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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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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an 23. 2022

[10줄 문학] 잠죽자

2022년 1월 17일 ~ 1월 21일


1. 괜한 걱정

외장하드가 고장났다. 총 4개의 외장하드 중, 구동되는 것은 오직 도시바 하나였다.


나머지는 전부 반응이 없거나,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매개변수가 없다는 팝업이 뜨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예기치 못하게 먼저 죽게 되면, 내 외장하드를 망치로 부숴 줘."


난 대체 뭘 그렇게 걱정했던 걸까?


어차피 외장하드는 소모품이었고 오랫동안 안 쓰면 고장나서 접근도 못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그것을 꼭 돈들여 복구해야 하는지조차 판단이 서지않는 옛 데이터들 뿐인데.


2,3년간 처박아두고 안볼 데이터를 난 왜 그리도 꾸역꾸역 저장해 둔걸까?


어쩌면 우리가 의미를 두는 것은 데이터의 보존보다는, 뭔가를 저장해서 가지고 있었다는 그 행위 자체일지도 모른다.




2. 온전히 나만의 것


회사에 다닐 때 나는 내 출력의 60%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나의 100%를 투입한다. 가끔은 부스터를 써서 120, 130%의 출력을 내서 무리한다.


그렇지만 회사를 나오고 나서 가장 좋은 것은, 나의 모든 노력이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재미'를 추구하는데서 동기 부여를 얻는 사람인 반면 체력이 약해서 고도의 효율성을 필요로 한다.그런 내게, '힘 빠지는 상황'에 최대한 덜 부딪히는 지금과 같은 상태는 그 자체로도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인간관계상 어쩔 수 없이 노력하고, 그것이 나를 위한 대가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모든 나의 노력도, 그로 인한 결과물도 전부 온전히 나의 것이다. '낭비되는 에너지가 없다'는 그 사실이 바로 나의 원동력이 된다.





3. 진실의 거울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광고를 하나 보게 됐다.


무반전 거울이라고 적혀 있던 그 상품의 카피는 이것이었다.


'남들이 보는 내 진짜 얼굴을 알고 싶지 않나요?'


광고 문구를 보고 호기심이 들어 배너를 눌러 접속을 해봤다.


거울의 상세페이지는 생각보다 별다른 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왠지 모를 호기심에 구매자들의 리뷰를 찾아보았다.


리뷰는 하나같이 충격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비대칭으로 못생겼는지 몰랐어요!"


충격에 휩싸인 심경으로 가득한 리뷰창을 보며, 인간의 호기심이란 대체 무엇인가 고민했다.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4. 마이 프레시어스 레이디


나에겐 작년에 내 셀프 생일선물이랍시고 12개월 할부로 긁은 명품백이 있다.


그것은 바로 레이디 디올이다.


가방 하나에 무려 580만원이라니.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어차피 나는 샤넬을 살 생각이 없었으므로 큰 맘 먹고 질렀다.


이후로 거의 300일이 다 되어 가지만 그 가방을 들고 외출한 것은 일주일도 안 된다.


얼마 전 금수저 컨셉으로 유명했던 한 유튜버가 착용했던 많은 명품들이 죄다 짝퉁이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녀의 월 광고 수익은 8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했다.


월 8천씩 버는 사람도 가품을 드는데, 백수인 내가 12개월 할부를 갚으며 진품을 끙끙 모셔두고 산다니.


잠시 현타가 몰려왔다.


그러나, 이번 주 디올이 기습적으로 레이디 디올 모델에 110만원의 가격 인상을 단행하자 그 현타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5. 잠죽자


'잠죽자'라는 말이 있다.


'잠은 죽어서 자자'는 문장의 약자로, 밤새서 공부를 하거나 열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말이다.


한때는 내게도 K-노오력의 상징과도 같은 이 말을 신봉했던 시기가 있었다.


논문이나 소설을 쓰면서, 덕질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잠죽자'를 외쳤던 나날들.


밤을 샐 정도로 뭔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퍽 쿨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3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나는 저 말을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잠은 죽어서나 자는 것' 이라는 생각으로 제때 자는 행위를 소홀히 하면, 정말로 빨리 죽어서 자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이상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노오력을 쏟아야 하는 일에는 종사하고 싶지 않다.


밝을 때 활동해야 하고, 어두워지면 자야 하는 태초의 리듬을 거부하지 않겠다.


죽어서 자느니, 매일 제때 자면서 안 아프게 오래 살란다.



Cover image : via unsplash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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