의미로도 쓰이는 것 같다. (ex.  "신호위반 차량 신고해서 금융 치료 좀 시켜줬습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겪은 일은 금융 치료의 긍정적인 예에 해당하는 사례이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돈 냄새만 맡으면, 스크래치 난 마음이 자동으로 봉합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일례로 가수 황치열은 한 방송에 나와, 한창 활동할 당시 바쁜 스케줄에 현타가 올 때마다 은행 앱을 켜 잔고를 들여다보는 셀프 금융 치료(?)를 통해 공황장애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금융 치료 짤'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과연 이 '금융 치료'란 것은 정말로 과학적인 효과가 검증된 것일까? 돈은 정말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잊게 하는 것일까? 사실, 고통과 치료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에겐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좀 더 친숙한 논제가 있긴 하다. 바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3의 부의 원칙>이라는 책에서는 실제로 해당 주제로 연구를 했던 사례가 나온다.


 대니얼 카너먼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고, 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연구진에 따르면 돈을 적게 버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슬픔을 유발하지는 않지만, 원래 있는 걱정거리를 고조하고 악화하는 힘이 있었다.

 이혼한 사람들에게 전날 슬펐거나 스트레스를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의 답변은 월 소득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월 소득이 1,000달러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51%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대답했지만, 월 소득이 3,000달러가 넘는 사람들은 24%만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지금 힘든 상황이어도 높은 소득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안도감을 주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연구 결과는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결론보다는, '돈이 있으면 고통에 무뎌질 수 있다'라는 결론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돈이 행복을 직접 가져다 주진 않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운 순간에 적어도 마취는 시켜줄 수는 있는, 그럼으로써 본인이 처한 상황을 좀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버팀막이 되어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절대적이진 않더라도, 회복탄력성을 어느 정도는 보장해줄 수 있는 존재.


 한때 인터넷에 유행했던 고전 짤 중에 '샤넬백 땅바닥에 내팽겨치면서 엉엉 울고 싶다'는 짤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땐 마냥 웃겼던 이 짤이 이제는 마냥 웃기지만은 않다. 이 글의 작성자는 사실 본문 속의 경제력을 갖춘 정도의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고통에 충분히 물타기를 해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즉, 어마어마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돈...그것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아니 마취제이자, 진통제라는 것을.


 내가 직접 겪어보니 정말 그렇다. 금융 치료 효과 정말 좋더라. 마음만 상처에 무뎌지게 해주는 효과만 있는 것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잔고도 두둑해진다!


 혹시 지금 뭔가 삶에 괴로운 일이 있다면, 아니면 너무 쓸데없는 잡생각만 많아진다면 재테크라는 이름의 금융 치료를 해보시길 권한다. 꼭 주식이나 코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본인이 쫄리지 않는 선에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투자를 해보는 것이다.


 다만 마취제나 진통제도 정량을 지켜서 꼭 필요한 순간에 적당히 써야 위험한 상황을 방지할 수 있듯이, 금융 치료에도 너무 매달리면 인생이 망가져버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루 종일 코인 차트만 들여다보느라 현생이 망하거나, 운동도 잠도 잊고 매달리다가 건강이 상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적절하게, 남용하지 않는 선에서, 인생이 힘들 때마다 잠깐잠깐씩 스스로에게 금융 치료를 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금융 치료를 열심히 하면서 마음도 고통에서 거리두기 하는 한편 지갑은 두둑하게 적립해가자. 혹시 모르지, 언젠가 샤넬백 쾅쾅 치면서 울게 될 날이 올지도. 그러나 적어도 그때 손에 들린 샤넬백이 그 고통의 최대치를 조금은 완화시켜 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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