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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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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Oct 24. 2021

[10줄 문학] 출간, 이후

2021년 10월 18일 ~ 10월 22일

1. 78년


퇴사를 하고 나니 급 시간이 남아 돌아서 제대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전자책 전용 단말기까지 구매했다.


단말기를 세팅하고, 대여해둔 도서를 다운로드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표지 한구석에 붙은 열람 가능 잔여 일수였다.


78년.


내가 앞으로 78년을 더 살 수 있을까.


78년 뒤의 내가 여전히 책을 볼 수 있을까?


그 때쯤이면 내 몸은 여기저기 교체되어 어벤져스 네뷸라처럼 사이보그화되어 있겠지?


문득 책이 읽고 싶어지고 춤이 추고 싶어지면 <스타터스>의 노인들처럼 젊은이의 몸을 탐낼까?


정작 책은 열 생각도 안하고 이런 생각만 하며 또 독서로부터 도피하는 나.


어쩐지 78년 뒤에도 이러고 있을 것 같다 (살아있다면 말이지).




2. 7 대 1


나에겐 7명의 조카가 있다. 난 어릴 때부터 명절 때마다 그들을 앉혀 놓고 이렇게 정신 교육을 하곤 했다.


"너희 몇 명이야? 7명이지, 난 한명이고.

그러니 내가 너희를 챙기는 것보다 너희가 조금씩 나를 챙기는 게 더 당연한 거야."


그들은 어쩐지 납득했고,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안해도 서운해하지 않는 강철 조카로 자라났다.


조카들은 내 생일을 챙기지만, 나는 그들의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


내가 조카들의 집에 가서 추리닝 내놓으라, 만화책 내놓으라 하면 알아서 척척 눈앞에 갖다놓는다.


내 무능력 이모 컨셉질이 너무 심했나 싶긴 한데 그래도 계속 챙김받는 철없는 이모이고 싶다.


그리고 얘들아 이모 이제 진짜 백수되서 너희가 나 더 챙겨줘야 되는 거 알지?




3. 시간의 상대성


나훈아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세월의 모가지를 끌고 가는 법은 안 해본 일을 해보는 것이라고.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살기 위해 퇴사를 감행했다.

그렇게 회사를 뛰쳐나온 지 3주차, 나는 이제서야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좀 알 것 같다.

확실히 퇴사를 하고 나니까,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나는 월요일엔 주간회의, 화요일엔 팀 주간회의, 수요일엔 실무 회의, 금요일엔 주말 세팅을 하는 주기를 3번 정도 반복한 참일 것이다.

그토록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삶의 형태는 내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게 돈을 주는 회사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이제서야 내 의지에 따라 살게 되기 시작한 나는, 아직 10월 3주차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문득 문득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시간이 이토록 천천히 가는 것이었구나.




4. 출간, 이후


출간 전에는 내가 책을 낸다고 하면, 주변인들의 반응이 어떨지 괜히 한번씩 상상해보곤 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출간하고 나서 소식을 여기저기 알리니,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평소 그렇게 가깝진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로바로 책 구매 인증샷을 보내주기도 하고, 오히려 나름 꽤 친하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 그래? 축하해' 한마디만 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아 무안해지기도 한다.


흔히들 경조사가 있을 때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명확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살면서 딱히 엄청난 경조사가 없었던 나로서는 이번 기회로 이런 걸 조금 체감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조금 조심스러워지고, 사람들의 눈치도 보게 된다.


책을 사고, 읽은 사람들의 반응을 신경쓰게 된달까.


이렇게 기꺼이 내 책을 사준 사람들에게 나의 보잘 것 없는 밑천을 드러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출간 소식을 접하고도 내 책을 사주지 않는 지인들은 표면적으로 나와 친하게는 지내고 있지만, 실상은 내가 기대할 게 하나도 없는 빈 껍데기인 것을 알아서 나의 메시지를 담은 책에까지 굳이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조마조마한 가운데 내 책을 읽어주는 독자 한 명 한 명의 소중함을 이렇게 또 깨닫게 된다.

내가 다음번에 또 책을 낼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경험과 기억이 나중에 내 글을 기꺼이 읽어주는 존재들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5. 결혼정보회사


얼마 전 청첩장을 받으러 아는 동생을 만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언니는 만나는 사람 없어?'라고 묻던 동생은 이젠 조심스러운지 그런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던 도중, 갑자기 전화가 와서 받았다.


발신자는 결혼정보회사의 상담 매니저로, 주기적으로 전화하는 그녀는 내가 그냥 귀찮아서 둘러댄 '저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거짓말을 믿고 있었다.


여전히 잘 만나고 있냐며 물어오는 전화에 입 부분을 가리고 조심스레 '네, 네 잘 만나고 있어요'하니 맞은편의 동생이 조심스레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젔다.


전화를 끊고 나서 '결혼정보회사.. 남친은 없는데 그냥 귀찮아서!'라고 했더니 잠시 안도감으로 반짝였던 동생의 눈은 예의 다시 어색하고 불편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애써 그런 화제를 회피하며, 우리는 그럭저럭 밥을 잘 먹고 헤어졌다.


'그럼 남자친구분 계속 잘 만나시구요, 앞으로도 종종 연락드려도 되죠?'


이렇게 물어오는 상담 매니저에게 '그러시라'고 대답했던 것은, 이조차 연락이 안오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아서.


어제 뉴스에서 봤던 층간소음조차 때로는 위안이 된다는 어떤 독거 노인의 마음처럼, 내가 혼자되어 외롭지 않음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결정사 담당자의 노력에 감사하게 되는,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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