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의 기억이 흔히 그렇듯, '그 일'과 관계된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단지, 그 날따라 아주 덥고 습했다는 것. 그래서 더욱 답답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 날 따라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밤새 언니를 보챘다. 내 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언니를 붙들고 한없이 징징거렸다. 언니는 덩달아 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어컨도 없던 그때의 우리는 선풍기 앞에 탈진하듯 누워 있었다. 소파에 누워, 언니가 씻어 준 천도복숭아를 우물거리며, 우리는 방 한가운데 전원이 켜져 있는 작은 컬러 TV를 보고 있었다.
바깥은 어두컴컴했지만, TV 속은 한창 대낮이었다. 그리고 화면은 끊임없이, 삐용삐용 하는 수십 대의 구급차들의 소음과 함께, 그 날 낮에 일어났단 어떤 '사건'에 대한 영상을 계속 송출하고 있었다. 실종자, 사망자 몇 명 등의 헤드라인 문구가 하단에 뜨고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낮의 '지옥도'였다.
언니, 무슨 일이야? 나는 물었다. 서울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대, 어떡하니... 하고, 언니는 안타까워하며 화면에서 줄곧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되는 참상에 나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살고, 죽는다는 것이, 다쳐서 아프다는 것이 잘 와 닿지 않던 그때의 나에게도 이상하게 화면 속의 모습은... 그저 이걸 간단하게 끄고 도저히...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밤새 거실에서 TV를 보았다. 어두운 밤부터 꼬박 해가 뜰 때까지, 우리는 꼼짝없이 그 모든 것을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날 이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삼풍의 밤'이었다.
어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충격적인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이전의 세대로 보자면 '전쟁'이었겠지만, 최근에는 전쟁 자체가 흔하게 발생하지는 않으므로 주로 대형참사나, IMF 같은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는 경제 위기 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고 한다. 특히 유소년 기나 청년기의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발생한 집단의 트라우마가 그 사람의 이후의 인생에서의 태도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2020년 현재, 30대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집단의 기억은 세월호 참사와 3.11 동일본 대지진이었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구 지하철 참사와 9.11 테러가 있었다. 거기서 한 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99년 - 2000년대로 넘어갈 때의 밀레니엄 버그 - 지금 돌이켜 보면 2019년에서 2020년이 되었듯, 그저 해가 넘어가는 것뿐인데 다들 마치 지구가 종말의 위기를 맞이하고, 그로 인해 세계적으로 큰 위기가 닥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 집단 히스테리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고작 지구에 온 지 30여 년의 삶 속에서도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바로 1995년 6월 29일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서 멀쩡하게 서 있던 백화점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생중계되는 화면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인상을 쓴 채로 뛰어다녔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부상당한 사람도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경하는 사람도, 가족을 찾으려 달려 나와서 하염없이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지쳐 있었고, 날씨는 무더웠다.
당시 사람들은 삼풍백화점 근처를 지나가면,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났다고 했다. 수습을 위해 건물의 잔해가 버려진 난지도 매립장에는 수많은 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가족의 시신 한 조각이라도 수습하려고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고 했다.
이 일은 내게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급작스럽게, 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잘못과 부주의로 인해 인생이 급작스럽게 종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도, 신기하게도 아무도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격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자라면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삼풍은 대체 어찌 된 것일까.어떻게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낼 수 있었을까?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당시 상황을 회고한 책과 픽션화한 소설을 찾아보았다. 삼풍백화점이 철거된 자리에 어떤 새 건물이 들어섰는지 찾아보았고, 그 건물을 지나치며 스산한 기분과 서글픔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는 슬픈 기억보다는, 여러 젊은이들이 모여 교류하는 즐거움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난지 한강공원에서 포근한 날씨와 경치를 즐기다가도 문득 닥쳐오는 그런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 혹여라도 드라마나 영화 등의 매체에서 그때 당시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마주하기라도 하면, 그 한순간에 바로 나는 TV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속이 울렁거려 푹 잠들지도 못하던 그 어렸던 날의 새벽으로 돌아가 있었다. 때로는 어떤 기억은 그렇게 강렬하게 사람을 과거에 옭아매 두기도 하는 것이다.
한동안, 삼풍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SNS에서 이번에 KBS에서 방영한다던 다큐멘터리의 예고편을 보게 됐다. <모던 코리아>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홍보하는 이 광고의 영상은 그 자체로는 무척 단순했다. 롱테이크로, 당시 헬기 위에서 촬영한 영상만 30초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노출했을 뿐.
