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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pr 12. 2020

17년 만에 머리를 잘랐다

어서 와 단발은 오랜만이지? 머리카락에 대한 소고



최초, 충동의 시작은 코로나 19였다.


 어느 날 갑자기, 거울을 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왠지 방역에 불리하지 않나?’



 작년 이맘때쯤, 70년대 스타일 히피펌으로 한껏 부풀렸던 머리 끝은 도저히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였다. 조금씩  끝부분을 자르면 자를수록 부하게 부풀어 오르는 머리를 보며, 잘은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묶어도, 풀어도, 사방으로 뻗쳐 자기주장을 해 대는 머리.


 고개를 숙일 땐 나보다 먼저 앞으로 뻗어나가 있고, 버스라도 탈라 치면 내가 머리를 별로 기대지 않아도 이미 창문이나 등받이에 닿아 있는.. 도저히 ‘사회적 거리두기’에 협조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 방방 뜨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그래, 이게 뭐 별 거라고 이렇게 치렁치렁 달고 있는 걸까.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아내의 아름다운 금발머리도 아니고, 가족들을 위해 자른 <작은 아씨들> 조의 머리카락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로 바로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귀 밑으로 싹둑 잘라버렸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야 왜 정유미가  <윤식당> 이후 시사회에서 숏단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히피펌을 리셋하는 법은 오로지 숏단발뿐이라는 것도!




이 정도로 짧게 머리를 자른 것은, 17년 만이었다.






귀 밑 3cm.



 유년기를 제외하고, 내 인생에서 최초로 머리를 짧게 잘랐던 것은 중학교에 입학 통보를 받았던 어느 겨울 방학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중학생들의 머리가 천편일률적으로 짧았던 시기였다. 학교마다 기준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래도 ‘단발머리’라는 속성 값 자체는 기본적을 탑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입학하게 될 중학교의 가이드라인은 ‘귀 밑 3cm’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가슴 언저리까지 길게 길러왔던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가서 처음 자리에 앉았던 날. 미용사 언니는 내게 어느 중학교에 들어갔냐고 물었다. ‘ㅇㅇ중학교요’ 하니, ‘아, 거기는 귀밑 3cm야.’ 하며 가위로 내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가위 날의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 뒤를 스쳐간 것도 잠시.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숱도 많고 머리카락도 두꺼웠던 편이라, 포니 테일이나 높이 묶어 올린 똥머리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무겁고 묵직한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툭 잘려 떨어져 나갔다. 늘 덮여 있던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목 뒤가 시렵다 생각했는데, 곧이어 우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바리깡이 귀밑 3cm 선을 넘고 목덜미 위에 돋아 있던 나머지 머리카락을 밀어댔다.


 잠시 후 거울을 봤을 땐..음...거대한 삼각김밥 같은 형상을 뒤집어쓴 내가 있었다. 머리숱이 많아서 하단에 쌓여서 방방 뜬 그 머리는 마치.. 중국 사극에서 종종 나오는 대랍시를 모자처럼 뒤집어쓴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혹은 삼각김밥....?)


앞머리 없는 삼각김밥 상태로 통학했던 중학교 최초의 1년을 나는 내 인생에 더 없을 비주얼 흑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2학년이 되면서, 중학생 선배들이 초등학교에서 들었던 도시 괴담처럼 그렇게 전설적으로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어느 정도 그 기장 안에서 앞머리나 층진 머리 등 최대한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 보게 되면서부터, 심각한 비주얼 흑역사는 어느 정도 극복하긴 했지만... 머리 기를 자유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박탈당했기 때문일까? 이 시기부터 내게는 내 머리를 짧게  자를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에 대한 원망(...)이 솟아났다. 특히 가끔씩 강압적인 두발 단속이 행해질 때는 그런 반발심이 더 심해졌다.


 교복 밑으로 속 머리를 숨긴다던지, 안에 있는 머리만 묶어 올리고 겉 머리만 내린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단속을 피해 가는 친구들을 보면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두발 단속이 벌어질 때마다 방송실로 피신을 가 있는 방송반 친구가 얄밉기도 했다.


 사실, 귀 밑 3cm라는 기준도 어찌 보면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친구는 귀가 남들보다 위에 달려서 귀 밑 3cm로 자르면 머리카락이 턱선에 간신히 걸치는데, 어떤 친구는 귀가 남들보다 밑에 달려 있어서 같은 기준이어도 머리카락이 목덜미 절반을 덮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이발비를 주는 것도 아니면서!


 심지어 운이 없게도, 내가 추후 진학한 고등학교 조차 두발 제한이 있는 학교였다. 그렇게 14살 때부터 내리 6년을 단발머리로 지내게 된 10대의 나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하게 된다.




“이제 어른이 되면, 내 평생 단발머리는 하지 않을 거야.”




 그랬던 내가, 다시 17년 만의 단발머리라니.


