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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Feb 06. 2022

[10줄 문학] 구독 관계

2022년 1월 24일 ~ 2월 4일

1. 오히려 좋아


요즘 글은 안쓰고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

지난 달에는 해부학을 배웠고, 이번 달부터는 본격적으로 디지털 드로잉을 배운다.

복습 겸 집에 와서도 그리며, NFT플랫폼인 오픈씨에 계정도 만들었다.

계정을 만들기 전에 미술을 전공한 친구에게 나의 포부를 밝히며(?) 앞으로 NFT아티스트가 될거라 했다.

그녀는 스케치북 속에 쌓인 내 그림을 잠시 살펴보더니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미술을 기초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의 패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라고.

구도나 선 쓰기, 비율 등이 입시 미술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절대 안할(?) 것들로 이뤄져 있어서 오히려 신선하다고 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은 너무 몸에 배어 있어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미술의 문법을 모르니, 마음대로 들쭉날쭉 그린 근본없는 느낌이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내 NFT 작품이 올해 안에 단 한 피스라도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련다.

꾸준히 하다보면 뭐라도 될 거라는 대책없는 긍정마인드로.




2. 글럼프


그 시기가 왔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바로 그것.

글 쓰기 싫은 시기 말이다.

한동안은 글이 엄청 재미있더니, 요새는 글쓰는 게 그다지 재미가 없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는 것이 인생의 꿈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음 책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아마도 나에게서 이 이상의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안 서서 그런 것 같다.

글 외에도 나를 표현할 만한 수단들을 하나씩 익혀가는 중이기도 하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앞으로도 영영 글을 쓰는 재미를 되찾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어차피 안 써지는 거, 일단은 다 내려놓고 좀 쉬어야겠다.




3. 짜장면이 싫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생 때 급식비 지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늘 무리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3천원짜리 짜장면을 먹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3천원이 너무 큰 돈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짜장면을 먹었다. 내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는 짜장면이 싫어요'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 뿐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요즘에는  음식점에서 애들 여러 명이 앉아 음식을 먹고 있어도 한 명은 핸드폰을 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경우를 종종 본다.어른들이 볼 땐 정없어 보일 일이지만, 오히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그때 배고프지 않을수도 있고, 용돈을 아껴야 할 사정이 있을수도 있다.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 마침 돈을 안 들고 온 거라면 편하게 빌려달라고 말을 한단다. 요즘 애들에게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그 순간 그다지 먹고 싶지도 않은 짜장면을 돈 써가면서 먹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를 접하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겪어보지 못한 유년 시절을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4. 구독 관계


인간 관계는 소유가 아닌 구독이다.

인연을 맺은 순간 이후부터 정기적으로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근황을 확인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만료되거나 비활성화된다.

최근 들어 이렇게 비활성화된 인연들로부터 종종 급작스런 연락을 받는다. 연락을 주고 받은지 너무 오래된 그들로부터 "잘 지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눈치챈다.

결혼하는구나.

나는 결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관계가 비활성화된 지 오래되어 휴면 상태에 접어든 대상에게까지 연락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나는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나의 안부를 묻는 것이, 나의 안부가 목적이 아니며 , '결혼을 통보하는 상황'이라는 내러티브 안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 씁쓸하다.

확실한 건 몇 년 만에 불쑥 나타나 나의 안부를 묻는 그들보단, 매일 지지고 볶는 주식 코인 단톡방의 익명 친구들이 내겐 훨씬 더 친밀하고 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비활성화되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는 관계보단, 지금 현재 활성화되어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집중하고 싶다.

인생은 너무도 짧고, 신경쓸 일 또한 너무도 많으므로.




5.혼밥이라는 어려운 일


내가 처음 혼자 밥을 먹은 것은 대학교 학생식당에서였다. 공강이었는데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 없어서 한참을 고민하다 들어간 학식이었다.

그리고 혼자 밥을 받아 먹던 바로 그 순간 나는 동기들을 마주쳤다. 뻘쭘했다.

이후로 나는 여러 번의 혼밥 경험을 거쳤고 최근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혼자 밥을 먹는다.

그런데 아직도 왠지 혼자 밥을 먹는 것이 무척 어렵다.

식당에서 먹는 것도 그렇지만, 집으로 뭔가를 포장해 갈 때도 나는 매우 부끄러워진다.

이렇게까지 해서 끼니를 때운다는 행위가 매우 초라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식당의 로고가 새겨진 봉지를 옷 속으로 감추고, 누가 나를 볼새라 고개를 푹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누가 제발 혼자 밥먹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6. 층간소음


윗집 아이는 맨날 뛴다.

긴 복도처럼 생긴 우리 집 천장을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콩콩콩콩 뛰어다닌다.

거실에서만 뛰는건가 싶어서 그 소리를 피해 안방으로 피신해도 소용없다.

콩콩콩콩.

발소리가 거기까지 따라온다.

이번 설 명절 때 난 살짝 기대한 바가 있었다.

윗집은 그래도 아이가 있는 가족이니 친가나 외가를 방문하면서 집이 조용해지는 시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그런 내 기대는 무참히 빗나갔다.

윗집 아이는 연휴 내내 도도다다 콩콩콩콩 뛰어댔다.

아무래도 올해 세뱃돈은 못 받은 모양이다.





7. 명절 후유증


명절 끝무렵, 이대로는 왠지 혼자 살다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백수 히키코모리인 내가 생활반경에서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교통사고가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은가?

큰 마음을 먹고 소개팅 어플을 깔았다. 한 다리 건너 지인이 이 앱을 통해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찾아본 것이다. 이 앱은 매니저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가입이 안되는 앱이었다.

가입을 신청하고 기다린지 하루쯤 되었을까? 나는 탈락 통보 문자를 받았다.

소개팅남도 아니고 소개팅 어플에 까이다니!

'올해는 달라져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선 첫 걸음이 굴욕감으로 돌아왔다.

결혼할 수 있을까.

이번 명절 후유증은 어째 유독 지독한 것 같다.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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