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0줄 문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Mar 27. 2022

[10줄 문학] 구형 로봇청소기

2021년 3월 21일 ~ 3월 25일


1. 고맙다 친구야


얼마 전, 100불녀 인스타그램으로 DM이 왔다.


내 인스타 게시물을 재밌게 봤다며, 혹시 방송에 출연하여 오은영 박사님에게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방송 내용을 좀 찾아보니, 웬걸.


소비생활과 관련하여 카푸어나 명품 플렉스하는 그런 자극적인 소재로 시청률 어그로 끌어줄 출연자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 작가는 내가 주식하고 코인하는 걸 노답 플렉스로 포장해서 방송에 내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가 말했다.


"너는 네가 휴학하고 돈 벌어서 여행도 다녀오고, 돈 없다고 호주 워홀 가서 1년 간 쎄빠지게 돈도 모아왔잖아. 너 지금 차 할부 갚느라 생활 못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정도로 쓰레기처럼 살지는 않아 ㅋㅋㅋ"


고맙다 친구야..





2. 모스부호 휴대폰


어릴 때는 휴대폰 벨소리에 집착했다.

휴대폰을 새로 사자마자 내 마음에 드는 노래의 마음에 드는 후렴구를 잘라서 벨소리를 선정하고, 메시지 알림음도 신중하게 골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는 휴대폰을 바꿔도 벨소리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 사용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내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뭐인지도 나는 모르니까.


대신, 내 휴대폰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진동 모드로 지내고 있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는 짧은 몇 분간의 시간을 제외하면, 내 휴대폰이 제 목소리를 낼 일은 없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진동 소리에 익숙해졌다.


긴 진동은 카카오톡, 조금 더 긴 진동은 재난 문자, 짧은 진동은 알림.


이런 식으로, 나는 휴대폰의 화면을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내게 건네는 진동의 길이로 그 뜻을 해석하게 되었다. 


모스 부호를 발신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내 휴대폰.




3. 구형 로봇청소기


로봇청소기라는 제품이 처음 세상에 출시되었을 때, 아이로봇 룸바라는 청소기를 사용한 적이 있다.


나의 룸바는 하루 종일 집안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 덜컥 덜컥 머리를 박고 다녔다.


방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는데, 어째 다가오는 벽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 직전에 회전하거나 돌아서는 지능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경험을 통해 짐작하며 '여긴 벽일 거야'라고 알아서 피하는 스마트한 로봇 청소기들보다는, '벽일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직접 부딪혀 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생각하며 쿵쿵 머리를 찧고 돌아다니던 구형 룸바의 모습에는 짠하면서도, 리스펙하게만드는 측면이 있기에.


나는 늘 그런 룸바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응원하곤 했다.


요즘의 똑똑하고 스마트해서 알아챌 건 다 알아채서 피하는, 청소 과정에서 몸체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않는 로봇청소기들은 그래서 내 마음을 끌지 못한다.


'꼰대'라는 사람의 범주에는 남에게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충고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포함된다고 한다.


남의 충고는 일절 듣지 않은 채, 스스로 '이건 왠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방향으로 머리를 찧으러 돌진하며,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봐야만 안다고 말하는 나는 (아직은) 젊은 꼰대이다.




4. 애나 델비 만들기


최근 나의 고민은 내가 너무 사기꾼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나는 작가이고, 누구에게는 클라이머이며, 누구에게는 NFT 아티스트이고, 누구에게는 프리랜서 마케터이다.


사실 나는 이 중 어떤 것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지 않다. 그저 실체 없는 백수일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마치 지구에서는 달의 앞면만 보이듯이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나의 한쪽 면만을 보면서 마치 그게 전부인 양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거야. 정작 나는 집구석에서 웹소설만 쓰고 있는데. 이러다 나 나중에 애나 델비같은 사기꾼이 되면 어떡하지?"


이 세상에 유일하게, 360도 VR 시야로 나의 모든 측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진 내 친구가 말했다.


"나중에 보다가 네가 너무 감당이 안될 것 같으면 내가 너의 사기극을 빵 폭로해 줄게."


고맙다 친구야..





5. 조나단의 꿈


<갈매기의 꿈>에는 남다른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나온다.


갈매기는 무리지어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이지만, 조나단의 존재는 특별하다.


그는 다른 갈매기들처럼 먹이를 찾기 위한 비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날개를 달고 태어난 존재로서 비행이라는 본질 그 자체에 집중하며, 좀더 멋진 비행을 하려고 노력한다.

비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며 정진한 그는 배부른 갈매기는 아닐지라도, 가장 멋지게 날 수 있는 갈매기가 된다.


어린 시절에 봤을 때는 이 이야기가 자유에 대한 우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이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들이 비웃어도, 먹이를 구하기 위한 행위와 관계가 없어도, 무리의 행동양식과 거리가 있더라도.

뚜렷한 목표와 꿈을 가지고 정진하는 자는 언젠가 그만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마치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10줄 문학으로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DM으로 편하게 소재나 사연 접수해 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10줄 문학으로 써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줄 문학]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