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0줄 문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May 21. 2022

거절당한 책들의 자리

2022년 5월 16일 ~ 5월 20일

1. 독일이 뭐라고


조카가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가게 되었다.


1년 정도 가게 될 거라며, 가 있는 동안 놀러오라고 했다.


나는 무심코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앞으로 1년이라. 내가 독일에 갈 수 있을까?


아마도 올해는 어려울 것 같고, 내년 쯤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도중에 새장 속 둥지에 웅크리고 앉은 새님과 눈이 마주쳤다.


너 지금 내 여명 계산했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나를 책망하는 새님의 눈빛에 살짝 마음이 찔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니야, 나 독일 아예 못가도 되니까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





2. 거절당한 책들의 자리


요즘 중고서점에 자주 간다. 책을 대여섯권씩 자전거에 싣고 가는데, 그 중 꼭 한 두권은 매입이 안된다.

재고가 너무 많아서란다.


고작 1500원의 돈이지만 거절당한 나는 시무룩한 마음으로 다시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면 중고서점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그 책이 원망스럽다. 분명 한때는 좋아서 샀을 책인데도.


어쩔 수 없이 '오늘의 매입 거절 책장'같은 걸 만들어서 매입이 거절된 책들만 모아 꽂아놓았다.


그 책장에 꽂힌 책들이 별로였던 책이거나 안 좋은 책은 아니다. 단지 너무 많이 팔렸고, 중고서점에도 너무 많이 흘러들어간 책일 뿐.


비록 내 당장 1500원은 못 벌었지만 그래도 책은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3. 명사형 제목


어제부터 웹소설 판이 난리다. BL웹소설 유명작이 완결나 트위터 트렌드에 올랐고, 그 작품의 제목이 순문학 유명작품과 동일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 와중에 상당히 각광받는 현대 소설가로 유명한 다른 작가가 또 등판했다. 자신의 작품과 제목이 동일한 3개의 작품을 거론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애초에 웹소설 독자는 본인이 어떤 소설을 소비하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는 편이다. 문제의 그 BL웹소설이 5년 동안 연재를 하는 동안 누구도 이슈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문장형 제목이나 합성어 제목이면 모를까, 단순히 명사 제목을 동일하게 썼다고 해서 비난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동일한 제목의 순문학 작품을 읽으며 BL웹소설을 떠올리지 않듯이, 그 반대 또한 그러하다.


웹소설은 웹소설 답게 특이한 제목이나 지으라는 건가? 웹소설 작가도 한글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들에게도 명사형 제목을 지을 권리가 있다.





4. 손 편지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쓰고 있다. 멘토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결연된 학생과 한 달에 한 번씩 손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다.


재단에서는 처음부터 내게 꼭 손으로 편지를 써줄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글씨는 정말 못났고, 아무리 쓰려 해도 예쁘게 쓸 수가 없다. 오히려 깔끔한 폰트로 타이핑하는 것이 그 친구도 더 읽기 쉬울텐데.


심지어 우리는 서로의 편지 원본이 아닌 스캔본을 전달받는다.


그런데 점점 편지를 주고 받아보니 알 것 같다. 손으로 글을 쓰는 동안 그 안에 담기는 감정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한 달에 한 번, 메신저나 메일로는 느낄 수 없는, 가장 깊숙한 친밀함을 주고 받는다.





5. 당한 자와 가한 자


어린 시절, 시골 집에서 사촌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한 두 번은 아니었고, 매년 다른 방식으로 왕따와 괴롭힘을 당했다.


이런저런 게 많았지만 몇몇 기억이 선명하게나는 것은 무릎까지 눈이 쌓인 운동장에 날 묻고 버려두고 간 것과, 사랑방으로 불러서 노끈으로 내 손목을 꽁꽁 묶고 혼자서 풀어보라고 한 것이다.


그들이 내게 제일 악랄하게 굴었던 것은 그들이 초등학생일 때였다. 나는 미취학이거나 초등학교 저학년때 당한 일이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어른이 된 후에도 상흔으로 남았고, 나는 그들을 피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할 때 쯤은 꼭 한번씩 친한 척 연락이 온다.


나를 괴롭혔던 그들은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까먹고, 자신의 행복을 전시하며 행복하게 웃는다. 나는 그런 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볼 때마다 역함을 느낀다.


나는 가족이기 전에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낳은 아이이자 내 사촌 조카이기도 한 그 아이들이 예쁘게 보이지도 않으며 차마 미래의 행복을 바랄 수도 없다.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10줄 문학으로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DM으로 편하게 소재나 사연 접수해 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10줄 문학으로 써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0줄 문학] 완다 막시모프 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