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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14. 2022

[10줄 문학] 완다 막시모프 되기

2022년 5월 9일 ~ 5월 13일


1. 완다 막시모프 되기


어버이날 전날. 아버지를 사정상 하루 전날 미리 찾아뵙게 되어 남동생과 함께 꽃집에서 카네이션 바구니를 샀다.


바구니를 들고 가다가 한 가게에 들렀는데, 카운터에 계시던 아저씨가 내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보고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아들한테 받았나봐요?"


나는 잠시 당황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상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결국 어색하게 네,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조금 얼떨떨한 심경으로 가게를 벗어났다.

동생을 내 아들로 오해한 건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 또한 따지고 보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이 차원의 현실의 나는 이러고 살고 있지만 멀티버스 속 다른 차원의 나에겐 자식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모쪼록 광활한 우주 속 다른 차원의 나는 사랑으로 키운 자식들에게 카네이션을 받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길 바라본다.






2. 레고랜드


우리는 12년 전, 조별 과제를 하면서 만났다. 우리의 조별 과제 주제는 레고랜드였다.


얼마 전, 레고랜드가 개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오랜만에 그녀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우리는 레고랜드 개장 기념 급만남을 했다.


그 날 우리는 술을 마시며 레고랜드에 대해 한참을 성토했다.


사실 우리의 12년 전 발표 주제는 레고랜드 건설에 의한 중도 유적지 파괴였다. 우리가 정성스레 준비한 PPT에는 중도 유적지를 손상시키면서 진행되는 춘천시의 무리수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12년이 지난 뒤, 우리는 레고랜드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 없는 30대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레고랜드를 욕하며 술을 마실 수 있다. 12년 전, 같이 PPT를 준비하던 그 때처럼.




3. 일렉트릭 플라시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나의 전기 자전거 익절이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20kg의 자전거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학원에 가야 했다.


익절이는 7단 기어 자전거였지만 기어의 존재 의미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익절이의 기어를 가장 무거운 7단에 두고, 오르막길을 오르거나 힘들 때마다 야금야금 전기를 켜는 형태로 손쉽게 구간을 빠져나오곤 했으니까.


그런데, 기어를 변속하며 타니, 전기가 흐르지 않는 무거운 전기 자전거를 타는 것도 걱정했던 것만큼 힘들지 않았다.


자전거 수리점에 갔을 때, 아저씨는 익절이가 고장난 게 아니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저 단순히, 뒤에 배터리의 코드가 뽑혀있었던 것 뿐이었다.


그래도 그 날 이후 나는 익절이를 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기를 켜지 않게 되었다.  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전기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힘든 구간에서 슬쩍 슬쩍 전기를 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자신의 힘으로 달릴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게 다가오는 어느 봄날.







4. 잘한다, 자란다



나와 함께 사는 반려조의 나이는 12살이다.


사람으로 치면 120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다리에 힘이 별로 없어서, 횃대에 잘 앉아있지도 못한다.


행동 반경도 극히 좁아져, 작은 새장 안에 있는 작은 둥지 안에서 눈을 붙이고, 나와서 밥을 먹는 것이 그의 일상의 전부이다.


가끔 그는 밥을 먹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떨어진 다음에 다시 둥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횃대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가 한껏 도약하려고 바닥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다리를 굽히며 자세를 잡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조마조마해진다.


그는 항상 1,2번은 떨어지고, 3번째에 성공한다. 할아버지가 된 그는 그런 간단한 동작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진심어린 박수를 받는다. 첫 걸음마를 떼는 데 성공한 어린 아이 만큼이나, 자신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할아버지의 노력도 충분히 '잘한다'라는 칭찬을 들을만한 일이니까.





5. 되는 일이 없다


2018년 쯤, 인생에서 꽤 힘든 시기가 왔었다. 결혼하려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덤프트럭에 치어 교통사고 뺑소니를 당했으며, 몸은 망가졌다.


그런데 이번 5월이 마치 그 때 같다. 5월이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돈 봉투를 잃어버렸고 루나 사태로 큰 돈을 잃었다.


하려던 일은 다 엎어졌고 나는 집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며 소설이나 쓰고 있다. 당근 마켓에 팔 만한 것들을 다 내다 팔고, 급기야는 책들도 내다 파는 중이다.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던 칼럼은 결국 게재가 어렵겠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나는 이렇게 조금이나마 들어올 예정이었던 수입을 날렸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하필 날씨는 얄궂게도 좋더라. 늘 그러하듯이 나의 불행은 이 세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하필이면 오늘 날짜도 13일의 금요일이네..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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