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Sep 16. 2021

나의 MBTI 변천사

INTP > ENFP > ENTP :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내가 처음 MBTI 검사를 했던 것은 대학생 때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의 20대 시절은 뭔가 위태로울 정도로 우울했다. 나는 언제나 돈은 없었으면서도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을 선망했고, 외로워 죽겠으면서도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공상들로 하루하루를 흘려 보내곤 했던 10대 시절처럼. 20대 초반의 나 또한 그저 수많은 망상 속에서 젊은 날들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나는 나 자신을 싫어하고,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막상 또 심각한 수렁에 빠질 것 같으면 또 그 꼴은 도저히 눈 뜨고 못 보는 인간이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내가 나 스스로의 보호자 노릇을 하며 살아야 했던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에 대한 징조에는 유난할 정도로 예민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우울이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에 마련된 심리 상담 및 치유 센터를 찾아가는 것 외에 당시의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상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던 그날의 내가 대체 뭘 기대하고 그 문을 열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는데. 빛이 잘 들어오는 오후의 상담실의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은 나는 그들이 건네주는 음료를 마시고, 겨우 이렇게 힘겨운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제가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내게 너무도 막연하고 불안한 감정이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나 자신의 보호자였고, 언제나 나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20대에 들어서는 도무지 그렇지 못했다. 나의 감정은 들쭉날쭉했고 나는 내 기분과 무력감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도 무섭고, 더욱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게 대답 대신 주어진 것은 굉장히 여러 장의 시험지 사이즈의 문항지들이었다. 수능 시험을 봤을 때 봤던 것과 비슷한, 익숙한 크기의 시험지에는 각종 문항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기에는 살면서 누군가 내게 그다지 물어보지 않았던 수많은 질문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가끔 재미 삼아 대답해 보곤 했던 백문백답과는 차원이 다른 문항들의 구체성에 조금 질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그 모든 문항지에 성실하게 답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내가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내가 작성한 문항지는 어디 또 다른 센터로 보낸다고 했다. 일주일인가 시간이 경과되어, 결과지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찾아간 심리 상담 센터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나를 규정하는 낯선 4글자의 알파벳을 만나게 되었다.


 INTP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당시로서는 MBTI가 지금처럼 대중화된 테스트는 아니었기에, 이 단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에 이어지는 심리 상담가의 설명을 통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내가 항상 멍하니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도, 타인에게 정서적인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세상에 가진 수많은 불만을 속으로 끊임없이 곱씹으며 끙끙 앓는 청춘인 것도, 전부 내가 어딘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MBTI의 기준에 따라 16가지의 유형으로 분류된 성격 유형 중, 내가 속한 성격의 유형이 유독 그런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니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나를 감싸고 있던 우울함이 한순간에 걷힌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나는 20대 시절의 나의 우울함과 그늘진 망상을 대체로 타고난 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솔직히 내 성격 유형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뭐, 이렇게 타고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나'하고 묘하게 체념하게 되는 지점이 있었기에.


 그러다 20대 중반에 나는 취업을 통해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맡았던 일은 초기 단계 스타트업의 콘텐츠 기획자 겸 마케터였다. 대표님과 나, 단 두 사람밖에 없는 직장에서 나는 자연스레 많은 역할을 짊어지게 되었다. 매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행사가 있으면 행사장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동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연한 기회로 다시 16personalities라는 사이트에서 다시 MBTI 검사를 해보니 이번에는 ENFP가 나왔다. INTP에서 ENFP로의 변화는 너무도 극단적이라 어쩐지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다시 검사를 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ENFP

저기... 너무 변화가 극단적인 것 아닙니까?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검사 결과가 놀랍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때쯤의 나는 실제로 한번 성격이 바뀌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비교적 혼자서만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고,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아 늘 일을 하느라 지쳐 있고 우울했던 20대 초중반의 나와,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진 데다 그럭저럭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20대 중후반의 나는 사진 속의 표정이나 아우라만 봐도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생계의 고민을 덜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를 인정해주고 키워주려는 상사의 밑에서 열심히 일하며 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게다가 이때쯤의 나는 갑작스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로 그득했다. 이후로 두 번의 이직을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새롭게 일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동기는 결국은 그것이었다.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ENFP 성격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 중에 로다주와 마이클 스캇이 있다니. 심지어 내가 그들과 같은 유형이라니!



 실제로 나는 이런 마음을 5년 전 썼던 이 브런치의 이전 글 - '나는 왜 일하는가' - 에서 고백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성격의 변화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진화(?) 활동의 일환인 것이다. 인간 또한 동물이고, 모든 동물은 주변 환경에 맞춰 진화해 가게 마련이니까. 30대가 되어서도 나의 MBTI는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았고, 결국 나는 점차 내가 이제는 어쩔 수 없는 ENFP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중간중간에 몇 번씩 다시 검사해 봐도 여전히 ENFP로 나오기도 했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번에 퇴사를 맘먹고 나니 MBTI가 또 한 번 바뀌었다!



