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있을 때, 어느 화가로부터 그림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도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그림을 넣은 액자를 내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잘 간직해뒀다가 내가 죽으면 팔아. 아마 그때쯤이면 가격이 못해도 두 배는 뛸 테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펄쩍 뛰는 나를 보며 그는 껄껄 웃었다. 화가들에게 그것은 꽤나 쿨한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당시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유명한 사람과, 세상을 떠난 이후로 유명해진 사람들. 대표적인 예로 전자는 성룡, 후자로는 이소룡이 있다. (물론 이소룡은 생전에도 유명했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며 이후로 더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소룡 vs 성룡. 그 선명한 삶의 대비는 종종 밸런스게임의 예시로 등장하곤 한다.
평생을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이름을 그림에 서명하며 살아온 나의 친구 또한 그 세계에서 살아왔기에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익숙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칭송받고,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간다 하더라도 정작 본인이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물론 절정일 때 아깝게 죽음을 맞이한 아티스트에게는 일종의 성역이 생겨나기는 한다. 영원히 늙지도 않고, 기존에 쌓아둔 이미지를 실추시킬 사고도 치지 않는 그들은 작품 속에 갇힌 채, 작품의 여운을 퇴색시킬 만한 위험 요소가 제거된 채로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 또한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품는 원대한 꿈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나는 아티스트의 팬이 아닌 한 사람의 친구로서, 내 친구가 이소룡보다는 성룡처럼 살아가기를 바랐다.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작품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그런 아티스트가 아니라, 최대한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에서 느낀 것들을 작품으로 풀어낼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가 준 그림은 이탈리아에서부터 잘 들고와서 오래오래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그가 내게 준 그림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잘 걸려 있다. 요즘도 나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본다. 검색 결과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그의 포트폴리오가 가득한 홈페이지에, 이제는 60대 중반이 된 그가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딘지 뿌듯해진다.
그가 내게 준 이 그림 값이 오르지 않아도 좋다. 그의 조언과는 달리,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의 애정이 담긴 이 그림을 팔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니 이 그림은 내게 재산으로서의 가치는 없을지 모른다. 다만, 볼 때마다 이렇게 에너지를 얻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려줬으니까. 최근 아트테크(*아트 + 재테크의 합성어. 예술품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법)가 핫하다고는 하는데, 집에 공간도 부족하고 그림을 제대로 배워보거나 즐겨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림을 재테크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그저 본연의 의미에서 이렇게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아트테크와 관련한 조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일단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사라”는 것이니, 그 관점에서 보면 엉겁결이긴 하지만 나 또한 아트테크라는 것을 하고는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내 취향으로 된 그림을 모으며 정말 아트테크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
모쪼록 내게 그림을 선물한 그가 오래오래 좋은 그림을 그리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비싼 그림이 아니라, 행복한 화가의 그림을 소장하고 싶으니까.
그가 무려 13년 전에 그려주었던 내 모습. 이 그림은 내가 한때 머물렀던 그 알프스 산자락의 작은 마을 회관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