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Jan 05. 2020

Arrivederci ;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우리 생애 마지막 만남이 된다 할지라도.


 내게는 아주 특별한 친구들이 있다. 실바, 그리고 페루치오.



 70대인 그들 부부는, 이탈리아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20대 초반, 봉사활동을 갔던 마을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던 이후로 그들은 언제나 나를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친구로서 대해주었고, 이후로 내가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그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만났을 때, 내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그들과 함께 한 여름휴가를 마치고 떠나던 날,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던 이탈리아의 한 시골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들은 연신 눈물을 보였다. 반면, 그들을 달래주는 나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울지 마요! 5년 안에 다시 돌아온다니까?”


 너무나도 서글프고 애틋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빛에, 나는 ‘5년 내로 신혼여행으로 돌아오겠다’고 거듭 약속하며, 헤어짐, 그게 뭐 별거냐는 듯 웃었다.

 당시 나는 누군가와의 이별이 그렇게까지 슬픈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고 젊은 사람이었다. 젊음은 무척 이기적이라, 때로는 저도 모르게 무신경한 말을 내뱉게끔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5년 뒤를 호언장담하는 나의 말, 그리고 그 젊음이 얼마나 무심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실바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사라, 우리는 이미 환갑이 넘었어. 너의 5년은 우리의 5년과 같지 않아.”



 그 말을 듣자마자,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내뱉은 ‘5년 뒤에 돌아올게’라는 말은 진심이라기보다는 농담이나 빈말에 가까웠다. ‘또 오면 되지’, ‘나중에 또 보면 되지’, 정도의. 그냥.. 자주 보기 힘든 또래 친구들과 헤어질 때, 그저 그 정도의 가벼운 의미를 담고 있는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의 늙은 친구들은 젊은 친구의 가벼운 한마디를 그저 농담이나 빈말로 듣고 넘길 수조차 없는 나이였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생각해서 가볍게 내뱉을 수 있는 ‘5년 후’, ‘10년 후’가 60세를 넘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와 비슷한 정도의 확신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리는 상황.


 그들은 그 이상 어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내심 이 만남을 거의 이번 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아마 우리 남은 삶 속에서 마지막 만남일 거야’,라고. 그 이후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떻게 그들과 작별하고 그곳을 떠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나는 그들의 5년과 나의 5년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빈 말로 했던 약속은 꼭 지키고 싶은 어떤 맹세로 돌변해 있었다. 5년 동안 그들이 건강하길 바라며, 어쩔 수 없이 늙더라도 너무 쇠약해지지는 않기를 바라며.







 그렇지만, 한국에 돌아온 이후의 삶은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갔다. 26살 이후 여태까지의 내 인생은 한 해 한 해가 그 전 해와 같지 않았다. 대학원 생활, 취업, 이직, 연애 등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20대 후반 - 30대 초반까지의 내 삶은 매 해 숨 가쁜 변화를 겪었고 그러한 돌풍에 휩쓸리듯이 허겁지겁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결해 가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러버렸다 약속했던 5년은 이미 훨씬 지나버린 지 오래였고.


 가끔씩 띄엄띄엄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그저 안부를 묻고 근황 사진을 몇 장 교환하는 것뿐으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오가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메일을 주고받았던 것이 2015년쯤이었으니.


 상대가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예전부터 원거리의 상대와 끊임없는 우정을 확인하고 교류하는 일이 벅찬 사람이었다. 마음 한 편으로는 가끔씩 그들을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터인가 연락이 끊겨버린 이후로는 그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게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그저 안부만 확인하는 것뿐인데도 뭔가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나에게도 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알릴 만한 무언가,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할 만한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찌질하지만,, 내게 뭔가 ‘좋은’ 일이 생기기를, 좋은 소식이 생기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그들에게 들려줄만한 딱히 좋은 소식이 없다는 게 부담스러웠달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연락이 끊긴 지난 5년 동안 혼자 문득문득 불안해하기도 했다. 가끔 그들의 생각을 할 때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나를 보며 눈물짓던 그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혹시 그들에게 정말 그런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들이 만약 그 사이 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했다면, 혹은 어떤 사고라도 당했다면. 나에게 그 소식이 와 닿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 무척 후회하지 않을까.


 




 2019년의 크리스마스는 유독 외로웠다. 2010년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나 혼자, 오롯이, 누구 하나 연락할 사람도 없이 집에 틀어박힌 채로 보낸다는 것이 너무도 우울하고 괴로웠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가장 행복했던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떠올렸을 때,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실바와 페루치오.




 이탈리아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때,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긴 휴가가 주어졌었다. 그 틈을 타서 여행을 가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어학연수조차 장학금을 타서 온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로서는 물가 비싼 이탈리아에서 돈을 쓰면서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때였다. 실바와 페루치오가 나를 초청한 것은. 나는 버스를 타고 토리노로 향했고, 토리노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들어간 한 작은 기차역에 내렸다.


Benvenuti!! 


그들은 돌아온 나를 처음 봤을 때처럼 뜨겁게 반겨주었다.


