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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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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Oct 02. 2021

[10줄 문학] 아빠가 말하는 대로

2021년 9월 23일 ~ 10월 1일


1. 세계의 끝에서


전쟁이 나거나 지구가 망할 때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1빠로 죽는 것이다.


갑자기 닥친 재앙 속에서 어설프게 살아남아서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싫다.


차라리 어느 날 문득'어 저게 뭐지?'가 마지막 생각인 채로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내 존재가 소멸되길 바란다.


재수가 없어서 살아남게 된다면, 차후의 수단으로는 머리를 깎고 수염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탈레반이 카불에 다시 입성한 날, <천 개의 눈부신 태양>을 읽었다.


출근길 유튜브에서는 살기 위해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하는 아프간의 소녀들을 보았다.


나에게는 반쯤은 농담인 일들이 그들에게는 현실이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나는 커다란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봤을 때와 같은 무력함을 느낀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단지 운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가 만일의 사태에 바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빠른 죽음일 뿐인 것이다.




2. 텔레파시


나는 강남이 싫었어.


너 완전 강남 스타일이잖아.


왠지 강남에 오면 너를 한 번은 꼭 볼 것 같았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포마드...잘 어울린다...


나 사실 너 얼굴 보고 좋아했는데... 솔직히 다시 봐도 좀 잘 생겼네.


아무래도 난 틀렸나 봐.


한때 우리는 뇌가 동기화된 것처럼 텔레파시가 통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내가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도 너는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옆에 여자친구..예쁘네.


잘 해줘라, 짜식아.




3. 백신 사후 케어 서비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2년쯤 지난  2021년 가을 무렵,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이 2차 접종을 진행할 시기가 되었다.


다만, 화이자 백신의 경우에는  2차 접종이 완료된 후에도 그 효능은 두 달마다 6%씩 낮아진다는 임상실험 결과가 있었다.


이에 이미 백신 2차 접종까지  완료한 모든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매년 일정한 시기마다 부스터샷을 추가로 접종해야 했다.


다만 백신의 강도가 세다 보니 백신을 접종한 뒤 2,3일 간은 열이 오르거나 몸이 아프기도 하고, 때에 따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수도 있었다.


백신 부스터샷이 일상화되자, 이런 고강도의 백신을 주기적으로 접종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맞춤 서비스가 발빠르게 등장했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백신 조리원'이라 불리는 요양 시설에 들어가 도우미의 케어를 받으며 3일 정도를 푹 쉬다 나오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돈이 많은 부유층의 사람들은 아예 집으로 백신 사후 케어 도우미를 들여 맞춤형 케어를 받았다.


1년에 한 번,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누워서 주기적으로 제공되는 식사와 간식을 먹고, 모든 집안일이나 업무로부터 해방되어 평온한 휴가를 즐겼다.


이 서비스는 가족이나 따로 돌봐줄 사람이 없는 독거인들이 주로 이용하곤 했지만, 이후 점점 타겟이 확장되어 백신 휴가를 온전하게 휴일로만 보내고 싶은 사람들 또한 이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휴가가 너무도 달콤하여,  코로나19가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부스터샷을 맞을 수 있다면 하는 희망을 품기도 하는 것 같다.





4. 아빠가 말하는 대로


평소 나는 맞춤법에 매우 예민하다.


누가 틀리게 쓰는 것을 보면 꼭 지적을 하고 넘어가야 속이 시원할 정도다.


그런 내가 맞춤법 지적을 하지 못하는 유일한 대상이 있다.


바로 우리 아빠다.


아빠는 '인건비'를 맨날 '인권비'로 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빠의 틀린 맞춤법에는 평소처럼 따박따박 지적을 할수가 없다.


대신 나 스스로 이렇게 납득을 해보려 노력한다.


'그래..인권..휴마니티..중요하니까...'


어찌 보면 우리 아빠가 맞고 이 세상이 틀린 거 아닐까.


인건비가 정말 '인권비'였다면 세상은 이렇지 않았을테니까.





5. 성격이 급해서


성격이 급해서 뭐든지 답답하면 두세번씩 반복하곤 한다.


같은 단어를 두번 말한다던지, 같은 제스처를 두번 취한다던지 말이다.


내가 내 성격에 못 이겨서 그러는 거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좀 가벼워보이는 것 같아서 고치고 싶은 버릇이다.


특히 이 버릇이 가끔씩은 정말 안좋은 효과를 일으킬 때가 있는데, 바로 스마트폰을 조작할 때이다.


무언가를 입력하다 창을 끄거나 잠시 뭔가를 해야 할 때, '뒤로 가기'버튼을 눌러야 할 때가 있다.


보통은 한번 누르면 바로 창이 전환되지만, 어쩐지 그게 살짝 느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미처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뒤로 가기 버튼을 톡톡 눌러버리고 만다.


신기한 것은 꼭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기가 막히게 타이밍이 맞아서, 뒤로 가기 버튼이 중복으로 먹혀 버린다는 사실이다.


깨알같이 썼던 내용들이 싹 다 초기화된 하얀 화면을 맞이하면, 내 성급함에 대한 자책과 현타가 몰려온다.


이렇게 오늘도 뭐든지 너무 급하게 하면 한순간에 다 날려버릴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만 한다.





6. 예약 메일


퇴사를 마음먹고 나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퇴사 인사 메일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짧게 한 두줄 정도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감성적인 글쟁이인 나는 그 지면에 굳이 짧은 에세이를 끼워 넣었다.


회사의 조직도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훑으며 숨은 참조에 수신자를 골라 넣고, 리스트 제일 끝에 내 개인 메일 주소까지 넣고 나니 세팅이 모두 끝났다.


내가 있을 때 보내는 건 쑥쓰러울 듯하여 예약 발송 기능을 걸고 몇 번씩 발송 테스트를 해보았다.


뭐 대단한 글을 썼다고 이게 제대로 안 갈까봐 조마조마해 하면서 테스트를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우스웠다.


그렇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는 말하지 않았던가.


"It's important in life to conlclude things properly.

Only then you can let go."


회사에서 나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예약 메일로 나의 퇴사 메일이 도착했다.


나에게는 더없이 적절한 엔딩이었다.





7. 짜게 먹어요


달거나 짜거나.


사람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언제나 짠 것이다.


컵라면은 작은 사이즈의 짜파게티 범벅이 짜파게티보다 맛있다.


용기는 작은데 스프 봉지 크기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짜게 먹으면서 짜게 먹는 걸 걱정하는 나.


나이들면 체질이 바뀌기도 하고, 건강 문제 때문에 못 먹는 음식이 많아진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짠 걸 못 먹게 되려나?


먹고 싶어도 건강을 생각해서 꾹 참아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지.


결론은 오늘도, 짜게 먹어요.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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