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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Sep 19. 2021

[10줄 문학] 오른손잡이의 사랑

2021년 9월 13일 ~ 9월 17일


1. 오른손잡이의 사랑


나는 오른손잡이다.

너의 시선은 항상 나의 오른손을 향한다.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적어 조금 더 안정적으로 있을 수 있는 왼손으로 너를 옮겨두어도,

너는 나의 애정을 확인하듯 끊임없이 내 오른손 위로 올라온다.


그러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쉴틈없이 쪼아댄다.


가만히 있을거면 왼손에 가만히 있던가, 지가 좋아서 오른손에 올라왔으면 쪼지를 말던가.


나의 반려조는 가끔씩 이렇게 동거인의 무한한 애정과 충성심을 시험한다.


얼마 전에 읽은 <연을 쫓는 아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For you, a thousand times over!"


지금도 내 오른손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아 날개죽지에 얼굴을 파묻고 잠든 너를 보며 생각한다.


너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오른손을 양보할 수 있는 이 마음이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최대치의 사랑이겠지.




2. 최애의 순기능


최근 물건너 해외 연예인을 덕질하고 있다.


문제는 그와 나의 취향이 정반대라는 것인데, 덕질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가 좋아하는 것들까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나는 그로부터 오버사이즈 맨즈 티셔츠와 나이키 바람막이, 블랙 앤 화이트 톤 패션을 손민수했다.


전에는 하나도 예뻐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내 옷장을 채우고, 그것들을 하나 둘씩 입어보면서 거울을 볼 때면 왠지 그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등요.


악세사리 하는 남자는 싫어했는데,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크롬하츠 반지는 어쩜 그리 예쁘던지.


그가 모델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생전 머리 아파서 안 쓰던 향수까지 사서 뿌리는 내 모습을 보면 이런 게 바로 최애의 무시무시한 위력인가 싶다.


지극히 편협하고 자아가 강한 나로서는 어쩌면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손민수가 되지 않고서는 취향을 확장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내 최애는 대단해.


그리고 덕질은 확실히 인생에 이로운 것이다.




3. 홈런볼 의전


인도에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인도에서 두 달을 구르며 매우 거지같은 상태로 진화해 있었고, 한국 음식이 매우 먹고 싶어진 상태였다.


인도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 중에 나보다 한 달 정도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는 친구가 있었다.


난 그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다시 보는 그 날 내게 홈런볼 하나를 사다주오"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인도에서의 모험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의 문을 열고 나간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친구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노래방 사이즈 홈런볼이었다.


나는 순간 모든 피로를 잊고 그와 그가 흔드는 홈런볼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다.


그것은 꽃다발도 아니고, 내 이름이 써진 플래카드도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 받아 본 최고의 의전이었다.




4. 나홀로 상황극


허리를 다쳐서 한의원에 갔다.


내가 하도 주기적으로와서 의사 선생님은 이제 나를 완전히 기억하는 거 같다.


이번에도 허리를 삐끗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내게 침을 놓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되도록 걸으시면 안 돼요."


아니 내가 직장인인데 어떻게 걷지 않는단 말인가.


걷지 않고 이동하는 방법이 있으면 말해주던가.


그렇게 불퉁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그럼 전동 휠은 타고 다녀도 되나요?"


....라고 되받아치고 싶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망상이다.


그래도 저렇게 한번 말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집에 가는 길 내내 낄낄거렸던, 시덥잖은 날이었다.




5.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오늘, 퇴사를 앞두고 책상을 정리했다.


책상에 있던 물건들 중엔 5년 전에 입사를 하며 갖고 온 것들도 좀 있었다.

 

전 회사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애착 포스트잇, 보고 싶어서 놓아 둔 사진, 예뻐서 사 놓고 아껴썼던 메모지, 펜 등등...


포스트잇과 메모지라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두꺼운 것인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각종 포스트잇의 절반도 채 다 쓰지 못했다.

 

심지어 메모지 하나는 너무 아꼈던 나머지 한 번도 뜯기지 않은 비닐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은 길었지만, 어떤 물건들에게는 이렇게 그저 한 순간처럼 박제된 시간들이었다.

 

마치 <스토너> 의 '인생이란 것은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했다'는 대사처럼.


그래도 조금은 변한 것이 있다면 형광빛으로 새하얗게 빛나던 색이 조금은 바랬다는 것.


더 이상 흰 색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다른 색인 그 색만이 시간이 흘렀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나는 변한 것일까, 변하지 않은 것일까.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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