그해 겨울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 덮인 산길을 수동운전으로 능숙하게 올라가면서, 귓구멍까지 털이 난 페루치오는 사람 좋게 웃었다. 그들은 장성하여 독립한 딸과 아들이 쓰던 2층의 아늑한 다락방을 내게 손님방으로 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의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맛있는 것을 해 먹고, 눈밭을 산책하고, 그들의 손자와 함께 놀아주며, 때로는 다른 나이 든 친구들을 방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TV를 보며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며, 술잔을 부딪히기도 했다.


 

이 집에 머무는 내내 그들의 손자 줄리오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당시 내 서툰 이탈리아어로도 의사소통이 문제 없는 나이이기도 했고!


 그때는 마치 내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같았는데, 나 혼자 집에 틀어박혀있는 지금은.. 마치 내가 이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문득, 참을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두꺼운 이불처럼 꼼꼼히 덮어, 눈앞이 온통 캄캄해지고 답답했을 때.



 그때였다. 그들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한 것은. 


새로운 메일 수신함에 굵은 글씨로 표시된 실바와 페루치오의 이름을 본 순간, ‘두 사람 다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이 세상의 어딘가, 심지어 그것이 저 멀리 이탈리아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떠올려준 것이 순수하게 기뻤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본 메일에는, 이런저런 - 그들은 둘 다 잘 지낸다고, 어느덧 70대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며, 나의 소식을 들려줄 수 있겠냐고 - 말들이 쓰여 있었지만, 나를 울컥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첫 문장이었다.



“Sei sempre la nostra Sara."
너는 항상 ‘우리의 사라’ 일거야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최근에 내가 너무도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2019년의 나는, 특히 크리스마스 즈음의 나는 너무도 외롭고 정에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렇게 festive 한 날들이 몰려있는 날들에는 아무리 무덤덤하게 지나가려 해도 결국 나만 혼자라는 사실에 상처를 받아버리게 되지 않던가?)


 나는 그들과 안부 연락조차 잘 챙기지도 못했는데, 언제나 나에게 이렇게 한결같은 사랑을 주며 기억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고맙고도 슬펐다.


 최근 <윤희에게>를 봤기 때문일까, 혹은 최근에 봤던 영국의 다큐 <UP> 시리즈 때문일까. 나이 들어간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상념이 깊어졌기 때문일까. 일전에 헤어지던 기차역에서, “우리는 이제 환갑이 넘었고, 앞으로 남아 있는 날들이 많지 않다 너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5년 뒤’는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야”라던 실바와 페루치오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나에게는 계기가 필요했다. 나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결국 2020년이 밝아오던 첫날, 내가 한 일은 6개월 뒤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끊는 것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게 되기 전에, 그저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기 전에, 또래의 친구들과만 어울렸었다면 미처 느끼지 못했을 절박함으로, 나는 이번 여름에 그들을 다시 만나러 가기로 했다.


 <윤희에게>의 마사코는 소싯적의 사랑을 떠올리며,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날들이 길지 않으니,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사랑이 되는 거겠지’라고 말한다. 나와 그들의 ‘남아있는’ 시간의 가치는 같지 않다. 나의 5년과 그들의 5년은 다르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찾아가도 그들이 더 이상 반겨주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들과 30년의 나이차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살면서 얼마나 더 보겠어’라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나 가벼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여태까지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내 대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집안의 어르신이나 동료의 가족 어른 정도로, 직접적으로 나의 친구를 떠나보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이 나의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기에, 그전에, 하루라도 빨리, 이토록 충실하지 못하고,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친구이지만 나를 ‘nostra Sara(우리의 사라)’라고 불러주는 나의 따뜻한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추억할 거리를 만들고 싶다. 비록 그것이 몇 년 만에 며칠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라 하더라도. 그 시간은 다른 어떤 일을 하며 보낸 시간보다도 소중하고, 가치 있게 기억될 테니까.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삶에서 기억에 남을 만큼 소중했던 기억뿐이니.


 지난번에 그러했듯이, 그들은 나를 이번 생에 다시 오지 않을 만남처럼 귀하게 맞아줄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찾아갈 것이다. ‘또 오면 되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20대의 나와는 다르게, 30대의 나는 흘러가는 시간의 가치와, 그들이 말하는 ‘남아 있는 시간’의 가치와 그 뒤에 숨은 두려움을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일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나이 든 그들의 모습에 마음 아파할 수도 있지만, 내 정수리에 돋아난 흰 머리카락을 보여주며 우린 서로 함께 낄낄댈 수도 있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윤희에게>에서 쥰이 말했던, 꿈 속에서 그러했듯이,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을 조용히 만끽할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을 때.

 비록 그것이, 이 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이라 하더라도.

 Arrivederci.





+

사실 ‘우리 다시 보자’는 ci vediamo로, ‘arrivederci’는 헤어질 때 '안녕(Goodbye)'의 용도로 쓰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말의 생긴 모양새가 무척 마음에 든다.


a(~할) + ri(다시) + veder(보다) + ci(우리).


단어 자체의 생긴 모양에서 ‘우리는 꼭 다시 만난다’는 재회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헤어짐의 인사말 중에서도  다정한 인사말이라고 생각한다.




+

이것은 2020년에 처음으로, 내 브런치에 쓰는 총 40번째의 글이다. 해가 바뀌었다고 햇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의미가 두어지는 글이다. 2020년에는 조금 더 많은 글을 성실하게 써 나가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