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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Dec 12. 2021

[10줄 문학] 서울우유 마케터의 은밀한 취향

2021년 12월 6일 ~ 12월 10일

1. 자연광 알람


지난 주말, 아침부터 강남에서 행사가 있었다.


퇴사한 뒤 오랜만에 6시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알람을 맞춘다는 행위 자체가 엄청 생소하게 느껴졌다.


원래 회사에 다닐 때는 8시까지 시차출퇴근을 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 6시 알람을 맞추고, 혹시 알람이 안 울릴까봐 몇번씩 확인하면서 잠들곤 했는데.


그렇게 이틀간 6시 알람에 맞춰 일어나고, 7시가 되기 전의 이른 시간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 일상을 다시 반복해보았다.


'우와, 내가 그 동안 이걸 어떻게 매일 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퇴사하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닐까.


잠을 깨우는 불청객 같은 소리가 없이, 그저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연광이 적당히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주변이 충분히 밝아졌을 때 일어날 수 있다는 것.


해가 빨리 뜨는 여름엔 일찍, 늦게 뜨는 겨울엔 좀 더 늦게 일어나는 지금의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이 참 행복한 거구나 다시금 깨닫는다.




2. 파이의 삶


인생을 거대한 바다로 본다면, 생계를 유지하는 행위란 결국 그 넓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느냐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장에 다니는 것과 직장에 다니지 않는 삶은 차이가 있다.


직장에 다니는 것은 말하자면 거대한 노예선에서 내게 주어진 노를 열심히 젓는 행위에 가깝다. 


외부의 바다가 어떤 상황이든간에 내가 소속된 배는 크고 안전했고, 무엇보다 나와 같이 노를 저어주는 동료들이 있었다.


다만 나는 배의 행선지를 알 수 없었고,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반면, 혼자가 된 지금 내 모습은 마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같은 상황이다.


작은 구명정 보트 위에는 나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동승해 있다.


나는 혼자서 생존하기 위해 항해와 사냥을 계속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리처드 파커는 나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그가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리처드 파커는 내 나태함이자, 욕망이다.




3. 배달의민족은 쓰지 않습니다.


나는 배달의 민족 앱을 설치하지 않았다.


당연히 회원 가입도 되어 있지 않다.


처음엔 무서워서 가입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집에 누군가 벨을 누르고 음식을 갖다주러 방문하는 것이 왠지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국이 찾아오고 나서 비대면 배달이 일반화되긴 했지만, 워낙에 안 시켜먹는 게 습관이 되었다보니 그냥 자연스레 안 쓰게 되었다.


괜히 모르는 사람을 집앞까지 오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발품을 들여 집 밖으로 나가 포장해 오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당근 마켓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에게 위치 기반의 서비스로 나를 노출하는 행위가 아무래도 내겐 위험하게 느껴진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독거인들도 안심하고 배달앱이나 중고 거래 앱을 쓸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4. 서울우유 마케터의 은밀한 취향


어제, 세간을 시끄럽게 만든 서울우유의 젖소 수인 광고를 봤다.


서울우유는 금방 광고를 내렸지만, 이미 여론은 잔뜩 악화된 상태였다.


서울우유는 8명의 젖소 모델 중 6명이 남자였다는 해명을 내놨다.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 정말 클로즈업샷이 남자더라.


보통 남자들은 내리지 않는 여성스러운 뱅헤어를 한 남자와 화면 너머로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서울우유 마케터의 은밀한 취향을 알아버리고 만 느낌이었다.


저 해명대로라면, 서울우유 마케터는 오메가버스 세계관을 추종하며, 수인물 취향의 진성 BL러인가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남자 젖소'라는 설정력은 보통의 세계관에서는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그 취향은 은밀한 개인의 영역으로만 간직했어야지, 광고로 만들어서 전시하면 어떡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오메가버스에 과몰입해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던가. 


차라리 그게 지금 서울우유 홈페이지에 올라온 팝업 공지의 사과문보다는 더 진실성이 느껴질테니까.




5. 젊은 독거인의 슬픔


허리가 나갔다.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내리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한 채 한참 낑낑거리다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처방을 받는데 의사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회복하려면 누워만 계시고 절대 움직이시면 안돼요."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에 들어가니 펼쳐진 광경에 도저히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널려 있는 빨래, 정돈되지 않은 식탁,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일단 누워봤다.


그렇지만, 어차피 지금의 내가 치우지 않으면 나중의 내가 치울 거 아닌가.


결국 그 날 침대에 누운 것은 그것을을 다 치우고 난 뒤,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독거인들을 위한 가사 로봇이 어서 발명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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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사진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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