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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Sep 12. 2021

[10줄 문학] 소개팅, 개의 날

2021년 9월 6일 ~ 9월 10일

1. 괜찮아, 인간미 있었어


전 직원 재택 근무 중, 급하게 인수인계를 할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다른 직원에게 영상통화 및 원격 화면 공유로 인수인계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영상을 녹화하겠다 했다.


비대면 인수인계라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1시간 여에 걸친 인수인계는 무사히 끝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녹화 뜬 영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의 영상이 나타난 것은 다음날이었다.


이상한 것은 영상의 러닝타임이 무려 4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원격 연결을 제대로 종료하지 않았던 것인지, 4시간짜리 영상에는 1시간 인수인계 후 3시간에 걸쳐 이어진 나의 일상이 전부 녹음되어 있었다.


TV 소리, 밥 먹는 소리, 혼자 유튜브 보면서 꺅꺅대는 소리, 운동하는 소리.....


그 날부터 나는 자다가도 하루에 열댓 번씩 이불을 걷어 차는 중이다. 


'괜찮아, 제법 인간미 있었어...'라고 정신 승리 해보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2. 수시 합격자의 기분


이 달 말, 나는 이번 생에서 3번째의 퇴사를 앞두고 있다.


퇴밍아웃을 하고 나자, 한 동료가 내게 물어왔다.


"퇴사 날짜를 받아 놓고 회사에 다니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나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일반적으로는 1차 수시 합격한 고 3의 기분에 가까워요."


일단 대학은 붙어 놨고, 더 이상 정시를 보기 위한 공부는 안 해도 되지만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 학교에는 계속 나와야 하는 상태. 


야자도 빠지고, 수업 시간에는 구석에서 맘편히 소설책이나 만화책을 보던 그 친구들이 그 땐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런데 그렇게 대답해놓고 나니까 그것은 막상 내 케이스와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수시 합격자들은 고등학교에 졸업하고 나면 갈 대학이 있었으니, 그 상황은 이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좀 더 적합한 비유가 아닐까.


이직처 없이 그냥 퇴사하는 나는 음...수시 합격자라기 보다는 말년 병장에 가까울지도?




3. 소개팅, 개의 날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불쑥 연락이 왔다.


"너 소개팅 할래?"

"ㅇㅇ 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 사인을 날리자마자 한 시간도 안되어 2살 연하라는 상대방으로부터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잠시 인사를 주고 받고 스몰토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내게 강아지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와다다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멍멍, 안녕하세여 저는 ××형아가 키우는 강아지 복실이에요."


"우리 형아는 진짜 완전 멋지구 정말 착해서 저한테 너무너무 잘해준답니다."


"그런 우리 멋진 xx 형아가 누나 사진이 너무 보고 싶다는데 한 장만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ㄴㄴ

차단.




4. 변화구에 약한 편


초등학생 시절, 친구와 골목길을 지나다 어떤 언니들한테 붙잡혔다.


"야, 니네 돈 좀 있니?"


딱 봐도 삥뜯길 시추에이션이라는 것을 간파한 나는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더니 한 언니가 갑자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어왔다.


"다른 건 아니고 내가 지금 집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 공중전화비가 없어서... 딱 50원만 빌려주면 안될까?"


그 말에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을 다 꺼냈고, 내 손바닥 위엔 총 350원이 있었다.


나는 그 중에 50원짜리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언니에게 건넸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았고, 언니들은 350원과 함께 피식 웃으며 멀어져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때 내 옆에서 달달 떨고 있던 친구 주머니에 있던 만원은 지켰다는 것이다.




5. 커피 반잔


"너를 위해서 아메리카노 반잔 사이즈를 팔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카페에 갈 때마다, A는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 때의 나는 지금보다 입이 짧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면 거의 반을 남기곤 했다.


A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B를 만났다.  


여전히 나는 입이 짧았고, 음료 한 컵을 시켜도 여간해서는 다 마시지 못했다.


"너는 내가 커피 시키면 아깝지 않아? 반이나 남기는데."


"뭐 어때, 먹기 싫으면 남겨."


대수롭지 않은 그의 말에 순간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 마실 수 있게 되었다.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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