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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Nov 16. 2021

He Loves me like a child

우리는 서로를 아이처럼 사랑한다

BYRD (Ego-wrappin')


Ego wrappin'의 BYRD는 무려 9분짜리 노래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곡을 다 듣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랜덤 플레이리스트 사이로 이 곡의 첫 부분 전주가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매번 가슴이 두근거리니까.


차분한 전주가 지난 뒤, 'He Loves me like a child'라는 첫 소절 가사가 들려오면 그때는 나도 모르게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공간에 있든, 그 9분 간은 어디론가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He Loves me like a child.



이것은 나를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새는 이 집안의 가장이다. 적어도, 스스로는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 것 같다. 문조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새이고, 자신의 짝이 아니면 곁에 다가와도 붙어 앉아 온기를 나누지조차 않는다.


정말로, '약간의 거리를 둔다'


 이 집에서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닿을 수 있고, 그와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허락된 존재는 바로 나뿐이다. 아마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내가 그에게는 어떤 미숙한 존재로 각인된 것 같다. 10년 전, 그는 아직 털갈이도 마치지 않은 작은 청소년 새였고, 나는 20대 중반의 불안하고 어린 청춘에 불과했다.


 사람보다 훨씬 빠른 시간을 사는 작고 작은 나의 새는 이미 그때부터 나를 어느 정도는 깔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보다 100배는 몸집이 큰 내가 그의 눈동자에 처음부터 어떤 존재로 비춰졌을지는 사실은 잘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신이 든다. 그는 자신이 나보다 빠르게 성장해서 어른이 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언젠가는 그 자신이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시선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덩치만 클 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날수도 없고, 새의 노래도 부르지 못했다. 피부도 깃털 하나 없이 민둥 했으니, '새'였던 그로서는 아무래도 내가 무척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반려동물과의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반려동물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반려인과의 관계가 결정된다고 한다. 먹이사슬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경우에는 주인을 부모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여 마치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처럼 따르고, 애정 표현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한다.

먹이사슬 상위 포식자로서 그들 스스로 가진 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끼같이 주로 피식자로서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위치한 동물들은 일찍 부모의 품을 벗어나 혼자 생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립적인 습성을 갖게 된다. 때문에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아이처럼 굴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러한 연약한 개체가 반려 인간에게 주는 것은 애정이 아닌 '우정'이다. 너무 붙어있으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너무 잠잠하면 뭐하나 싶고 소식이 궁금해서 슥 들여다보는 그런 느낌?


 새의 경우도 그렇다. 자연 생태계에서 내가 키우는 새들은 너무도 연약한 존재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적을 공격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눈이 좌우 양옆에 달렸다. 적이 어느 방향에서 오든 보고 빨리 무작정 날아서 도망가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니까.


 때문에 새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경계를 선다. 세상 안전한 나의 집에서도 그들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 집안에서 함께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만, 그들은 항상 집안 전체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나의 안위를 틈틈이 확인한다.


 이제는 안다. 그것이 바로 그들 나름대로의 '우정'을 내게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들은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찐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동반한 애정을 주진 않는다. 그저 그들은 그렇게 나를 멀찌감치서 지켜볼 뿐이다. 이 공간의 관리자이자 가장으로서, 자신이 나의 안전까지 돌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평균 수명이 6년에서 8년이라는 나의 새는 지금 11년 째의 생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의 장수에 대해 주변에서는 종종 많은 가설을 제기하곤 하지만, 그중에 아무래도 내가 가장 신빙성 있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못 미더워서.



 철저히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도통 그가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영 못 미더운 벗이다. 그가 사람 나이로는 110살 정도가 된 노인이 되어서도 내 눈에는 여전히 철없는 아이같이 보이듯이, 그의 눈에도 나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의 20대 중반의 철없는 천둥벌거숭이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나를 그토록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 아직도 털갈이도 안 했고, 날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니까.)


 생각해보면 인간끼리도 똑같다. 오래된 인연을 보면 우리는 상대의 늙어감을 좀처럼 인지하지 못한다.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각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나의 새들도. 우리는 서로를 들여다볼 때마다 언제든지 10년 전의 아직 어리고 미숙했던 상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마치 어떤 옛날이야기 속 두 아이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내려왔을 때, 한 명은 얼굴이 깨끗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더러웠다. 그러나 정작 얼굴을 씻으러 간 것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였다. 둘에게는 거울이 없었고, 그랬기에 상대의 얼굴을 보며 '내 모습도 저렇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할배..얼굴에 알곡껍질 묻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마치 굴뚝 청소를 마친 두 아이처럼 함께 하는 매 순간마다 서로를 사뭇 불안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못 미더운 존재고, 매 순간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존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충분히 야무지지 못해서, 아직도 성조가 되지 못해서. 그렇기에 나의 새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벗을 두고 떠나기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조금은 한심하고 못 미더워 보인다 해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미숙함과 못 미더움만을 보면서도 그런 상대를 위한 경계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존재의 놀라운 생명력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면.





 그렇게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자신의 몸집의 100배도 넘는 커다란 거인 같은 존재인 나를 믿고 잠시 몸을 맡겨오는 순간들이 있다.




내 손과 어깨 위에 배를 딱 붙인 채, 쓰다듬어주는 내 손길을 느끼며 잠시 잠들었다가 뭔가 충전되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 다시 경계를 서러 냉장고 위로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릴 듯이 말랑해진다.


 그래도 적어도 나만큼은 그들의 삶의 숙명과도 같은 '쉴 틈 없는 경계'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내게 표현하는 최소한의 우정이 가끔은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각자의 시야에서 이토록 척박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 속에서, 서로를 돌봐줄 상대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각자 '나는 컸고, 너는 안 컸다'고 생각하며 서로를 아이처럼 사랑한다.


 내가 우리의 관계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걸까?

뭐, 괜찮다. 어차피 그도 그의 맘대로 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He loves me like a child.
And I love him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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