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역사는 내가 사랑하는 음식에 담겨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극도로 편식하는 아이였다.
마치 입덧이라도 하듯이 물, 김, 밥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하고 김치도 씻어 먹여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역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나는 7살 때 영양실조에 걸렸고, 기가 막혔던 아버지는 어느 날 어딘가에서 구해 온 산삼 뿌리를 내게 건네며 씹어 삼키라 하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그 쓰디쓴 뿌리를 질겅질겅 씹어 꿀꺽 삼키고 난 30분 정도 뒤부터, 뱃속이 텅 빈듯한 느낌, 그리고 그 텅 빈 뱃속의 벽면을 누군가 밥을 달라고 조르며 미친 듯이 긁고 있는 것만 같은 그 느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밥을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허기'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글은 나의 그런 허기를 채워주었던 다양한 음식들에 대한 단편적인 추억을 나열한 것이다.
찬 바람 불 때쯤, 밤늦게 귀가하던 아빠의 손에는 늘 까만 '봉다리' 가 들려 있었다.
그 속에는 아파트 정문 바로 옆에 주차해둔 트럭에서 판매하는 뜨끈한 군밤과 군고구마가 들어 있었다. 까만 봉다리를 들고 퇴근하는 날에는 아빠는 현관문 바로 앞까지 나와 자신을 반기는 나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시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밤 껍질을 까 주곤 하셨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아빠가 어른이라 뜨거운 걸 만져도 뜨거움을 잘 못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아빠의 곁에 바싹 다가앉아,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입을 쩍쩍 벌려대고는 했다. 약간 타서 검은색 그을음이 묻어 있는 군밤과 달디 단 고구마와 함께 했던 겨울밤은 참 오붓하고 따뜻했었더랬다.
서른 남짓한 내 인생에서 막상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아직 함께 살던 시절에, 아빠는 매주 일요일마다 나를 데리고 번화가로 나가곤 하셨다. 그곳에는 커다란 서점이 있었는데, 책을 좋아하던 나를 위해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가러 나와 함께 외출한 것이다.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을 놓고 이번 주에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고심하곤 했다.
어렵게 어렵게 결정한 단 한 권만을 골라 꼭 안고 나오는 길에는 꼭 들르던 아빠의 단골 식당이 있었다. 주물럭을 전문으로 하던 그 집의 주특기는 식전에 챙겨주는 맑은 콩나물국이었다. 맑고 시원한데, 비린 맛 하나 없이 적당히 짭조름했던 그 국물 맛을 나는 참 좋아했다. 그 국물이 너무 좋아서 정작 주물럭을 먹기도 전에 콩나물국 국물만 두 번, 세 번 리필해서 먹기도 했었으니. 그 집은 고기 맛도 상당히 좋았는데,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에 고소하게 무쳐진 얇은 한우 주물럭이 불판 위에 내려질 때 나는 치익-하는 소음이 가까이 앉은 나를 항상 신나게 했었다. 원래 이것저것 즐겨 먹지 않던 입 짧던 내게 그 집의 고기는 특별히 이상할 정도로 맛이 있었기에. 아빠는 주물럭을 먹을 때마다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런 고기는 쌈을 아주 크게 싸야 더 맛있는 거야. 입이 가득 차서 튀어나올 정도로 입에 쌈을 가득 넣어야 복이 있는 거거든."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고기를 먹을 때마다 쌈을 아주 크게, 가득 입에 욱여넣게 된 것은. (비록 입이 짧아 두세 개밖에는 먹지 못하게 되었다 해도 말이다.)
일요일의 만찬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결같은 메뉴였음에도 어쩐 일인지 나는 질리지 않았다. 매주 일요일이면 아빠를 쫄래쫄래 따라나가서 언제나처럼 책을 고르고, 익숙한 식당에 가서 주인아줌마에게 인사를 하고 평소와 똑같이 가득 싼 쌈을 입에 욱여넣는 삶이 마냥 한결같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부턴가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니, 결국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난 다음날, 나는 고모네 집에 위탁되었다.
