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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n 25. 2021

깃털은 여름

새의 탈모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그래도 그럭저럭 해는 눈치껏 들고, 바람은 맘껏 드나드는 집에 사는 덕분에 6월 말이 다 되어가도록 에어컨 한 번, 선풍기 한 번 켜지 않고 지나가고 있다. 코타츠의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 요 밑에 깔아 두었던 전기장판을 들어내는 사소한 행동 외에는 여름을 느낄만한 일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계절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정한 생활 패턴의 칸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여름임을 여실히 체감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집안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깃털들을 볼 때이다.


어제의 수확(?).jpg


 겨울 참새는 귀엽기로 유명하다. 겨울 참새가 귀여운 이유는 바로 털이 찌기 때문이다. 참새는 겨울이 되면 새로 깃털을 돋아내며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두텁게 코트를 두른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봄, 여름쯤으로 넘어가는 환절기가 되면 새들에게도 탈모의 계절(?)이 찾아온다. 날이 더워지는데 겨울 한 철 동안 찌워둔 털을 굳이 한여름까지 가져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새의 탈모는 인간으로 치면 봄 → 여름 옷장 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털들을 싹 다 털어내는 시기가 딱 이맘때이다. 그다지 덥지도 않은데 미친 듯이 깃털을 떨궈댄다. 아침에 눈 떠서 출근 준비를 하다 보면 새들이 평소 즐겨 앉아 있는 자리에 떨어져 있는 깃털을 한두 개씩 줍게 된다. 그나마 큰 깃털들은 그렇게 눈에 띄게 떨어져라도 있지, 솜털 같은 작은 깃털들은 방 여기저기를 자유롭고 가볍게 굴러다닌다. 지난 주말에도 새장을 청소하는데 새장 바닥에 잔뜩 깔려 있던 보송보송한 깃털들을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 그래도 연중 내내 시도 때도 없이 털이 빠지는 강아지나 고양이보다는 여름에 1년 치 몰아서 빠지는 새들이 낫긴 한데... 깃털은 고양이 털이나 강아지 털과는 달리 '깃'이 있어서인지 일반적인 청소기로도 잘 빨아들여지지 않고 거실 이곳저곳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그걸 보면 별로 덥진 않아도 여름은 여름이구나 싶다.


 그렇게 깃털을 떨구는 동안, 새들은 또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빠지는 만큼 새로 깃털을 채워내기 위한 가시털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가시털은 야자나무잎처럼 뾰족하게 그들의 살가죽을 뚫고 나온다.


올해도 여전히 가시털 키우느라 고생중...

 

 피부를 뚫고 가시처럼 돋아나는 털을 갖게 되는 건 어떤 느낌일까? 평생을 부드러운 털만 나 봤던 생명체인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모공에 샤프심이 박혀있는 것처럼 아프지 않을까? 목 주변과 날개 죽지가 새하얀 가시들로 뒤덮인 노인 새는 이 시간이 조금 버거운 것 같다.

 

 새들의 가시털은 꼿꼿하고 충분히 자라났다 싶으면 부리로 깨 주던가, 살살 쓰다듬어주면서 긁어서 그 안에 돌돌 말려 있는 털들을 꺼내 줘야 한다. 그렇게 가시털은 깃과 털, 즉 깃털이 된다. 마치 지표면을 뾰족하게 뚫고 올라온 야자나무잎이 점점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 보면 새라는 생물의 메커니즘이 마치 식물의 그것 같기도 해서, 정말 신비로운 존재로 느껴진다. 날 수도 있고, 땅에도 있을 수 있으며, 공룡의 후손인 데다, 식물 속성까지 가지고 있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가시털 하나 돋아낼 수 없는 인간 따위는 그저 한없이 하찮은 존재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깃털의 원리가 너무 신기해서 알고 싶었던 나머지 나름대로 <깃털>이라는 책도 샀는데, 역시 사고 나면 읽지 않는다는 기막힌 징크스가 작용하고 있다.)



