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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17. 2020

나의 사랑스런 할베이비

나보다 어렸다가, 동갑이었다가, 어른이었다가, 기어코 할아버지가 된 너.



“새는 몇 년이나 살아요?”



 최근 들어 꽤 자주 받는 질문이다. 나는 나의 반려조와 내 인생의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때문에, 저와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지는 사람은 대개 내가 반려조를 키우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들이거나, 혹은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일 경우가 많다.


 저 질문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무심코 잊고 지내던 내 반려조의 나이를 새삼 의식하게 된다. 처음 그를 데려온 것이 2010년의 4월이었으니, 어느덧 나의 작은 새는 10년을 꼬박 살아온 셈이다. 오로지 내 곁에서만 말이다.




예전에, 인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잠시 교육 봉사를 했던 적이 있다. 내가 일하던 마을에는 나이 든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당시 나를 돌봐주던 가족의 손녀 - 당시 그녀는 12살이었다 - 는, 그 개를 볼 때마다 나에게 놀랍다는 듯이 말하곤 했다.



“Still alive...”



 그녀는 그 개가 아주 오래 살았다고 했다. 본인이 태어났을 때 이미 10년은 살았던 것 같다고. 누군가는 그 개의 나이가 20살이라 했고, 20년이 지난 후로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나이를 세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다들 그 개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미 살 만큼 살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개한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곳에 있는 매일 그 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마치 내 안의 어떤 루틴처럼 자리 잡았다. 결국 내가 그 마을에 있었던 두 달 동안 그 개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개는 내 안에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롭고 신비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늘 마당 한 구석에서 앞발에 턱을 괴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몸을 일으켜 비척이며 밥그릇과 물그릇으로 다가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분을 섭취했다. 비록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맡지 못하고, 들리지도 않는 상태였고, 먹는 음식의 양도 무척 적었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음식을 먹은 뒤, 잠시 입을 찢어지게 벌리며 커억-기침을 하고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 햇볕 아래 평온하게 드러눕는 그 개의 모습은 마치 어떤 신선이나 영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22년을 산 개라니. 나는 아직도 가끔 그 개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쩌면,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


 최근, 이런저런 알게 되는 사람들이나 지인, 친구들로부터 지나가듯 무심코 내 반려조의 수명에 대해 질문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새 키워요? 몇 살이에요? 새가 그렇게 오래 살아요?”라고 던져오는 말 한마디에도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요즘이다.


 물어보는 사람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과 경탄에 차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사실 나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을 듣고 싶지 않다. 들을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가 여태껏 나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나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질문들은 나를 순간적이지만 무척 고통스럽게 한다.



  더욱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런 질문에 애써 태연함과 침착함을 가장하며 “문조는 보통 8년에서 10년 정도 사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면 돌아오는 “와, 정말 오래 살았네요!”라는 대답이다. 그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무심코 인도에서 봤던 그 개가 떠오른다. 22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그 개. 너무 오래 살아서 이름 대신 ‘Still Alive’라 불리던, 모두가 안부를 궁금해하던 그 늙은 개. 나의 반려조가 그런 경외의 대상이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서글프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고. 뭔가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어떤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그런 순간적인 감정들을 통제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5년 전, 이 브런치에도 그에 대한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 2020년에 다시 이 브런치에 그에 대해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이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난번에 썼던 위의 글에서도 나는 이미 나의 반려조를 할아버지라 불렀으니, 나의 새는 실제로 무척 긴 노년을 보내는 중이긴 하다. 사람으로 친다면 글쎄, 아마도 지난달에 막 101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 또한 매년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다. 진지하게라기보다는.. 문득문득 ‘올해일까, 내년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새의 컨디션을 관찰할 때가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새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집에 자유롭게 풀어두었던 때문인지, 비록 집 안에 한정되었을 망정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내 집 안에 본인만의 아지트를 구축했던 그는 다행히도 아직 건강하다.


이대로 대머리가 되는구나.. 세월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


 작년에 그의 머리와 볼의 털이 다 빠졌을 땐 ‘아.. 새도 나이 들면 대머리가 되는가 보다..’하고 서글픈 마음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곧이어 그의 머리에 삐죽삐죽 하얀 가시털이 온통 돋아났을 땐 그가 여전히 갖고 있는 생명력에 순수한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 나이에 털갈이라니! 그는 으레 그러했듯 털갈이 시기에 유독 까칠하고 예민해졌지만, 나는 늙은 그의 몸에서 새싹처럼 돋아나는 가시털이 마냥 놀랍고 경이로웠다. 그리고 털갈이를 마친 그는 언제 머리털이 빠져서 걱정했냐는 듯, 언제나의 매끈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윤기가 흐르는 털을 자랑하는 그는 놀라운 생명력과 가능성으로 넘치는 것 같았다. 마치 신선 같았다. 인도에서 봤던 그 개처럼.