단 30초뿐이었지만, 이 영상은 다른 어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관련 영상보다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당시 상황을 하늘에서 관조한 영상을 통해 이웃에게 닥친 끔찍한 재난을 목격해버린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풍아파트 옥상에서 무너진 삼풍백화점을 구경하는 사람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가족들과 함께 구경을 나갔던 사람들처럼, 그들 또한 타인에게 일어난 재양을 목도하고 있었다. 지은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백화점 하나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버린, 전 세계가 경악한 초유의 사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와 '내 가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은 그저 '남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그 일이 우리 집 바로 코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목격자'였다.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사망한 사람은 502명이었지만, 삼풍 백화점의 붕괴 현장이 남긴 시각적 잔해는 TV 화면을 통해 끊임없이 송출되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모조리 할퀴고 지나갔다. 당시 삼풍백화점 경영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우리의 트라우마를 더욱 심화시켰다. 분노해도 소용없었고, 정당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를 일으켰어도, 심지어 고객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붕괴 직전 그들끼리만 백화점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졌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겁한 과거를 짊어진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하루라도 더 누릴 날들이 있었다. 반면, 비명횡사한 피해자들은 말이 없었고, 죽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저 세월이 흘러 잊혔을 뿐.
25년 전의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은 우리 세대의 집단 무의식 속,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의 뿌리로 남았다. 우리의 가족이 어느 날 한순간 갑자기 저렇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해도, ’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만 안된 거지, 운이 나빴지.’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거대한 무력감 또한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우리는 모두 피해자였음에도, 누구에게도 우리가 받은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우리는 거기에 묻히고, 몸이 찢기고, 위령탑에 봉인된 직접적인 피해자와 그 유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원망할 사람, 비난할 사람, 이 모든 끔찍한 일에 대하여 기꺼이 책임을 물을 사람.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항상, 내 마음의 즉각적인 평온을 구할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난의 대상은 당시 삼풍백화점의 경영진들이었다. 그들은 건물이 곧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끼리만 먼저 빠져나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살인자들로, 익히 알려진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이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 흐르던 내레이션의 내레이터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슨 지진이 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건물이 막 흔들렸고 굉음이 나니까.. 무슨 일인가 하고 문을 열고 나와서 쳐다보니까 평상시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없고 건너편에 아파트가 보이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이게, 사태 파악도 안 되는 거고.. 멍하니 정신 놓고 있는데.. 날 보고 ‘누구냐’고 그래서.. 내가 여기 사장이라고..."
그저 당시의 자료 화면에서 추출한 수많은 당시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의 증언일 것이라고 막연해 예측했었는데, 사장이라니. 25년 만에 삼풍 백화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문을 여는 첫 내레이션의 당사자가 바로 그 삼풍 백화점의 이한상 사장이라니.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파격이었다. 해당 다큐멘터리에 대해 짤막한 30초짜리 예고 영상을 보았을 뿐, 이외에 어떠한 것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이후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삼풍 사태의 범인’이 얼굴을 드러내 놓고 감히 이런 인터뷰에 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구성이었고, 놀랍도록 대담한 시도였다.
그의 얼굴이 저렇게 생겼었나? 고민하는 순간 자료화면은 과거 참사가 발생한 직후 기자들에 둘러싸여 대국민 사과를 하던 젊은 날의 그를 비췄다. 고단하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
"제가 모든 것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삼풍백화점이 오픈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한상 사장과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 부분에서 사장은 약간 미소를 띠기도 했는데, 특히 당시에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결국 오픈했을 때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꼈다며 미소 짓는 부분에서는 대체 왜 내가 이런 가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KBS 다큐팀의 저의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있던 고객들을 남겨둔 채 저 한 몸 살겠다고 황급히 빠져나온 ‘살아있는 악마’ 아닌가.
그리고, 뒤이어 이 다큐멘터리는 또 한 명의 주요 인물을 보여준다. 그는 바로 삼풍백화점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인 김문수 씨다. 25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여전히 분노를 금치 못했다.
“갈아서 마시고 싶었습니다 진짜, 이런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찢어 죽이고 싶었죠.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왜 사형시키지 않을까?”
