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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pr 02. 2017

서른, 삶은 유한하다.

지평선 너머, 어렴풋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겁이 없다고들 한다. 그들의 자신감의 원천은 아마도 '시간'이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10대에는 보통 노화를 겪지 않는다. 하루하루 그들은 더 생기 있어지고, 전날보다 더 강해진다. 부모님도 아직 젊고, 죽어서 그들 곁을 떠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아마 그들은 그들 모두 언젠가는 나이 들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않고 인생을 한껏 즐길 것이다. 그것이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그들은 인생 앞에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1995년, 나는 죽기 싫어 울던 어린아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각한 때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아마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이야기』와 같은 세계의 미스터리를 모아둔 어린이용 책에 나와 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읽고 나서였다. 그 책에는 저명한 예언가였던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 8월 18일(아직 날짜도 기억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나는 그가 맞췄던 책의 내용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 부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먼 거리의 서점까지 걸어가서 990페이지가 넘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라는 책까지 샀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 읽기에는 엄청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읽고 싶은 부분만 발췌해서 보긴 했지만, 어찌 됐든 결론은 1999년 8월 18일, 태양계의 행성이 거대한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고 그 날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내 인생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니!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나는 저 사실을 깨닫고는 집 화장실 변기에 앉아 펑펑 울었다. 9살의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라고 미치도록 생각하며, 내 삶이 소중하며, 불과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 나이에 죽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 유년기의 삶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알게 되기 전과 알고 난 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그것도 8월 18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는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팩트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은 우울하고, 특이한 아이가 되었다. 다시 돌이켜봐도 '어차피 우리 6학년 때 지구는 멸망할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종말론에 빠져 있던 나는 정말 음침하고 특이한 아이였다. 무엇을 해도, 어떻게 살아도 3년 뒤에는, 2년 뒤에는, 올 8월에는 우리 다 같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우울해 미칠 것 같았다. 그래도 매일의 일상은 어떻게든 살아졌고, 나는 정말 친한 친구들에게만 비밀처럼 '사실은 1999년 8월 18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얘기가 있다'는 것을 은밀히 알려주곤 했었다. 만약 요즘 시대에 나 같은 초등학생이 있었다면 아마 왕따가 됐을 것이다.



1999년 8월 18일, 나는 죽음에서 1차적으로 해방되었다. 


마침내 다가온 1999년 8월 18일. 나는 8월 17일 저녁부터 이미 죽을 각오를 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지는 죽음이라면 나는 그 순간에 그저 잠들어 있기를, 그래서 그 모든 고통의 지옥을 보지 않고 편안하게 죽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8월 18일의 아침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고, 저녁까지도 아무 일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어느 순간에 찾아오게 될지 몰라서 하루 종일 몸을 움츠리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계침은 무사히 8월 19일 자정을 가리켰다. 


바로 그때부터 나는 내가 원치 않는 강제적인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 

1999년 8월 19일 이후의 나날들은 하루하루가 마치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 같았다. 원래 기대하지 않았던 날들이었기 때문일까. 하루하루가 달콤하고 친구들, 가족과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종말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죽지 않아도 된다!라는 생각에 나는 가득 취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유년 시절의 내게 잠깐 드리워졌던 '죽음'의 그림자는 내 인생에서 잠시 자취를 감췄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2014년 4월 16일의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스물여덟이었다. 신체적으로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당시의 나에게는 아직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없었던 것이다. 출근길에 보게 된 뉴스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곧이어 뜬 '전원 구조'라는 속보에 안도할 뿐이었다. 거기까진 그냥, 늘 보던 뉴스들처럼 '타인의 일'일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건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타인'의 일에 불과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범죄 기사의 피해자나, 운전할 때마다 간선도로 전광판에 표시되는 교통사고 사망자 / 부상자 숫자는 그야말로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기사가 오보로 밝혀지고, TV에서 다급한 듯 진도 앞바다 생중계를 시작할 때. 배가 완전히 전복되고, 


날이 점점 어두워져 갈 때. 그 아이들이 내가 어린 시절 20년을 살았던 동향의 고등학교 재학생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배 안에 갇힌 그들과 나 자신의 연결고리를 발견했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문득, 그 순간 나를 압도해왔다. 


나 또한 그들처럼, 언제든 죽어 없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배 안에 갇혀서 무력하게 수장되고 있는 사람들,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죽음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다가가는 사신의 칼날이 아니었다. 


그냥, 한 순간에, 여행을 가다가, 저렇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서도, 얼마든지.



그리고 서른, 요즘 나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2년 뒤, 나는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죽음을 내 눈 앞에 닥친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공포로 느끼고 있다. 다만, 세월호는 내가 '죽음'을 실재하는 공포로 마주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긴 했지만 유일한 계기는 아니었다.


