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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Dec 05. 2021

[10줄 문학] 이쑤시개

2021년 11월 29일 ~ 12월 3일 

1. 0점


일본어 표현 중에 '調子に乗る(쵸시니 노루)'라는 표현이 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본궤도에 오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일이 너무 잘 풀리는 나머지 우쭐거리고 오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이켜보자니 최근의 나 또한 어느 정도는 저 표현같은 상태였던 것 같다.


퇴사하자마자 일을 시작하고, 책을 출간하고,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일이 너무 잘 풀린다고 스스로 우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11월 마지막주에 들어서자 감당하기 힘든 영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고 있다.


자칫 낙조할 뻔 하였고, 살고 있는 집에는 누수가 발생하여 천장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쩐지, 최근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다. 


앞으로는 너무 좋고, 기뻐서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일은 인생에 가급적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삶이 언제나 정반대의 것들을 준비하여 0점으로 균형을 맞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너무 슬픈 일은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 분에 넘치는 기쁨도 원하지 않기로 했다.




2. 이쑤시개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식당 카운터마다 이쑤시개가 수북히 꽂혀 있는 것인지.


직장에 다닐 때, 같이 밥을 먹었던 상사는 이쑤시개를 집어들며 변명하듯 말했다.


"너희도 나이 들어봐. 밥 먹을 때마다 이 사이에 자꾸 뭐가 낀다니까."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다. 요새는 조금만 질긴 음식을 먹어도 이 사이가 답답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왜 악어가 악어새를 잡아먹지 않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치실을 뽑아 점심으로 먹은 파김치의 잔해를 제거하며, 그저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드는구나 생각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삶은 얼마든지 우악스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3. With


다시 12월이다.

중국 우한에서 폐렴이 발생했다는 얘기를 들은지 2년 정도 됐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백신 얘기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올해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났고, 확진자 수는 5천명을 넘었다.


이제는 코로나에 걸려도 자택 치료를 해야 한단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거리에, 카페에, 술집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두려워진다.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과 두려움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될까봐.


아무래도 With코로나 선언을 withdrawal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4. 책임감과 열정


나는 열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나를 꽤나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서 조금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단은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해내야지' 하는 책임감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일에도 결코 불타는 열정으로 "난 이걸  꼭 해낼거야!!"라고 의지를 활활 태워본 적은 없다. 대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이 정도다.



"음...뭐...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이것을 열정으로 칭하고자 한다면, '소극적인 열정' 정도가 적합할지도.


뭐, 열정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는 게 아닐까. 어떤 불꽃은 파란색인 것처럼.





5. 내 방에서 우주여행하는 법


일론 머스크와 리차드 브랜슨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이 우주에 미쳐있다는 것이다.


우주선을 만들고, 우주여행 상품을 만들어 팔고, 그것을 현실로 이뤄가는 그들의 노력을 보면 어쩐지 잘 와닿지 않는다.


누가 내게 공짜로 우주 여행을 보내준다 해도, 그 여행을 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무중력 상태는 좀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우주복은 불편할 거고, 나같이 덜렁대는 사람은 분명히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음식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내게 튜브에 들어 있는 각종 유동식만 먹으며 몇 개월을 버텨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그러다 얼마 전 저녁을 준비하러 밀키트 봉지를 하나 뜯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요리를 멈추고 밀키트로 대충 때우게 된 것일까?


아마도 코로나 19 이후 재택근무 때문에 집에서 먹는 끼니가 늘어나면서 매번 요리를 하기엔 번거로워서였던 것 같은데.


'인간 사료'나 다름 없는 진공 밀키트 봉지를 뜯어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쩌면 우주선에서 유동식을 먹는 거나 이거나 다름 없는 삶이 아닐까 한다.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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