 생각해보면, 저런 다짐을 할 당시의 내 나이에 생각했던 ‘평생’만큼은 더 살아온 셈이다. 어느덧 당시 나이의 두 배가 되었기도 하고. (그때의 내게는 30대가 절대 오지 않을 먼 미래 같았으니까.)


 실제로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 기장의 변화는 종종 있었을지언정 목선이 드러날 정도의 짧은 단발을 했던 적은 없었다. 기르기도, 자르기도 하면서, 가끔은 펌이나 염색도 하면서 나름 머리카락의 기장에 대한 고집만은 철저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에 휴학을 하고 인도로 떠났을 때였다. 한국-인도 청년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인도와 네팔의 국경을 도보로 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을 무렵. 대부분 대학생으로 구성되어 있던 그 집단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온 그녀는 스물아홉 살로,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한국 여대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이 언뜻 비칠 때마다 당시의 나는 왠지 모를 이질감과 불쾌함을 느꼈었다. 그때의 철없던 내게는 스물아홉이란 아줌마나 다름없이 느껴졌을 시절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몰래 이렇게 생각하곤 했던 것 같다.



 ‘난 스물아홉이 되면 절대 저렇게 긴 머리는 안 할 거야. 좀.. 어려 보이려고 발악하는 것 같잖아!’



 지금은 저렇게 생각한 어렸던 나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반성한다. 당시에는 서른이 되면 저절로 머리를 적당히 자를 줄 알았다. 다 아줌마가 되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나는 올해 초까지도 머리를 가슴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렸다. 한껏 부풀어 오른 히피펌을 하고. 정작 어릴 때 그토록 해 보고 싶었던 피어싱은 30세가 된 기념으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든 걸 ‘어려 보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이제 더 나이 들면 못하지 않을까? 더 안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조급함이 행동을 부추기는 데 조금 강하게 작용했을 뿐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절대 자르지 않겠다’ 던 귀밑 3cm로 회귀한 나 자신을 보며. 세월이라는 것을 조금은 실감했다. 그리고 인간은 변하는 존재며, 상황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부끄럽지만 또 한 번 깨달은 것 같기도 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잘 꾸미지도 못했던 시절의 기억만 가지고 평생 ‘나는 짧은 머리가 안 어울려’라고 생각했던 시간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버려서, ‘지금 머리를 자르면 완전 아줌마 같을 거야’라고 두려워했던 점이라던가. 어릴 때 봤던 캄보디아 여인처럼, ‘이 나이에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는 것도 좀.. 너무 어려 보이려고 발악하는 것 같지 않나’고 나 자신과 남을 검열했던 나의 모습들이 주마등같이 흘러가는 순간이었다.


 그 스물아홉 살의 캄보디아 여성도, 단지 그냥 그 스타일이 좋았을 뿐이 아니었을까?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라 그냥 유지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굳이 ‘어려 보이려고 발악’ 한 게 아니지 않을까. 어렸던 나는 정말 잔인했구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사실 그동안 내가 줄곧 단발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나이가 30대 중반이 되었으니.. ‘이제 한 번 단발로 자르면 절대로 긴 머리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긴 머리와 나이에 대한 집착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다시는 긴 머리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비장한 각오로 잘랐지만.


 지난 주말에 뜬 커피 브랜드 화보 속의 공효진의 치렁치렁한 긴 머리가 예뻐 보이는 걸 보고, 왠지 모를 용기를 얻는다.

 


 30대의 공효진은 그 스물아홉 캄보디아 여인과 비슷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있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 때 이 머리카락은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주눅 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공효진 is 뭔들’이긴 하지만!)


 그래, 어차피 앞으로 30년은 더 살텐데. 머리 기를 날은 충분히 많고, 30대, 40대에도 충분히 긴 머리카락으로 아름다운 스타일링이 가능하지 않을까? 뭐, 굳이 긴 머리가 아니어도 괜찮고!


 ‘나이에 맞는 스타일링’이라던지, ‘늙어 보인다’, ‘어려 보인다’던지, ‘한 번 자르면 다시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던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헤어스타일 아래의 나 자신이 아닐까. 단발의 나여도, 장발의 나여도. 심지어 뽀글뽀글 펌을 해도, 변치 않는 애티튜드에서 배어 나오는 ‘나 다움’ 말이다.


 자르면 천지가 개벽할 줄 알았던 머리카락을 막상 잘라보고 나니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17년 만에 자르든 20년 만에 자르든, 생각보다 드라마틱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중요한 건 나 자신이지, 내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귀밑 언저리에 뭉쳐있는 아직은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매만지며, 오늘도 떠올려 보는 것이다.





+.


언젠가는 나도 지금의 나처럼

지금이야 ‘나는 할머니가 돼도 빠글빠글한 파마머리는 절대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내가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마치 평생 단발머리를 하지 않겠다 생각했던 10대의 나를 돌아보고 있는 30대의 나처럼, 언젠가는 60대의 나도 30대의 나를 이런 기분으로 추억하는 날도 오는 거겠지. 어느 쪽이든 아직 내겐 먼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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