불특정 여성을 향한 폭력인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다. 원전이 가득 몰려 있는 경주 지역에서는 지진이 발생했다. 부산 지역에 가스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고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문제 아니었나? 퇴사하고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내 몸이 이미 방사능에 오염된 건 아닐까. 고모부의 갑작스러운 폐암 투병 소식이 있었다. 정정하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한쪽 가슴에서 암세포일지도 모르는 수상한 혹이 발견되었다. 예전보다 기력이 딸린다. 매운 음식, 날음식을 인스턴트 음식을 소화하기 버거워졌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죽을 듯이 아프다. (아마 어릴 때 너무 몸에 안 좋은 간편식을 맘껏 먹으며 몸을 한껏 혹사시켰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 번 아프면 회복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병원에 가도 아픈 게 잘 낫지 않는다. 20대 때는 '젊으니까 괜찮을 것'이라며 대충 보고 넘어가던 의사 선생님들도 삼십 대에 접어드니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요즘은 삼십 대들도 이런 병이 많아서요.' 하며 정밀검사를 권한다. 쉽게 피곤해지고, 피부 탄력이 예전 같지 않다. 웃을 때 주름이 신경 쓰이고, 처지는 살이 신경 쓰인다. 운동을 하지만 별로 근육이 붙지 않는다. 내 체력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줄어드는 내 체력과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죽음'이라는 결과에 대해 자꾸만 떠올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삼십 대,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된 궤도에 올라 패턴화가 되어버린 탓일까. 매일의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며, 이대로는 사십 대, 오십 대도 금방이라는 위기감이 본격적으로 느껴진다. 


서른이 되어 삼십 대에 처음 접어든 후의 1년이 정신없이 빠르게 느껴졌는데, 어느새 서른 하나가 되어 마치 거짓말 같은 4월 1일을 맞았다. 1년을 4개의 분기로 나누어 돌아가는 직장 생활의 리듬상, 나는 이제 1년에 개당 3개월짜리의 4주기를 방학 없이 살아내는 것 같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마흔이 되고, 50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아찔하다. 사실 3분기만 돼도 다음 해 사업을 준비하지 않는가. 


연애가 길어지고 결혼이 다가올수록 다가올 삶의 변화와, 몸의 변화를 초래할 출산이 걱정되는 마음도 그만큼 강해진다. 이미 삼십 대에 접어들어 날이 갈수록 약해지기만 하는 체력과, 목숨 걸고 아이 갖기가 아직은 무서운 마음이 모순을 일으키며 부딪힌다. 사실 내가 아이를 원하는지조차 모르겠다. 다만 내 생물학적 나이와, '아이를 낳기 좋은 적령기'를 스스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나이에 쫓겨 고민하는 것일 뿐. 

아이를 낳은 후에 변하게 될 내 몸이 두렵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고, 찢어질 골반 근육과 늘어질 살들과 가슴이. 급격하게 시릴 뼈마디와 한 순간에 찾아올 노화의 증거, 결코 예전 같지 않을 내 피부. 무엇보다 '나'라는 개체가 아닌 'XX 엄마'로서 존재하게 될 나 자신에 대한 이른 슬픔(아무래도 『82년생 김지영』을 괜히 읽었나 보다) 등. 왠지 앞으로 결혼하고, 출산을 경험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급격하게 더 '죽음'에 가까운 모습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뭐랄까, 아름다운 지평선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지평선의 끝에는 절벽이 있는데, 난 마치 동화 속의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리가 아파도 멈춰 쉴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의 길은 여태까지의 길보다 훨씬 힘들 것을 알면서도 그저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평선의 끝, 절벽 앞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결국 그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한 발 한 발, 매일 나는 죽음으로 가까이 걸어 들어가고 있는 죽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이런저런 생각들로 꽤나 우울하다. 20대 때는 내가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30대에 들어서는 내가 '죽어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차피 주어진 인생, 주어진 시간. 내가 피하거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우울해해 봤자 도움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쩐지 내 앞날에 대한 우울한 상념을 접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있다. 


언제 불현듯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언젠가는 나보다 먼저 떠난다는 생각에, 혹은 내가 떠난 후 남겨질 거라는 생각에.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소보다 더한 연민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린 겨울밤도 아닌 봄날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윤동주의 시 구절이 유독 가슴에 박히는 걸 보면.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왠지 인정하기 싫어 인생에게 떼쓰는 마음으로 우울함을 겪는 것을 보면. 어찌 보면 나는 이제야 뒤늦은 '서른 병'을 앓는 게 틀림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Cover image by Sak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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