ENTP

또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변한다고..?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불과 얼마 전, 그러니까 퇴사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대략적으로 6월쯤)까지만 해도 ENFP로 나오던 검사 결과가 내 상황과 심신이 모두 본격적인 퇴사 준비 모드에 들어가고 나자 ENTP로 바뀌어 나온 것이다. 신기한 것은 또 16personalities라는 사이트에서 검사했기에 테스트 문항도 똑같은데, 결괏값인 나의 유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INTP였다가 ENFP가 되고, 거기서 또 ENTP가 되다니. 무슨 오-정-반-합도 아니고 너무 극단적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더 웃긴 것은 내가 퇴사를 마음먹고 더 이상 '참지 않는' 성격의 ENTP가 되었다는 선고(?)를 받자마자 이틀 만에 개그우먼 강유미가 '유미의 MBTI들 - ENTP편'을 업로드한 것이다. 사실 이 영상이 오늘의 글에 영감을 준 아주 중요한 영상인데... 이 영상을 틀자마자 1분도 안돼서 그녀가 빙의한 ENTP 캐릭터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소름 돋는 동질감을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뭐지 이건.... 내 사직서...인가?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나의 새로운 성격 유형인 ENTP와 낯을 가리고 있던 상태였다. '이게 진짜 내 MBTI라고?'하고 조금은 의심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상에서 묘사되는 ENTP의 모습을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모습이야 어쨌든 지금의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ENTP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퇴사 사유까지 똑같냐고....)


ㅇㄱㄹㅇ 반박불가.jpg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그렇다. 사실 내 지난 MBTI 유형의 변천사 가운데 끼어 있던 ENFP는 어느 모로 봐도 이전까지 오랜 세월 INTP로 살아왔으며, 지금에 와서 ENTP로 발현된 나의 본성에 가까운 유형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나의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나의 생존 본능이 저도 모르게 계발해 낸 성격 유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곧 '퇴사'라는 행위를 통해 내가 소속한 회사를 떠나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지금 당장 내 주변에 존재하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나를 인정하든,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다. 왜냐? 난 이제 떠날 거니까.

 


이것은 이제 약간 소오름을 곁들인....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나는 마침내 내가 속한 이 부조리한(+재미 없는) 사회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조직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스스로 결정한 순간 뭔가 내 안의 틀을 하나 깨고 흑화 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종합하자면 INTP > ENFP > ENTP로 이어지는 나의 MBTI 변천사의 속사정은 이런 것이 아닐까.


 원래 INTP에 가까웠던 성격이 취업과 동시에 사회성을 필요로 하게 되어 ENFP로 바뀌었다가, 이제 커리어 은퇴를 선언하고 더 이상 업계 사람들이나 직장 동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 되니 다시 INTP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중간에 ENFP로 살면서 쌓은 사회생활과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영향을 주어 I가 아닌 E로 남은 것이다.


 즉, 지금의 내가 ENTP로 발현(?)된 이유는 생각해보면 이것이 나의 오랜 본성에 가까웠던 INTP에 ENFP의 장점을 흡수해서 만들어진, 퇴사 이후의 나의 생존에 가장 최적화된 유형이기 때문이 아닐까.


언니...민간인 사찰은 불법이에요...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유미의 MBTI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 또한 앞으로는 한동안 백수로 혼자 지낼 것이기에, 더더욱 스스로 나 자신을 더 케어하면서 지내야 하고, 그러면서 지루한 건 싫어서 재미도 추구해야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만들어 내며 지내야 하니까.






 최근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MBTI관련 자료들이 재미있긴 하지만 쉽게 과몰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침 올라온 개그우먼 강유미의 '유미의 MBTI들 : ENTP편'이 너무 소름 돋아서 결국 이런 글까지 써버리게 되었다.


봐도 봐도 내 입장에선 충격과 공포의 ENTP 롤플레이...



사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거쳐왔던 INTP, ENFP, ENTP 중 뭐 하나 '와 이건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나랑 똑같아! 완전 내 얘기다' 싶은 것은 없다. 애초에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의 성격을 단 16개의 유형으로 구획화하여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그래도 요즘 세상에서 MBTI가 즐거운 유희 거리가 되는 것은 신문에 늘 실리는 띠별 운세를 확인하는 심리와 비슷한 느낌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스스로가 자신에게 갖는 만큼 관심을 가져주길 원하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는 너무 많으니 이렇게 자꾸 유형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기왕이면 4개 유형의 혈액형보다는 12개로 나눠서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더욱 재밌고, 그보다는 약간 더 선택지가 늘어나 16가지의 유형으로 사람들을 나눠볼 수 있는 MBTI가 재미있는 것이고.


 그렇지만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재미로만 봐야지, '나는 MBTI가 OOOO니까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과몰입하여 스스로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이유를 붙이고 그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은 절대 금물인 것 같다. 나만 해도 MBTI가 이미 3번이나 바뀌었고, 거쳐온 세 개의 MBTI다 나와 비슷한 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점도 있다. 사실 나도 지금 당장은 ENTP로 나왔지만, 이것은 현재의 내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일 뿐 절대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본성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여기서부터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 아닐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N,P 베이스이긴 할 것 같지만!)



 까짓 거, 기껏해야 그냥 16개의 유형일 뿐이지 않나.


 뭐 모르지 또. 이러다 살면서 16개의 MBTI를 다 섭렵하게 될지도. 그런 삶에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유미의 MBTI들'이라는 유튜브 컨텐츠를 연재 중인 강유미 님 정말 대단한 듯. 21세기 최고의 인류학자라는 학계의 정설이 있다 카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일단은 도망부터 치고 보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