원래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 말이 맞았는지, 이혼 전후로 아빠가 하시던 사업 또한 고꾸라지며 큰 빚을 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아파서 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동생과도 똑 떨어져 혼자 남겨졌다. 아빠는 어디로 갔는지 좀처럼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가끔가다 한 번씩 전화로 안부를 건네며, 때로는 직접 만나 용돈을 쥐어주고 다시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나는 일요일만 되면 아빠가 그리웠다. 서점 안을 두리번거리며 신이 나서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아빠의 눈빛이, 같이 주물럭을 먹고 집에 들어가던 길, 어머니를 혼자 집에 남겨둔 채 우리끼리 오붓하게 맛있는 걸 먹다 왔다는 걸 대놓고 홍보하는 듯 우리 두 사람의 몸에 희미하게 배어 있던 고기 냄새가 그리웠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아빠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아침부터 설레었다. 무엇보다도, 아빠와 함께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참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 그것은 내게는 더 이상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얼굴은 항상 초췌했고, 어딘지 모르게 꾀죄죄했다. 그때 당시의 아빠의 모습을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과연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녔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까. 그래도 아빠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역 근처를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여러 음식을 맛보게 해주었다. 지금 생각했다면 그 혼자였다면 돈을 아끼기 위해 먹지 않았을 수도 있던 한 끼를, 오직 나와 함께이기 때문에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음식들은 하나하나,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아빠의 꺼칠하게 수염 난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후루룩 들이키던 포장마차의 우동과 갓 튀겨낸 고구마 스틱 튀김의 부드러움.
아빠가 데려간 카페에서 처음 맛 본 버터 바른 토스트의 맛(아빠 덕분에 버터를 빵에 발라 먹으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념장에 담갔다가 뜨겁게 달궈진 불판에 구워 먹던 냉동 대패 삼겹살,
아버지의 단골가게에서 팔던 소고기 주물럭.
가끔은 집에 가는 길에 사서 들려 보내 주었던 피자 한 판과 복숭아 한 상자.
딱 한 번 맛있게 먹었다는 이유로, 나는 4주 연속 계속해서 먹어야 했던 반숙 계란 후라이가 올려진 한 분식집의 김치볶음밥.
가끔씩 가던 안산 외곽의 토종닭 백숙집. (그곳에는 야외에 테이블이 있었는데, 가끔 감나무 바로 아래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푹 익은 감이 고꾸라지듯 테이블로 퍽퍽 소리를 내며 떨어지곤 했다.)
비록 내가 기억하는 이 무렵의 아빠의 행색은 초라하고 얼굴은 꺼칠했지만, 아빠와 밥상을 마주 앉은 그 순간은 오직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빚도, 생활비도, 떨어져 지내는 동생의 소식도 다 잊고 그 순간에는 오직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아빠와 나의 한 끼 식사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음식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많이 먹는지 어쩌는지. 그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는 아빠도 나도 잠시 삶의 짐을 덜어둘 수 있었다. 비록 식사가 끝난 뒤에는 또다시 기약 없는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밥그릇이 바닥을 보이는 순간 애틋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지만서도.
마치 그 시절의 가난이 한이라도 되는 듯이, 지금은 어떤 음식이라도 돈을 아끼지 않고 사 드시는 아빠의 요즘 모습을 보면 저 때의 일과 그 애틋했던 감정들이 오롯이 꿈인가 싶다.
더부살이의 맛, 고모 김치
소파에 누워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커다란 김치통을 무릎에 끼고, 마치 과자를 먹듯이 김치를 흡입하던 때가 있었다. 고모의 손맛이 들어간 김치는 그만큼 맛있었다. (한 때 '전라도 김치'라는 이름으로 잠시 김치 사업을 하기도 하셨으나 곧 접으셨다). 특히 고모의 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었다. 특히 쉬었을 때가 하이라이트였다.
