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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Nov 06. 2021

[10줄 문학] 뜻밖의 모놀로그

2021년 11월 1일 ~ 11월 5일


1. 인간에 대한 기호


어릴 때부터, 덕후였던 나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고 싶었다.


그것은 '나는 누구누구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정말 멋진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그렇게 특정인에 대한 나의 기호를 표현하는 것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10대 시절부터 꾸준히 여러 사람들의 덕후로 살아오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왔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공공연히 좋다고 말해왔던 사람이 나중에 범죄를 저질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고, 걱정 하나 없이 환한 햇빛같이 빛나던 사람이 스스로 생을 등지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보는 누군가의 모습은 그 사람이 지닌 여러가지 모습 중 극히 일부일 뿐이며,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결코 나의 정체성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내가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면, 내 의지에 상관없이 그것은 타인의 뇌리에 연결고리처럼 남아버리고 만다.


지금의 나는 맹목적이고 순수하게 어떤 인물에 대한 기호를 공개적으로 거리낌없이 표현했던 그 때로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좋아하는 인물은 가급적 내 안에만 고이 간직하려고 한다. 특히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생 기원리스트'는 요즘도 가끔 갱신되고 있다.




2. Think like S


얼마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친구에게 한탄을 늘어놓았다.


주변에 친구들은 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나는 이렇게 또 이별하면 어느 세월에 그렇게 될수 있을까,


살면서 여태까지 대체 이룬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줄줄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던 친구는 내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 N이지?"


내 MBTI가 N(직관형)인지를 물은 것이었다.


"그럴 땐 그냥 S(감각형)처럼 생각해. 결혼을 못했으면 못한거고, 애가 없으면 없는거지 뭐. 뭘 또 거기서 '난 왜 남편과 아이가 없을까, 나한테 문제가 있네, 살면서 이룬 게 없네'까지 가고 그래. 그냥 없으면 '아, 없구나!'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면 되지."


확실히 MBTI에 과몰입중인 우리의 모습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MBTI의 순기능일지도.




3. 마스크팩 벼락치기


최근 내 피부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지난 7년 간 잘 써왔던 기초 화장품이 안 맞아 겉돌기 시작했고, 얼굴 구석에 한 두개씩 올라오는 여드름은 마치 두더지게임처럼 끊길 일이 없었다.


뭔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큰맘먹고 피부과라는 곳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물어 물어 병원과 의사 추천을 받고, 뭐 할인된다는 앱도 설치하고, 예약을 잡았다.


그런데 왠지 막상 난생 처음으로 관리 목적으로 피부과에 갈 생각을 하니 뭔가 너무 떨리는 거다.


스킨도 로션도 귀찮아서 크림 하나로 통일하고, 세수도 어푸어푸 쯔왑쯔왑 하는 내가..피부과에 간다고...?


그 피부과 원장님은 맨날 관리하고 신경쓰는 피부들만 볼텐데, 나같이 관리 못하는 피부를 거기에 들이대도 괜찮은 걸까?


MBTI 테스트는 허구헌날 하면서 정작 내 껍데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러다가는 아무래도 대참사가 날 것 같아서, 결국 건강검진 전에  벼락치기로 다이어트 하는 심정으로 알로에 팩을 사서 들어온 나.


피부결도 벼락치기가 됐음 좋겠다.




4. 뜻밖의 모놀로그


오늘 오전, 지하철 한 구석에서 왠지 모르게 귀에 채이는 굵직한 음성이 있었다.


"그렇지, 아주 잘하고 있어, 바로 그거야!!"


아저씨는 뭔가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포츠 중계라도 보시나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귓구멍에 팍! 하고 단말마같은 외침이 꽂혀 들어왔다.


"4천 가즈아!!!"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사람은 나와 동류라는 것을.


아저씨, 주식인가요, 코인인가요?

코인이면 혹시 샌드박스인가요?


눈앞에서 펼쳐진 종토방 모놀로그에 차마 끼어들지 못한 나는 그저 지하철 한 구석에서 마음으로 '4천...가즈아....'을 함께 외쳐드렸을 뿐이다.




5. 돈으로 살 수 없는 까만 봉다리


최근 출간한 내 책에서 나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썼다.

그렇지만,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던 시절, 나는 옷을 살 돈이 없어서 항상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밝은 목소리로 전화해 갑자기 옷을 사주겠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나간 곳은 한 공장같은 건물이었고, 외부에 드리워진 커다란 현수막에는 '폐업세일! 전부 5천원'이라는 글씨가 빨간색으로 써져 있었다.


아버지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가판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옷들을 정신없이 집어들었다.


입어보지도, 꼼꼼히 따져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까만 비닐봉지에 버려지기 직전의 몇천원짜리 옷을 터질듯이 가득 담아왔던 그 날의 나는 확실히 행복했던 것 같다 .


사실 누군가에게 그런 내 모습이 보여질까봐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내 친구들은 절대 그런 데서 옷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좋은 옷을 입는게 더 행복한 거겠지만, 그 때의 다정했던 기억이 담긴 까만 봉다리만큼은 다시는 돈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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