이 다큐멘터리는 곧이어 당시의 자료화면 인터뷰를 토해 당시의 사회적 분노와 비난이 온통 백화점의 경영진에 집중되어 있던 상황을 보여준다. 그 분노의 원인은 역시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백화점 경영진들은 붕괴할 것을 미리 알고 먼저 빠져나왔다더라’는 썰이었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을 두고 위의 높은 사람만 다 빠져나올 수 있는 건지 이건 이해가 안 갑니다, 이건 인간의 도리가...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국민 앞에 당신은 정말 목을 내놓고 사죄해야 해요, 정말 전부를 다 내놔야 해요!”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바로 내가 어린 시절부터 굳게 믿어왔던 ‘백화점 경영진들이 미리 빠져나왔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 백화점 경영진 중역의 육성으로 직접 듣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에도 자신을 포함한 경영진이 백화점이 붕괴된 후 3-4분 뒤 빠져나왔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 ‘건물이 무너졌는데 무너진 건물에서 어떻게 3-4분 뒤에 나올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을 믿겠느냐, 그건 거짓말이다’라고 윽박을 지르며 저마다 비난하기 바빴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하여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도,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경영진이 미리 건물을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삼풍 백화점 경영진 측은 진작에 건물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보강 공사도 진행했으며 당시에 그들은 건너편 동에서 대책회의 중이었다고 한다.
이한상 사장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직접 증언했다.
“건너편 동에 있었으니까..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서 보니 평상시에 있었어야 하는 것들(맞은편 건물)이 없고, 건너편의 아파트가 보이더라고요”
그는 사고가 난 3,4분쯤 뒤 백화점 옆 동에서 내려오자마자 현장에서 바로 구속이 되었고, 당시의 영상들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 기획을 통해 처음 보게 되었다고.
그리고 참사가 발생한 다음날, 붕괴된 삼풍백화점 지하에서 한 여인이 구조된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삼풍 일가의 며느리였다.
당시 삼풍 백화점의 이준 회장은, 만약에 정말 건물이 무너질 것이고 직원들과 가족이 다칠 것을 조금이라도 짐작했다면 어떻게 자신의 며느리가 그 현장에서 묻힐 수가 있었겠냐고 말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다칠 것을 알면서도, 본인들만의 운신을 위해서 현장을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겠느냐고.
오히려 당시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수습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총체적인 거예요, 그냥. 뭐 한 가지 잘못했다,그게 아니고...모든 게 잘못됐다.”
붕괴 사고가 발생하기 불과 보름 전, 서초구청은 삼풍 백화점 건물 안전성이 적절하다고 평가했고, 그 근거는 ‘이 건물은 지은 지 5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당시 서초구청에서 관리 감독만 잘했어도 건물은 그 많은 사람들을 삼키면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삼풍백화점의 경영진을 비난했다. 당시 삼풍백화점의 회장과 사장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징역 7년 형을 언도받았지만, 국민들 대부분은 5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사의 대가로는 너무도 약하다고 생각했다. 악의 축인 그들이 비겁하게 엄벌을 피해 갔다고 또 비난했다.
“나도 한때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했던 적이 있죠.”
누구도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삼풍 백화점 경영진과 사장의 말을 ‘거짓말’이라 치부하며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그저 ‘탐욕과 영업 이익에 눈이 멀어 건물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영업을 중단하지 않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돈벌레’로 만들어서 비난을 집중시키는 편이 더 편했기 때문에. 이 모든 난리는 결국 그들 ‘개인’의 탐욕으로 인해 벌어진 문제로 결론지어졌고, 사건은 허무하게 종결되어 버렸다.
당시의 공공기관과 정부는 이 참사를 막지도 못했지만, 참사 이후의 수습에 대해서도 무능함을 드러낸다. 당시의 구조는 제대로 된 지휘 본부도 없는 상태로 한 달 내내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니까 해결된 거예요. 시간은 자꾸 흐르니까 어느 방향으로든 간 것이지, 누가 해결을 딱 하겠다고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냥 시간이 해결해 준 거예요. “
이어져 나오는 피해자 유가족의 증언 또한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상황과 정부의 미숙한 소통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런 일이 생기면 국가한테 우리가 자꾸 의지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청은 서울시, 서울시는 정부, 다 이렇게 책임을 회피합니다. 누구 하나 나와서 얘기해주고 대화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피해자 가족들이 듣고, 여러 피해자 가족들이 만나러 갔지만 그분들에게 제지당하고 만나지도 못하고...”
“우리 편이 아무도 없어요 그때는. 진짜 초조하고 급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들은) 그저 유가족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참사 후 21일이 지나서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못 형식적인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다.