고모는 김치를 푸짐하게 담그시는 편이었기에, 냉장고에 가득 찬 김치가 다 쉬어갈 때쯤이면 김치의 스핀오프 격인 음식들을 선보이곤 하셨다. 돼지고기, 부추, 두부 등을 잔뜩 썰어 넣고 한가득 쪄 주시던 만두. 그 만두를 배가 터질 때까지 입에 넣고 나면 다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등장했던 김치전.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솔솔 나던, 어른이 된 내가 아무리 그 맛을 내 보려 노력해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김치볶음밥. 내가 가장 좋아하던 알타리 김치 무가 물러 터져버릴 것만 같을 때 즈음에 기름을 둘러 몽근하게 지져낸 알타리 무 조림.
이상하게도,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당시의 고모의 김치 맛은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하던 내 처지가 그 맛을 배가해주는 양념이 되어주었던 덕분에 더욱 맛있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내게는 불량식품에 대한 강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굣길에는 용돈을 아껴 사 먹는 짜장 컵볶이와 컵 탕수육, 시리얼 자판기 등 각종 불량식품을 섭렵하는 것은 당시 내 인생의 큰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불량음식에 대한 욕망은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한정된 용돈과 엄했던 어머니의 통제로 인해 실제로 많이 먹지는 못했다. 사실 밥때에는 식사 예절이 너무 엄했던 어머니 때문에 거의 입맛이 없었기에, 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어머니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몰래몰래 끓여주던 진라면 순한 맛을 탐닉하게 되었다. 가끔씩 끓여주던 그 라면은 국물 없이 다 식은 채 면발만 대접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먹으라고 해도 못 먹을 것 같은 그 맛이 그때 당시에는 왜 그렇게 환장할 정도로 맛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사실상 아빠가 가끔 가져다주는 돈으로 고모 댁에서 나 스스로의 생계를 꾸려나가게 된 후로 이러한 인스턴트와 불량식품에 대한 나의 욕망은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주 단위로 소액의 용돈만을 받는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생활비 명목으로 한 두 달치의 용돈을 한꺼번에 받았기 때문에 가끔씩 아빠를 만나고 난 직후에는 언제나 내가 또래 중에 제일 넉넉한 용돈의 소유자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일찍부터 뭘 사 먹는 데 용돈을 많이 할애했던 것 같다.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선 친구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컵라면을 먹었고, 학원에서의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함께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꼭 삼각김밥이나 즉석 부리또 등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입에 물고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더랬다.
성장기에도 나는 동네 슈퍼와 편의점의 매우 충실한 고객이었는데, 집에서 혼자 먹는 밥은 도무지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집 식구들 중 가장 어렸던 오빠는 이미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었고, 나머지 식구들도 다 각자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렸던 나를 늘 챙기며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동생과 내가 헤어져서 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사실 고모네 식구들은 내가 먹을 밥을 늘 준비해 주시긴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집에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때로는 심지어 오빠가 내가 먹을 양만큼 밥 한 그릇을 미리 떠 놓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가 끝나고 돌아와서 보는 텅 빈 식탁에 덩그러니 놓인 밥 한 그릇은 집에 오는 내내 턱 끝까지 차올랐던 허기조차도 순식간에 잊게 만들고는 했다. 나는 밥그릇에 담긴 밥을 고스란히 다시 전기밥솥에 엎어 놓고는 - 후에 반드시 오빠에게 들통나 한참 잔소리를 듣고는 했지만 - 찬장에서 라면봉지를 꺼내 라면을 끓였다. 매일매일 다른 라면이었다. 김치라면, 육개장, 비빔면, 짜파게티, 생생우동 등... 당시에도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 나오는 라면이란 라면은 다 사 먹어보고는 했다. 때로는 주말에 모처럼 모인 고모나 식구들이 밥을 먹으라고 해도 혼자 새초롬하게 새로 나온 라면을 먹어봐야 한다며 끓여 먹고는 했었다. 심지어 간식으로 생라면을 과자 먹듯이 먹기도 했다. (중간에 치아 교정을 하던 3년 동안은 못 먹었지만) 어른들이 보면 혼내니 방에서 문을 잠그고 혼자 몰래 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시세끼 라면을 그렇게 끓여먹었는데도 전혀 탈 나지 않던 내 젊음이 그립다. (지금은 장이 예민해져 한 달에 한 번 끓여먹기에도 조심스러운 음식인데..)