가시털이 삐쭉 돋아난 작년 이맘때쯤의 그의 모습.


 잘못해서 손에 꽉 쥐기만 해도 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은, 이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가 살아온 10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어떤 신성함을 부여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10년을 룸메이트로 지내오면서 서로 호흡을 맞춰온 덕분일까. 그는 이제 완전 ‘영물’이 다 되었다. 평일도, 주말이라는 시간 개념도 안다. 아침 8시가 넘어서도 내가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짹짹이며 나를 깨워 새장 문을 열라고 다그치다가도, 내가 차키를 챙기거나 마스크를 쓰면 ‘외출하는구나’라며 체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텄다’고 생각하면 굳이 나를 괴롭히며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점도 현명하다.)



 가끔은 내 어깨에, 손에 내려앉아 잠들어 나를 얼음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그 나름의 시위다. 내 손가락에 단단히 붙인 그의 엉덩이에서 ‘지금 날 전혀 쳐다보고 있지 않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날 최우선으로 여기고 사랑해야지!’라고 다그치는 듯한 그의 무언의 협박을 읽는다. 그는 옴짝달싹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나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새장으로 향한다. 때로는 그가 나 자신보다 내 마음과 컨디션을 더 잘 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저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지난한 일상을 버티게 해 준다.



오늘도 볼따구 시중을 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몸보다 100배는 클 것 같은 거대한 존재에게, 이 작은 존재가 가지는 무한한 신뢰가 얼마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지 모른다. 바깥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도, ‘이 인간은 절대 나를 해치거나 버리지 않아’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자리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면 내가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사람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하나의 소울메이트를 만날 수 있다면, 내게 있어서 그건 그이리라 확신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찬란한 시기를 그와 함께 했기에, 나보다 빠르게 먼저 나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애틋하다. 활발하던 움직임은 둔해졌고, 화내다가도 쉽게 지쳐하고. 문득문득 까무룩 잠들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일어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 너무 애틋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까 봐. 그는 할배새지만, 내게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애틋한 할베이비다. 아기의 얼굴을 한 할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 아기인 벤자민 버튼이다.




 5년 전에 바로 여기서 말했듯이, 나는 나의 새가 오직 평온하고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언젠가 불가피하게 떠나야 할 순간이 오더라도, 그 마지막 순간이 언젠가 맞이하게 될 나 자신의 마지막보다도 더 평온하길 바란다.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약체로서, 자신의 약함을 본능적으로 숨기는 새의 특성상 그가 내게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가끔 상상한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불을 켰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를 반기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순간을. 내가 발견할 것은, 평생의 은신처였던 커다란 새장의 바닥에 움직이지 않고 굳어 있는 그의 모습이겠지. 나는 정말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고,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달려서 도망치고 싶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겪어야 할 순간일 것이다. 가끔씩 나는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있다. 이게 나 스스로의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일지 혹은 증폭시켜 악화하는 방법일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조금 울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90년대 영화 속에 박제된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볼 때나, 사람보다 빠른 인생을 살아가는 반려동물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볼 때. 나와 그들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시차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과거에 그가 얼마나 반짝반짝거렸는지, 얼마나 활기에 넘치는 사랑스러운 존재였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욱 그렇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칩거하며, 부쩍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는 내 작은 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직은 나를 이 황량한 세상에 혼자 남겨두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내 곁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며 조용하게 살아주는 나의 새에게 나는 항상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아마도 그가 때가 되어 나를 떠나게 된다면, 나는 많이 아플 것이다. 조금은 변할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기 전의 내 삶과 그를 만난 이후의 내 삶이 결코 같지 않듯이, 그를 잃은 후의 내 삶이 어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순간순간 나를 찾는 그의 시선과, 손에 와 닿는 따스한 체온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 함께 있는 매 1분씩의 시간에만 집중하기로. minuto per minuto!



+


 그렇지만, 기왕이면 조금만 더 천천히 늙어주면 안 될까?  

 새똥 밭에 구르더라도, 네가 살아만 있어준다면 내겐 그곳이 천국일 테니까.


그래도 꼭 가야만 한다면, 언젠가 내가 죽는 날 달나라에서 마중나와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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