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해 온 아빠의 말
나는 8살 이후로 아빠와 같이 산 적이 없다. 엄마가 집을 떠나고, 아빠의 번창하던 사업이 한순간에 망했던 그 날. 그 날 이후로 내 인생은 단 한 번도 이전과 같았던 적이 없었다.
이전에 한 번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 있었듯이, 아빠와 나는 한, 두 달에 한 번 밖에서 만나곤 했다. 나는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하교 후에 매일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엄마 아빠와 시시콜콜하게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불쑥 연락이 와 나간 자리에서 만난 꺼칠한 얼굴의 아빠와 허름한 식당에서 마주 앉아 그동안 밀린 얘기를 종알종알 털어놓는 시간은 다른 어떤 가족도 아닌 오직 우리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무척 특별한 것이었다.
내가 털어놓는 한 달 내지 두 달치 밀린 학교 생활과 내 최근의 생활, 관심사 등의 이야기를 아빠는 대부분 묵묵히 들어주는 편이었다. 가끔씩은 먼저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에 와서도 언제나 기억에 남는 것은 내 학창 시절 동안 아빠는 단 한 번도 내게 성적에 대한 질문 -"공부는 잘하고 있니?", "이번 시험은 잘 봤니?" 같은 - 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빠가 묻는 것은 항상 내 교우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최근에는 누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학교에서 나의 캐릭터는 어떤지. 내가 시험을 잘 봐서 자랑이라도 하면, 아빠는 그저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만점짜리 성적표를 가져가도 좀처럼 기뻐하질 않으니, 정말 이상한 아빠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아빠의 입장에서는, 평생 스스로 학문적인 '공부'를 잘해서 뭔가를 이루고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기에, 공부와 성적이라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것에 불과했지만. 심지어 지망하던 대학 합격 소식을 알려줘도 그저 '어, 그래'라는 말을 하는 그의 무심함에는 딸로서 조금 서운하기도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0대 시절 아빠가 내게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였던 것 같다. 아빠는 내가 쪽지시험에서 100점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새로운 친구를 한 명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더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의 아빠는 항상 그런 이야기를 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돼. 친구들한테 잘해줘야 하고, 사람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해. 결국에는 남는 것도 사람이고, 중요한 것도 사람이야.'
그러고 보면 아빠는 사업이 망해서 힘든 상황에서도, 아빠가 사업이 잘 되고 잘 나갈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어떻게든 버텨나가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 안 좋아지며 금방 버리고 떠나버린 사람도 있었지만, 아빠의 상황을 알면서도 곁에 남아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그런 경험을 통해 느꼈던 '사람'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빠는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한창 커 나가는 10대 시절, 우리가 식사를 나누며 함께 마주할 수 있었던 그 짧은 시간들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나에게 자신이 얻은 지혜를 전파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리라.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의 경제적 상황은 그닥 호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새 다 큰 스무 살이 되어버린 날. 20대의 처음, 나름대로 어른인 체해보려고 어색한 디지털 파마로 머리를 부풀리고 귀를 얼얼하게 뚫은 채 어른 아이처럼 엉성하게 앉아있는 내게, 아빠는 이제 청소년이 아닌 어른으로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을 알려주겠다며 이 한 가지만 기억하라고 말했다.
"학생 때는, 공부할 때는 '컨닝'이라는 걸 하면 안 됐지?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달라. 앞으로는 살아가려면 무조건 '컨닝'을 잘해야 해!"
학교에 다니던 12년을 컨닝이라는 말 자체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지조차 않은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말이었지만, 아빠가 말하는 '컨닝'의 의미는 일반적인 것과는 좀 달랐다.
"앞으로 학교를 나와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을 거야. 네가 봤을 때 다른 사람의 모습이 좋아 보이면, 그걸 무조건 '컨닝'해. 다른 사람의 좋아 보이는 행동을 너도 따라 해 보고 그렇게 네 걸로 만들어 봐."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좋은 부분을 컨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 좋은 점을 컨닝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다. 좋아 보이는 것은 따라 해서 내 걸로 만들되, 안 좋은 점을 보고서는 '나는 저렇게 행동하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되새기는 식으로 역으로 컨닝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후로, 내가 20대를 지나오며 마주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에서 언제나 중요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물론, 아빠의 말처럼 척척 행동이 바뀌고 컨닝한 행동이 체화되었다면 무척 이상적이었겠지만... 대부분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도, 누군가의 좋은 행동을 볼 때마다, 혹은 좋지 않은 행동을 볼 때마다 아빠가 강조한 '컨닝'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다. (지금 와서 돌아봤을 때, 결과적으로 아빠는 나에게 효과적인 '인셉션'을 했던 것 같다.)
