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0줄 문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Oct 31. 2021

[10줄 문학] 망한 인스탁스 구하기

2021년 10월 25일 ~ 10월 29일


1. 어머님이 누구니


얼마 전, 이전 회사에서 나를 무척 예뻐해 주시던 분을 만났다.

그 분은 내 책을 읽으며 궁금한 게 있었다고 했다.


"너는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글을 야무지게 잘 써?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어?"


그저께 만난 다른 분 또한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 어머니는 대체 널 어떻게 키우신 거니?"


예전에 데이팅 어플로 만나 대화하게 된 남자가 대뜸 호구조사를 하기에, '저는 엄마가 없는데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는 바로 '엄마가 보고싶지 않아요?'라며 다소 무례한 질문을 해왔다.


이렇게 어쩐 일인지 모두가 내 엄마를 보고싶어 하지만 내게 있어서 그녀는 이미 아득한 오래 전부터 '그냥'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故 마광수 교수의 말처럼, 우린 어쩌다 부모자식이 되어버린 관계일 뿐이다.

그러니 뭐 딱히 누굴 닮은 건 아니고, 그냥 유전자 뽑기 조합이 기가 막히게 잘된 돌연변이 정도로 생각해 주십쇼...




2. 망한 인스탁스 구하기


친구와 여행을 가서 인스탁스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화지에 찍혀나온 사진들이 하나같이 다 하얗게 날아가 얼굴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침울해하는 친구를 이렇게 위로했다


"괜찮아 나 얼굴 완전 빛나고 무슨 여신처럼 나왔어! 여신은 원래 눈부셔서 볼 수 없는 존재라잖아~"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 나는 망한 인스탁스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비록 일부든 전체든 날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기억이 살아있어 어디에서 어떤 표정으로 찍은 사진인지는 기억이 났다.


잠시 생각한 끝에 나는 망한 인스탁스 사진 위에 내가 기억하는 형상대로 네임펜으로 슥슥 라인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종 완성된 그림 겸 사진(?)들은 하나같이 삐뚤빼뚤 우스꽝스러웠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내 기억을 하나하나 직접 트레이싱해서 새겨넣은 초 아날로그 사진.





3. 낙엽과 단풍


올 가을엔 큰 맘먹고 단풍을 보러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꾸만 내 입에서 '낙엽'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괜히 잘못 말해놓고 나는 민망해서 '낙엽이나, 단풍이나 그게 그거지!'라고 우기곤 했지만, 사실은 그 둘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단풍 보러 간다'는 낭만적이었지만, '낙엽보러 간다'는 어쩐지 염세적인 느낌이 들었으니까.


전통적인 단풍 명소라는 강원도를 향해 차를 출발했을 때, 지나가면서 보는 나무들의 색감이 아직 한참은 푸릇푸릇하여 당황했다.


최근 들어 때에 맞지 않는 급격한 한파가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급작스레 추워지면 단풍이 예쁘게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추위가 고되긴 고되었던지, 나뭇잎들은 녹색인 상태로 낙엽처럼 그대로 비쩍 말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낙엽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되려 집 앞의 나무들이 강원도의 나무들보다 더 붉고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일생의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단풍을 보려고 강원도로 차를 끌고 가는 길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그 간헐적 단풍이 그렇게 새삼 아름다워보일 수가 없더라.


어쩐지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를 찾는 모험을 떠올려 버린, 그런 낙엽과 단풍 여행의 마무리.




4. 우쥬 라잌 썸씽 투 드링크?


왜 모든 대화에는 '우쥬 라잌 썸씽 투 드링크?'가 동반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늘 나의 의문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 여러 건의 미팅을 하고 나면 책상에는 여러 개의 음료가 담긴 종이컵이 가득 쌓이곤 했다.


퇴사하는 날, 나는 석별의 정을 나누며 6시간 동안 총 7잔의 음료를 마셔야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국인의 선의이자 호의는 이렇게 '마실 것'의 제공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의 방광은 너무 작고 귀엽단 말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혼자서 다 끝내지 못하는 나의 방광의 스케일로는 그 넘치는 정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게다가, 방광이 소모품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은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미팅이 연이어 있는 날은 정말 방광을 외주화하거나, 외장 방광을 설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언젠가는 그런 일이 가능했음 좋겠다...




5. 이불 밖은 위험해서


고3때 담임선생님은 항상 우리에게 체력을 키우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너네 그러다 나중에 대학가고 햇빛 아래 돌아다니다보면 분명히 픽 쓰러진다!"


해뜨기 전 등교해서 하루종일 앉아있다가 해가 진 후에야 바깥으로 나가는 뱀파이어같은 존재에게, 대학생이 된 뒤 맞이하는 한낮의 햇빛은 너무도 강렬하다나.


그런데 그것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해뜨기 전 출근해서, 해가 진 후에야 집 밖으로 나서던 직장인이었던 나는 퇴사하고 난 뒤 내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중이니까.


퇴사하고 나서 대낮에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활동량이 늘어난 나는 급기야 퇴사한 지 한 달도 안되어 거하게 탈이 나고 말았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더니, 진짜였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현재 백수라 굳이 이불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쿠션을 책상처럼 쌓아놓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일을 처리하며, 역시 이불 안이 최고시다 하고 생각한다.


오늘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아야지..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10줄 문학으로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DM으로 편하게 소재나 사연 접수해 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10줄 문학으로 써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줄 문학] 출간, 이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