나의 인스턴트 사랑은 대학에 입학하여 혼자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시작한 시절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대학 시절에는 그야말로 안 먹어본 음식이 없을 정도로 편의점 음식을 좋아했다. 이제 더 이상 식구들의 눈치도 볼 필요도 없겠다, 나는 맘 놓고 인스턴트의 세계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집에 전자레인지를 사 둔 것이 원흉일지도 모르나, 비겁한 변명으로 들릴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냉동만두를 즐겨 먹었는데, 리포트를 쓰다 늦은 밤이나 힘든 날에는 꼭 '샤오롱'이라는 냉동 만두를 데워먹고는 했다. 전자레인지에 딱 3분만 돌리면 고소한 육즙 냄새와 함께 뽀얀 모습을 드러내던 만두들.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계속해서 찾게 되던 그 마성의 맛은 나중에 실제로 딘타이펑이나 싱가포르에 놀러 가서 먹었던 '리얼' 샤오롱바오로도 쫓아갈 수 없는 맛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20대에 들어서 완연히 꽃 피운 나의 인스턴트 사랑은 후에 여행을 다닐 때에도 종종 맥락 없이 불쑥불쑥 그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는데, 그것은 현지 물가와 맞물려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에서보다 값이 4배나 뛴 짜파게티 한 봉지를 어렵게 구매하여 한 달 정도를 쳐다만 보며 소중히 품고 있다던지, 새벽에 추위에 떨며 도착한 바라나시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으로 라면 한 그릇을 주문했는데, 물의 양이 터무니없이 많은 라면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던 일 등.
나이가 들어서인지, 혹은 어린 나이에 남들이 평생 먹을 양만큼의 인스턴트를 이미 섭취해 버린 탓인지 요즘은 오히려 그렇게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요즘에도 편의점마다 만들어내는 신기한 인스턴트 음식들을 모아놓으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요즘에는 심지어 그러한 편의점 음식끼리 모아서 각종 콜라보(!) 레시피가 나오지 않는가. 그런 것들을 북마크에 수집해 두는 은밀한 취미도 생겼다. 비록 너무나 자극적일 것 같아서 한 번도 해 먹어 본 적은 없지만.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해당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 생기는 것 같다. 매일 보고, 냄새를 맡고, 가까이서 서빙하는데 정작 그 음식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고 옮기는 나는 그 음식을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일이 끝난 다음에 바로 손님으로 둔갑하여 방금 전까지 일하던 레스토랑에 앉아서 그 음식을 주문해 먹는 것도 어쩐지 껄끄러웠다. 그저 그 음식들에 대한 막연한 갈망만을 키워나갈 뿐인 것이다.
내 인생의 첫 아르바이트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짝사랑의 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매콤한 소스의 아라비아따 스파게티, 맞은편 절에서 오던 땡중이 시켜먹던 매운 해물찜에 생맥주 한 컵, 느끼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확 올라오는 해물 그라탱 (가끔 여사장이 점심시간에 혼자 시켜 먹기도 했다), 하루 판매 개수가 한정되어 있던 라자냐, 손님에게 리필 요청이 오면 가져다 드렸던 직접 만든 오이피클 (이건 점심시간에 아르바이트생들이 모여 밥을 먹는 테이블에도 제공이 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갈망이 크진 않았다.), 닭가슴살을 롤로 말아 만든 상큼한 샐러드, 화덕에 구워내던 뒤판에 기름기 하나 없던 정통 이태리식 피자 등, 그 식당에서 판매하던 음식들에 대한 호기심에 상사병을 앓았다. 후에 비슷한 다른 식당에서 비슷한 음식들을 사 먹는 것으로 나름 그 굶주림을 채웠던 것 같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한 지 10년이 지난 요즘은 가끔 그 식당에 직접 가서 해당 메뉴들을 직접 두근거려하며 먹어보기도 한다.)
