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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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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Nov 27. 2021

[10줄 문학]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2021년 11월 22일 ~ 11월 26일


1. 일주의 세계


엊그제 명리사주학을 공부중인 지인이 사주를 봐줬다.


항상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내고 봤었는데, 지인한테 사주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신기했던 것은 그 자리에 모여있던 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일주'가 뭔지 알고있었다는 것이다.


일주는 무려 60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일주에 따라 성향이 갈리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옛날엔 혈액형, 몇 년 전엔 별자리, 최근에는 MBTI 가 유행했는데....


특히 요즘은 취업할 때도 MBTI를 물어보는 시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일주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물론 이건 타고난 기질이나 대략적인 운의 흐름을 읽는 정도이고, 실제로는 내가 하기에 달린 게 많다니까 맹신은 금물이지만.


그래도 왠지 살면서 한번쯤은 공부해보게 될 것 같은, 명리사주학.




2. Emoji가 사라진 세계


나는 언제나 그림문자에 서툴렀다. 카카오톡 이모티콘도 늘 써서 익숙해진 것만 쓰고, 어쩌다 쓰려고 하면 필요한 이미지를 찾아내는 데만 한세월이 걸린다.


그래서인지, 최근 여기저기서 사용되기 시작한 Emoji는 늘 내 홧병을 유발했다.


그때그때 티키타카를 하다가 딱 떠오른 말을 바로 받아치고 싶은데, 적절한 이모티콘이나 Emoji를 찾으려고 키보드를 전환하다보면 대화가 맛있어지는 그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 거다.


노션이나 트위터 등에서 Emoji로 축약된 밈을 전달하는 문화가 번성할수록 나는 더더욱 고독해졌다.


나는 그냥 글만 쓰고, 누가 Emoji만 덧붙여주는 Emoji 대행서비스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사용할 의사가 있다.


내가 쓰는 문장이 끝날 때마다 인공지능으로 자동으로 Emoji를 붙여주는 인공지능 Emoji서비스가 개발된다면 히트칠 거 같다.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나같은 사람이 흑화해서 세상의 Emoji를 다 없애버리지 않을까?


내가 적응하기 싫으니 Emoji를 없애버리겠다는 분E갱유적 과격한 사고!


반Emoji 동맹, 모집중.




3. 포지셔너


태어나서 지금까지 봤던 초능력자 중에 가장 부러운 캐릭터는 강풀의 웹툰 <어게인> 에 나오는 김구현이다.


그의 능력은 '포지셔너'로, 어떤 상황에 있든 안전한 곳을 식별하는 능력이다.


패시브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이 초능력은 얼핏 보기엔 다소 시시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초능력과 히어로물의 세계는 대부분 과격하다.


세계를 파괴하려고 하든, 구하기 위해서든 그들은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며 주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부

수곤 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왠지 모르게 그러한 초능력의 본질적인 유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기껏해야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 뿐인 능력이라니.


그 소극적인 능력이 주는 무해함이 왠지 마음에 든다면 내가 너무 비겁한 걸까?


솔직히 그런 상황이 되면 지구고 사명감이고 뭐고, 일단 나만 안전하면 좋겠어.


그러니 앞으로 이터널스든 어벤저스2든 그 어떤 초능력자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 해도, 내게 초능력 세계관 최강자는 포지셔너 김구현일 것이다.




4. 첫인상이 제일 괜찮은 사람


퇴사를 하고 나서 다른 일들을 접하며, 나 자신에 대해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지겨움을 너무 빨리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금방 적응하지만, 반복되는 일이나 하기 싫어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난 내 직장생활을 돌아보면, 5년씩이나 한 직장에 있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나 싶다.


어떤 커리어든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고, 업무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 짧은 열정의 스파크가 끝나버리는 나같은 인간은 애초에 조직에 소속되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길게 볼수록 진국'이라는 말처럼, 알아가고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낼수록 더 좋은 사람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나는 정반대로 첫인상이 제일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서도, 일에서도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거취를 옮기며 살아야 하는 긱 워커(Geek Worker)의 삶을 선택한 것은 옳다.


작심삼일도 3일에 한번씩 다시 하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일도 숏텀으로 가면 되지 뭐.





5.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아침부터 동거하는 새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늘 내가 방에서 나오면 기지개를 켜고 새장을 나오고 싶어하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오늘은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걱정되서 살펴보니 오늘따라 부리에도 영 핏기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오늘이 우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은 아닐까?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어 반려동물 장례 서비스를 검색해 봤다.


한참을 찾아보다 나도 모르게 눈이 벌개졌을 무렵, 새님이 새장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여 꺼내줬다.


나는 손 안의 그를 쓰다듬으며 코타츠에 들어갔다.


설거지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를 손에 안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같이 앉아 멍때리는 시간이 이렇게 소중한데, 왜 예전에는 소홀히 했을까.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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