되든 안되든, 컨닝을 해야겠다고 노력하고 타인을 의식했던 그 시간들이 마냥 의미 없이 흘러가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한다. 10대 때까지만 해도, 다른 학생들과 다른 나 자신의 성장 환경으로 인한 자기 연민에 젖어 오직 나 자신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며 살아왔던 내게, '컨닝'은 내 인생에 얽히는 여러 사람에 대해 나 스스로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타인의 좋은 습관들이 이후로도 좋은 영향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이 빠르게 흘러, 나는 30대에 접어들었다. 어린 시절, 나름 집안이 기울고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던 적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면 노력하는 대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며 살아왔던 내게 30대는 결코 쉽지 않은 시기였다. 살다보면 인풋과 아웃풋의 결과치가 언제나 비례하지는 않으며,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도 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황에서 고꾸라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한 방면에서 뼈아프게 체감하게 된 힘든 시기였다.
특히 30대 초반에 있었던 일련의 실패들과, 결혼하려던 연인과의 급작스러운 이별로 인해 한껏 의기소침해져 있던 어느 날. 나는 아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는 내 인생에서 아마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없을 것 같아. 아빠는 항상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여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기를 바랐지만, 이젠 나는 내가 도저히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래서 미안해.."
내가 우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아빠가 불쑥 이렇게 물어왔다.
의아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얘긴가 싶어서 보니, 아빠는 어느새 앞에 놓인 종이에 펜으로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무지개를 보통 '빨주노초파남보'라고 하잖아? 근데 사실 실제로 무지개를 보면 그 7가지 색이 다 뚜렷하게 보이는 경우는 많이 없어. 그냥 사람들은 어릴 때 '빨주노초파남보'라고 배워서 그런 줄 아는 거지. 어떤 무지개는 파란색이 빠져있고, 어떤 무지개는 보라색이 안 보여. 그래도 그게 무지개가 아닌 건 아니잖아? 빨주노파 무지개도, 빨노파초 무지개도, 멀리서 보면 다 예쁜 무지개야."
"인생도 마찬가지지. 사람들을 보면, 남들을 보면 누구나 다 모든 걸 이루고 사는 것 같을 수 있어. 직장도 있고, 배우자도 있고, 자식도 있고, 돈도 있고..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도 자세히 보면, '빨주노초파남보'같은 완벽한 무지개는 아닐 수도 있는 거야.
누구나 인생의 무지개에서 몇 가지 색은 빠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운 좋아서 빨주노초파남보가 다 보이는 사람도 있고, 몇 가지 색이 빠진 사람도 있고. 그래도 무지개가 예쁘지 않은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네 인생의 무지개에서 남편과 자식이 없다 해도 괜찮아. 다 갖추지 않아도 괜찮아. 몇 개의 색이 빠졌더라도, 그냥 다른 색으로 너의 무지개가 예쁘고 행복하기만 하면 돼."
30대가 된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빠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내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이것은, '노력하면 못할 게 없다'라고, 실패를 모른 채 마냥 패기에 넘쳤던 10대, 20대의 나에게 들려주기에는 오히려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어느 정도 알게 되고, 가끔씩은 실패에 직면하기도 하는 30대의 내가 되어서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이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는 매 단계에서, 그때마다 이렇게 아빠는 항상 내게 가장 필요한 말들을 들려주었다. 나보다 30년 정도 먼저 그 시기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시점의 삶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무심한 듯 툭, 던져주는 느낌의. 그런 점에서, 아빠는 나의 책이었고, 멘토였고, 후원자였으며,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이기도 했다. (누가 보면 '파파걸'이라 할 정도로, 나에게 있어 아빠의 말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빠였고, 중요한 순간마다 삶의 지침처럼 떠오르는 것은 아빠의 지혜롭고 따뜻한 말들이었다. 어려운 순간에 나를 지탱해주었던 아빠의 소중한 말들이, 나의 글이나 말을 통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 글을 써서 남긴다.
지금 혹시 당신의 마음에서 스스로의 무지개가 불완전해 보인다면, 조금은 멀리서 자신의 무지개를 바라봐주는 것이 어떨까? 어떤 무지개에든, 무지개에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각각의 경이로움이 있으니까. 당신의 무지개도 몇 가지 색이 빠진 나의 무지개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당면한 인생의 문제나 결핍감이 어차피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꼭 '빨주노초파남보'를 다 갖춰야 한다는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니어도 괜찮다' 고 한 번 스스로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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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40대에도, 50대에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지탱해 줄 말을 좀 더 들려줄 아빠가 오래오래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