 보통 몸에 나는 가시털은 새들 스스로 부리로 긁어 해결하지만, 머리와 목 주변에 빽빽하게 돋아난 가시털들은 스스로 어찌할 바가 없다. 그래서 새들이 항상 짝을 지어 서로의 뺨과 머리를 긁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건드리기만 하도 아픈 가시를 목과 뺨, 정수리에 덕지덕지 붙이고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새들의 불퉁한 얼굴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귀여워서, 나도 한번쯤은 가시털이 나 봤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나는 올해에는 가시털 시즌이 찾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작년에도 비슷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한 2년 전부터는 매 해 올해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아니, 적어도 저 다 늙은 몸에 새로 가시털을 돋아낼 에너지는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다. 훌러덩 빠져서 대머리가 된 뺨과 머리 그대로, 이대로 털갈이 없이 마지막 모습이 될 거라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폭싹 늙어버려서는, 가시털이 또 나는 게 기쁘면서도 안쓰럽다. 가시털은 그의 몸이 또 다른 한 해를 대비하며 뽑아내는 것이라, 나는 그것을 보며 안도하고, 나 좋을 대로 해석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간아. 네가 이렇게 외롭고 짠하니 내 너를 어엿쁘고 불쌍히 여겨
너랑 딱 한 해만, 한 해만 더 같이 살아주기로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마냥 철없는 아이 같았는데, 왠지 올해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이런 측은지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정말, 아무래도 얘는 신선이 맞지 싶다.


자기가 뽑은 깃털은 이렇게 갖고 놀다 아무데나 떨궈버린다.



 나는 너를 처음부터 이렇게나 사랑하진 않았다. 혼자 오래 지낸 탓에 누군가에게 정을 주는 게 서툴러서, 무엇에든 마치 시험하듯 조금씩 조금씩 애정을 키워가며 건네는 나를 안다.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하는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네게 더 큰 애정을 주었다. 모래성 같았던 마음이 해가 갈수록 이면서 커져 어느새 우리를 감쌀 정도로 단단한 성벽이 되었는데, 이제 나는 시절이 차면 기울듯이 그 성벽이 무너질 날만을 걱정한다.


 너를 귀여워하며 글을 썼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너를 그리워하며 글을 쓸 것 같다.


 너의 안식은 순식간에 편안하게 찾아왔으면 한다. 내가 너를 잃어가는 순간을 견딜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 내가 모르는 새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면, 다시 모래로 변해 내가 보기 전에 파도가 쓸어가 줬으면 한다. 그저 거기에 그게 있었고, 파도가 가져가 버렸다는 어렴풋하고 막연히 안타까운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이렇게 끝까지 내 생각만 한다.


좋은 주인은 아니었다.







 브래드 피트와 기네스 펠트로가 연인이었던 시절의 아름다운 일화가 하나 있다. 기네스 펠트로가 머리를 짧게 자르기로 결심하고 브래드 피트와 함께 미용실에 갔을 때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이 싹둑 잘려나가자, 브래드 피트는 그 일부를 받아 조심스레 자신의 지갑 안에 넣었다고 한다.




 나의 집안 곳곳에도 새들이 떨어트린 깃털들을 주워 모아둔 장식들이 있다. (물론, 브래드 피트를 벤치마킹하여 지갑에도 넣어 다니긴 한다.) 벽에 스카치테이프로 살짝 붙여두기도 하고, 서랍장에 쏙 넣어두기도 하고, 액자에 끼워두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책갈피로 표시해둘 만한 게 없을 때 꽃 말리듯이 끼워두기도 한다. 비록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부지런히 빠지고, 언제든 다시 자라는 깃털이지만, 나는 언젠가는 내 곁에 이것밖에 남지 않을 것을 안다. 내가 사랑하는 새들은 나이 들어 소멸하여 내 곁을 떠나겠지만,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떨군 깃털들은 그들의 생명보다 길게 남아 오래도록 내 곁을 지킬 것이다.


 

언젠가 그날이 왔을 때, 그리고 오고도 한참은 지났을 때. 지갑을 열어볼 때, 침대 밑이나 소파 밑에 떨어져 있거나 구석에 박혀 있는 깃털을 볼 때. 오랜만에 보려고 펼쳐 든 책 사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깃털을 볼 때.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거닐 때마다 깃털이 발에 밟히던 여름 한 때를 추억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게 새로운 깃털을 떨어트려 줄 수 없는 그들과, 그들로 인해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떠올리며.


글 쓰는 데 집중하려고 따로 컴퓨터방을 만들었는데 시선이 느껴져서 보면 ..(!) 아무래도 이 할아버지들이 주인 염탐하는 재미에 푹 빠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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