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Sep 11. 2019

쉘부르의 우산(1964) : 결국엔 다 지나간다

C’est La vie : 죽을 것만 같아도, 결국엔 살아지는 게 인생.

 

 차가 통째로 잠길 정도로 비가 쏟아지던 어느 평일 저녁, 카페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애초부터 별생각 없이 아름다운 포스터의 색감에 이끌려 무작정 예매한 영화였다.

 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지만, 오프닝 크레딧이 오른 뒤 첫 대사부터 노래로 시작되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동차 정비공 기는 우산 가게 주인의 딸인 쥬느비에브와 사랑하는 사이다. 그는 힘든 일과를 끝내고, 쥬느비에브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우산 가게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와 함께 공연을 보고 춤을 추고 산책하는 평범한 데이트를 즐긴다. 비록 어린 딸이 좀 더 돈 많고 잘난 남자를 선택했으면 하는 쥬느비에브 어머니의 욕심이 두 사람의 관계에 다소 장애가 되는 것처럼 비치긴 하나, 젊은 남녀의 앞길에는 거슬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지만, 구체적으로 뭔가를 진행해 보기도 전에 기에게 입영 통지서가 날아온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상심한 두 사람은 애틋한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기가 전으로 떠난 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후로는, 글쎄.. 꽤나 통속적이나 보편적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전개된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선택’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남녀 주인공 두 사람 각자의 인생에서, 또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이 내린 결정과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은 잔인한 운명에 힘겨워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고자 하는 것 같다.




 젊은 연인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꿈, 안타까운 엔딩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라라랜드>가 생각나 버리고 만다. 알고 보니, 이 영화가 실제로 <라라랜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라라랜드>의 여주인공 미아가 쓰는 극본의 주인공 이름은 쥬느비에브로, 이 영화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고 하니, 실제로 이 영화가 <라라랜드>의 어머니 격 영화라고 치켜세우는 표현들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버린 젊은 연인의 순수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비슷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마음에 남는 여운의 깊이가 짐짓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두 영화에서 각각 메인 커플에게 조명한 시간과 묘사의 분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라라랜드>에서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서로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영화의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다. <쉘부르의 우산>에서는 기와 쥬느비에브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전혀 그리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두 영화의 차이가 드러난다. <라라랜드>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며, <쉘부르의 우산>은 인생의 큰 흐름 앞에 어수 없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연인의 손, 누구나의 마음속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미련의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러닝 타임 내내 미아와 세바스찬이 쌓아온 ‘연인’으로서의 서사에 빠져 있던 <라라랜드>의 관객들은 두 사람을 여전한 연인으로 인식하며, 두 사람이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파한다. <쉘부르의 우산>은 다르다. 영화의 러닝타임 상으로 봐도 두 사람의 연인으로서의 달콤한 시간은 찰나처럼 짧았으나, 이별하는 과정은 각자 지난하고 힘들었다. <라라랜드>는 미아와 세바스찬의 연인 관계가 정리되는 장면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지나간다. (만약 <라라랜드>가 <쉘부르의 우산>과 유사한 방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fade out 되는 과정을 처절하게 묘사했다면 지금의 이와 같은 팬덤은 존재하지 않았을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 <라라랜드>는 <쉘부르의 우산>을 오마주 하면서도, 그로부터 취할 것은 취하고, 강화할 것은 강화하되, 생략할 것은 과감하게 생략한 영화였다. 때문에, <라라랜드>와 <쉘부르의 우산> 사이에는 대략 50년의 텀이 있지만, <라라랜드>가 <쉘부르의 우산>의 시간을 뛰어넘은 프리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2시간 동안 끊임없이 귓가를 간지럽히던 선율이 끝나고 나자, 마치 꿈에서 깨서 현실로 복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쳐다본 포스터에는 이런 카피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을 거야”


 너무도 아름다운 포스터인데, 보는 순간 마음이 무척 썼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의 감정이란, 그리고 그 순간에 서로에게 내뱉는 약속들이란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가. 더욱 슬픈 것은, 저 말을 서로에게 내뱉던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던 두 사람의 마음과, 바로 저 이유 때문에 결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쥬느비에브는 기가 없는 삶, 그로부터 오는 고독을 견딜 수 없었기에, 까사르를 선택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기는 쥬느비에브가 상실된 삶을 버텨나가기 힘들어 한없이 방황한다. 서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마음으로, 서로의 상실을 견디다 두 사람이 결국 찾는 해답은 서로에게 했던 약속이다. 쥬느비에브는 기의 딸의 이름을 두 사람의 약속대로 ‘프랑소와즈’로 짓고, 기는 대모님의 죽음으로 물려받은 유산과, 늘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마들렌을 재조명하며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고 쥬느비에브에게 이야기했던 주유소를 차려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된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부재를 견디게 했던 존재들을 각자 품은 채로 너무 다른 길을 가버리게 된 서로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때뿐이다. 서로를 스쳐간 두 사람의 말간 얼굴에는 순간적인 회한 외에는 다른 어떤 질척거림도 없다. 둘 중 누구도 그 짧은 순간의 감정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라라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처럼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한 회상도 없다. 짧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그저 서로에게서 떠나가고, 다시 살아갈 뿐이다.


C’est La vie. 죽을 만큼 아파도 죽으란 법은 없고, 다 지나간다.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는 한 결국은 또 하루하루 살아지는, 그것이 인생이기에.




+


1. 카트린 드뇌브는 정말 숨이 멎을 정도로 엄청나게,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고전 미녀’라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사실 브루넷 취향이라, 처음 봤을 때부터 한결같이 마들렌을 지지했지만 그래도 언뜻언뜻 화면을 장악하는 카트린 드뇌브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했다. 10대의 불장난 같은 사랑으로 덜컥 아이를 가져버린 상태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호감을 사기도, 설득력을 갖기도 어려울 것 같은 쥬느비에브의 캐릭터가 마지막까지 매력과 개연성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녀의 미모 덕분이리라.


이번  F/W 헤어 액세서리 트렌드가 리본이라는데 혹시 이 영화의 재개봉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2. 노래들이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아름답다. (참고 : 쉘부르의 우산 OST) 프랑스어로 된 노래를 평소에 들을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적응하는 게 좀 어려웠지만 막상 적응하고 나니 굉장히 아름답게 귓가에 맴돌더라. 특히,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를 부르는 기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이면 한동안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릴 것 같다.


재개봉 버전의 컬러풀한 포스터도 좋지만, 이 버전 포스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우산을 쓰고 음악 위를 걸어가는 젊은 연인의 뒷모습.


 

매거진의 이전글 청춘 댄스 파트너(1985) : 에너지라는 게 폭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