“귀중한 생명을 잃으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다치신 분들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불의의 사고를 당하신 가족 여러분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금까지 현장이 벌어지고 수습되고 나면 관심 끝! 사고 나고 희생당하고, 분노가 한쪽으로 쏠리게 만들고.. 가십이 생기고 보상받으면 끝나는 걸로 알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뭔가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거를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 때도 이렇지 않았던가. 체육관에 모여 아이들이 구조되기를, 시신이 운구되기를 기다리던 수많은 유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유가족들이 제일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이 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현장에 우리는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그 자리에) 위령탑을 세워달라고 수없이 건의를 했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돈이 없으니까, 이걸 그렇게 ‘그 공간으로 내주면 보상을 못해준다’, ‘주위의 아파트값이 내려가니까 안된다’ 하더라고요. 땅값이 내려가기 때문에 안된다고. 다 돈과 관련된 일이에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돈을 추구하는 탐욕 때문에 사건이 일어났고 그 탐욕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들이 진짜 앞으로도 이런 사고를 막을 생각이 있나? 의지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때 이후로 대한민국의 공공 안전에 대한 체계는 조금은 발전했다고 볼 수는 있다. 건물을 지을 때 안전 기준이 대폭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매뉴얼은 생겼다고 한다. 적어도, 당시 현장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해 구급차가 진입할 수조차 없었던 해프닝은 이제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도록. 병원에서도 대량의 환자가 일괄적으로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매뉴얼을 만들었으며, 중앙 1부 구조 본부가 발족이 되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 참사 당시의 아수라장을, 대한민국의 긴급 구조 체계에 대한 전환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외부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정말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당시의 ‘진짜’ 가해자들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빨리빨리’ 건물을 올리려 부실공사를 진행한 건설 및 시공사도, 위험성이 있는 건물에 건축 허가를 내주고 관리를 허술히 한 정부 기관도, 건물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업을 전면 중단하지 않은 채 지속했던 삼풍백화점의 경영진도. 모두에게 잘못이 있었지만, 비난은 오직 삼풍백화점의 경영진에만 집중되었다. 누군가는 호되게 모든 비난을 뒤집어썼지만, 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그들에게 죄를 전부 뒤집어 씌운 누군가는 책임도 지지 않고 비난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잊히기만을 바라면서.
“사회적인 망각이죠. 이렇게 흔적도 하나 없이, 이 상태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희생된 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인가?”
애초에 그런 엄청난 사건이 어찌 오롯이 경영진 만의 잘못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드러난 가해자들 만큼이나, 숨겨진 가해자들의 반성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연관된 이들이 훨씬 많음에도, 그들은 대중의 망각에 기대어, 분노의 표적을 비켜간 채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도 이 나라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고.
이렇듯 25년 만에 알게 된 삼풍의 진실 앞에 나는 마음이 무척 답답해졌다. 인생이라는 것은 정말 어럽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특정한 누군가를 집어 비난하고, 나쁜 놈으로 만들고, 원망하고, 책망하며... 마치 그 사람이 이 모든 일을 초래한 것처럼, 내가 이 얽히고설킨 문제의 ‘정답’을 찾아낸 것처럼. 그렇게 흑백논리로 단순하게 편 가르며 마음이 편해지면 그만이면 좋겠는데.. 실제로 살다 보면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내가 지난 25년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로 알고 지냈던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고 면구스러워하는 ‘인간’이었다. 그도 그 사태에 일부 책임은 있지만 전부가 그 한 사람만의 탓은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나 큰 슬픔이죠, 너무나 큰 슬픔이고.. 이런 얘기를 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 난.. “
화면 너머로, 현재의 이한상 사장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이 다큐멘터리의 기획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라가 폭발적인 속도로 성장하던 시기,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야심 차게 오픈했던 백화점이 5년 만에 무너진 순간, 혼란스러운 와중에 미처 현장을 보지도 못한 채로 수감된 사람. 징역을 선고받고, 온갖 비난을 받았으며, 출소 후 아버지를 잃고, 타국으로 이주하여 인생을 이어 온 사람. ‘내가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 당시 이 세상에서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지 않기를 가장 바랐던 건 아마 이 사람이 아니었을까.
