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0줄 문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Nov 13. 2021

[10줄 문학] 큐티, 퍼니, 호러

2021년 11월 8일 ~ 11월 12일


1. 입동


11월 7일은 입동이었다.


차를 타고 밖에 나갔다가, 유독 볕이 좋아 잠시 좀 걷기로 결심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거리에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어갔다.


어디서는 첫눈이 내렸다던데.


여기에는 낙엽이 첫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맞은편에서 낙엽을 밟으며 걸어오는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명랑해서 보니,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였다.


그는 천진하게 낙엽을 찰박찰박 밟고 지나갔다.


나는 다시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그 사이 본네트에 쌓인 낙엽이 두둥실 떠올랐다.


겨울의 입구는 가을의 정점이었다.




2. 잠자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친한 친구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다.



"뭐야, 진짜 부부 맞네."



그녀는 친구의 냉소적인 말투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남편이 도마뱀같이 느껴져, 그와 살갗이 닿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둘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는 없으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다 커버린 자식을 메신저 삼아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가 그녀에게 '그래도, 결혼한 게 좋았냐'고 물어본다.


20년 전의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했고, 10년 전의 그녀는 '너는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어쨌든, 그녀는 더이상 남편과 잠자리는 하지 않는다.




3. 빨간 구두


과몰입하는 기질은 항상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예를 들어 게임 하나를 시작하면 엔딩을 볼 때까지 며칠 동안 밥도 건너뛰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습성.


마치 발목을 자르기 전엔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동화 속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처럼 말이다.


퇴사 후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는 이런 내 특성이 나 자신의 생존에는 상당히 불리한 특성인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점심시간이든 회의시간이든 뭐든 정기적으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야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집에서 혼자 일하니 이건 정말 마음만 먹으면 무한한 연속성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OFF 스위치가 없는 삶이 며칠째 계속되자, 나는 드디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그럭저럭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퇴사한 지 이제 2달도 되지 않았지만, '퇴사하니까 어때?'라고 지인들이 물어오면 이제 이렇게 답해야지.


주 4일제가 생기면 회사가 최고니까 그 때까지 존버하라고.




4. 큐티, 퍼니, 호러


중 3 조카는 소설을 쓴다고 했다.


이번 여름 방학 동안 완성한 소설의 내용을 조잘거리며 들려주는 걸 듣다 보니 왠지 모를 기특함과 뿌듯함이 올라왔다.


왠지 내 조카가 막 넥스트 애거서 크리스티가 될 거 같고 막 천재같고 그런 팔불출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에 있었다.


한참을 떠들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녀는 눈에 띄게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서 위로해주겠답시고 "그럼, 지금 네가 나랑 하고 싶은 걸 그냥 소설로 써" 라고 했던 것은 나의 실수였을까?


"나는 지금 이모 집에 못가게 감금하고 아예 여기서 평생 살게 하고 싶은데."


겉옷을 챙기러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문 밖에서 조카가 독백하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청테이프가 좋을까,
밧줄이 좋을까, 사슬이 좋을까..."


이걸 대체 귀여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5. 어금니를 깨무는 버릇


집중해서 뭔가를 하다보면 가끔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온다.


그럴 때마다 보면,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다.


자꾸 이렇게 앙다무는 습관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매번 의식하고는 있지만, 나도 모르게 긴장하면 어느새 어금니를 자꾸만 이렇게 깨물게 된다.


문제는 가끔씩 잘 때도 그런다는 것이다.


내가 이를 꽉 물고 잘 때마다, 옆에 누운 그는 내 턱을 살살 쓸면서 말하곤 했다.


"이렇게 자면 이 빨리 상해서 어떡하나.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 하는데."


'너랑 결혼하면 임플란트비 엄청 들테니 미리미리 돈을 많이 벌어둬야겠다'며, 그는 사람좋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마다 옅은 두통을 느꼈다.


어쩌면 두통은 이를 너무 꽉 깨물어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머리가 아플 땐 제일 먼저 턱의 긴장을 풀어봐야지.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10줄 문학으로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DM으로 편하게 소재나 사연 접수해 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10줄 문학으로 써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줄 문학] 뜻밖의 모놀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