이후로 다른 아르바이트들을 시작하며, 이와 같은 나의 '짝사랑'의 리스트들은 점점 늘어났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 음식들을 만지고 있지만, 정작 내가 배가 고픈 순간에는 입에 넣을 수 없던 그 음식들.
선릉역의 샌드위치 카페에서 일할 때 매일 만들었던 샌드위치 6종과 과일주스 등은 요즘 가끔 집에서 직접 해 먹기도 한다. 6개월 동안 하도 많이 만들어서 그 레시피가 아직까지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까지도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고 계속해서 생각나는 음식들은 호주에서 일했던 카페 겸 레스토랑에서 내가 직접 서빙하던 음식들이다.
얼음 대신 아이스크림으로 시원한 맛을 낸 호주식 아이스커피와 밀크쉐이크,
한 입만 살짝 깨물어도 몸서리 끼치게 달달한 캐러멜 슬라이스와 커피 로프,
언제나 신경 써서 장식하던 레몬라임 비터,
고객들의 식탁에 서빙하러 갈 때마다 시선을 뗄 수 없던 고운 자태의 에그 베네딕트,
카페 유리창에 그려 넣을 때마다 호평을 들었던 서프 & 터프,
중국인 푸드코트 주방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둘러앉아 싸던 딤섬,
아르바이트하던 날 점심으로 먹던 미트파이,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때마다 해 먹었던 토마토 해산물 수프,
한국의 맛이 그리울 때마다 해 먹었던 간장 파스타 등.
사실 호주에 있던 내 상황이 한국에서의 내 삶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각박했기에 그 음식들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당시 '돈을 모으겠다'는 목적 하나로 어떻게든 악착같이 휴일도 없이 일했다. 비록 돈은 벌고 있었다고는 하나, 비싼 물가에 허덕이며 나 자신에 대한 투자는 전혀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일주일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가게에서 남은 음식 내지는 파스타 소스에 삶은 면을 (그곳에서는 파스타 면이 제일 싼 음식에 가까웠다.) 비벼 먹으며, 외식 및 소핑은 꿈도 꿀 수 없이 하루하루 그저 살아내기에 바빴던 날들이었다. 한 푼도 아쉬운 입장에서 돈을 쓰는 것 자체가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언제나 가까이 있었지만, 결국은 가까이할 수 없었던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의 음식들이 가장 강한 아쉬움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 머릿속에 그 레시피들이 아직 남겨져 있는 탓에, 가끔씩 호주에 있던 시절에 먹고 싶어도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을 직접 해 먹어 볼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때 못 먹었던 것을 지금에라도 어떻게든 먹어보기 위해 요즘에도 몇 번씩 외국 식재료 코너를 둘러본다. 당시에 돈 아끼느라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마음껏 먹고살지 못했던 스물두 살의 나에게, 이렇게 직접 만든 음식으로나마 위로와 격려를 전할 수 있다는 것. 그만큼 충실히, 잘 살아서, 그 갈망들을 꾸준히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내 입에서 느끼는 맛으로 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워하며, 그와 함께 인생의 어느 순간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하는 맛.
'소울푸드'란 그렇게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음식을 지칭하는 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 삶은 내가 사랑하는 음식이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세끼 몇십 년을 계속 먹어오고 있습니다. 그 식사의 모음이 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과 먹는 것은 따로 뗄 수 없지요. 식사는 그 사람이 살아온 ‘풍경’ 안에 있는 것입니다.
- <잘 먹고 갑니다> 저자 아오야마 유미코,
"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음식은?"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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