어렸던 나는 세상을 최대한 단순하게 봤고, 쉽게 미워할 대상을 찾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쓸데없이 공감 능력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 나는 이 시점 이후로 더 이상 여태까지 봤던 시선으로 그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하이라이트이자 또 한 번의 파격이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 기획을 통해서, 그(가해자) 또한 직접적으로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이면. 추모제 때 한 번 와서, 망자들을 추모하고... 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비는...그런 것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로 유가족이 줄곧 원했던 것은 어쩌면 가해자 측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가해자의 말을, 직접 얼굴을 보고, 육성으로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거의 항상 이뤄지지 않는 바람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부정해서일 수도 있고,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앞서 서일 수도 있고, 때로는 가해자가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나머지 차마 직접적으로 피해자의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25년이 지나도 그 한 마디를 듣지 못하는 한, 피해자 마음속의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해자 또한 그것을 안다. 그렇기에 가해자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에게 전하지 못한 말 한마디를 부채처럼 떠안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삶의 어느 한순간에, 혹은 죽어서라도. 가해자와 피해자는 언젠가 결국 조우하게 되어 있다.
피해자 유가족의 인터뷰를 녹음한 VCR을 이한상 사장에게 틀어주고, 이한상 사장이 조용히 그 화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비단 삼풍 백화점 참사의 피해자 유가족뿐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안게 된 모든 우리 세대의 사람들과, 오랫동안 그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인지되어 왔던 가해자의 25년 만의 ‘조우’였기 때문이다. 비록 녹화 영상을 통해서 긴 했지만, 이한상 사장은 25년 만에 당시 삼풍 백화점 사건의 현장을 마주했고, 자신에게 직접 전하는 피해자 유가족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로 화면을 고요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답한다.
"무슨 말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 내가 어떤 말을 지금 드린다고 해서 그분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지나간 슬픔이 치유될 수 있을까..여전히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기 때문에....
그걸로 다 치유가........
나는 정말 무능하고, 이런 것을 말할 자격도 없는 그런 사람이죠.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싶고,
어쩌면 정말 잊혀가야 할 슬픔인데... 이 시간에 내가 다시 이런 얘기를 드릴 때
그 아픔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기를..정말 바라고..”
그리고 이 화면을, 다시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이 다큐멘터리에서 피해자 유가족으로서 줄곧 인터뷰를 해왔던 김문수 씨다. 방소 내내 의연하던 그는 이 부분에서야 잠시 한참을 말이 없었고,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25년 만에 그토록 듣고 싶었던 ‘가해자’의 육성을 들은 그는 심경이 복잡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조금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만약에 내가 내가 그때 백화점의 경영자였다면...
저 한 사람한테만 다 뒤집어 씌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모두의 부채가 있다고 생각해요. 같이 만나서 밤새..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죠... ”
25년 전에는 그도 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이 사건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하여 돌이켜 봤을 것이다. 그런 그가 내린 결론 속에, 처절한 원망과 저주는 더 이상 없었다.
뭐랄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KBS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25년의 세월을 지나 화면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저 표정이라니. 그리고 이런 결말이라니..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한동안 느낀 생각과 감정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이 참사를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의 나부터, 단지 시대의 목격자라는 이유만으로 특정된 가해자만을 한결같이 원망해 왔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자’로 구분 짓고 갈 곳 없는 분노를 뿜어댔던 내 모습이 있었다.
그렇지만,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괴물을 만들고, 비난할 대상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나는 왜 그 ‘프레임’에 속아 이 일을 단순화하고, 곱씹어 생각하며 좀 더 깊게 파고들어 보지 않았던 것일까?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그리고 그의 유가족이었던 이가 저렇게 말한다면, 그를 향해 품어 왔던 내 지난 25년 간의 분노는 정당했던 것인가?
이 다큐멘터리의 인터뷰이들은 묻는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 다른지. 2020년에는 삼풍 백화점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이 질문에 당장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인지 사실,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몇 번이나 저런 큰 국가적인 사건을 겪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2의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좀 더 제대로 된 감시자가 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도 언젠가 피해자가 될 것이며, 때로는 ‘가해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만약 어떤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난다 해도 우리 중에 과연 그 책임자들을 문책할 수 있는 자는 감히 없을 것이다.
삼풍 이후 그러했던 것처럼 그저 ‘시간’이 흘러서 어떻게든 해결되기만 기다린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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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마지막 유가족의 인터뷰가 다큐멘터리 제작진에 의해 이한상 씨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한상 씨가 이 다큐를 봤길 바란다. 고통스러운 과거와 마주하고, 비록 지금 그 자신은 떠났지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그 또한 목격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며.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나처럼 삼풍백화점에 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당신의 마음속에 이 충격적인 사건과 관련한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한 번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권한다. 다큐멘터리는 본문 중에도 링크를 걸어두었지만,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